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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02화 (102/172)

102화

광풍도, 폭우도, 천둥 번개도 물에 씻겨 나간 것처럼 사라졌다.

축축하게 젖은 내 꼬락서니만이 내가 겪은 게 환각이 아니란 걸 증명해 줬는데.

‘여기가 땅바닥인가?’

애매하다.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감이 잘 안 오는 상황.

천둥 번개를 구경할 땐 시간 감각마저 잊은 채 몰두했기 때문에, 100일이 이미 지났을지도 모르고…….

그나마 물어볼 만한 건 FAD였는데, 무슨 일인지 이 녀석도 보이지 않았다.

캉, 캉, 캉…….

그때 금속이 맞부딪치는 듯한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독특한 소리가 누군가의 갈채 소리인 걸 알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보니, 안갯속에서 넷째 사형이 걸어오고 있었다.

“사형.”

[해냈구나.]

해냈다.

그 말인즉…….

[여기가 지상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일단 보이는 풍경은 딱히 봉우리에서 둘러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지면의 면적이 많은 것 같기는 한데, 안개는 여전했기 때문에 큰 체감은 들지 않는 느낌.

그때 사형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터덜터덜, 어디선가 날아온 FAD가 다시금 사형의 팔과 합체했다.

사형은 그 상태로 잠깐 서 있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예상 밖의 일이야.]

나도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 사라지진 않은 상태라서, 멋쩍은 웃음밖에 보여 줄 게 없었다.

[염화제일공에 진전이 있었던 것도 놀라운데, 너는 그 밖의 성과까지 거뒀다. 특히 마지막에 보았던 보법은 가히 일절一絶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지. 응용하기에 따라선 마왕의 권능도 피할 수 있을 터.]

“그럼… 전 성공한 겁니까?”

[그래.]

나는 순간적으로 다리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아…….”

많은 것이 응축된 한숨이 나왔다.

영산의 특성상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한 이틀은 퍼질러 자고 싶은 기분이다.

“그럼 이제 돌아갈 수 있겠군요.”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 말에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습니까?”

[100일이 되기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진짜 아슬했네.

이 정도면 사실상 절반은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한 시간이라…….’

나는 사형을 보았다.

“달리 말하면, 아직 한 시간 더 머물 수 있다는 거죠?”

[그렇긴 하다만, 지금의 네게 더 이상의 수련은 불필요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설령 남은 수련이 있다고 해도 이번엔 내 쪽에서 거절이다.

…수련은 말이다.

“제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말?]

나는 스스로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천보의 영향 탓인지 근육이 약간 쑤셨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한 번 싸울 정도의 기력은 있다.

나는 스승님에게 배운 예법을 취했다.

주먹을 쥔 손을 다른 쪽 손바닥으로 감싸는 형태.

내 세상에서는 쓸 일이 없는 강호의 예법.

[…하.]

사형이 픽 웃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흥이 올라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천하제일인 백노광의 다섯 번째 제자, 루안 배드니커가 정식으로 비무를 청합니다.”

사형이 날 보며 물었다.

[안 쉬어도 되나?]

“지금이 절호조인 것 같아서.”

[그래……?]

사형이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나와 같은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올마스터 백노광의 네 번째 제자인 아랑亞郞. 루안 배드니커의 비무를 받아들이겠다.]

* * *

사실 나는 다른 사형과 직접적으로 비무한 적이 없다.

사형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영산에 자주 들르지도 않았거니와, 들른다 해도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형들의 무공에 대해선 들은 적 있다.

스승님에게 들은 게 맞다면, 넷째 사형- 아랑의 무공은 만변금강공萬變金剛功이다.

- 만변금강공은 심법이되, 심법이 아니다.

예전엔 스승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겠다.

사형은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운공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니, 여타 심법과는 다른 형태의 무공일 것이다.

사형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나를 보았다.

선공, 아니면 기다릴까.

갈등하는 나를 보며 사형이 말했다.

[금속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지?]

뜬금없는 물음이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대꾸했다.

“단단함?”

[그렇지. 무릇 금속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단단하다. 하지만, 세상엔 정말 갖가지 금속이 있지.]

사형이 금속으로 된 팔을 보인 순간이다.

촤르륵-.

그 팔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 잠깐 정신이 가출했다.

금속이 꼭 슬라임처럼 출렁대고 있었다.

“그건… 대체 뭐죠?”

[형상기억합금.]

“…….”

그러니까 그게 뭔데.

[간다.]

그 순간 출렁거리던 액체 금속이 형태를 갖췄다.

척 봐도 살벌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검이었다.

탓!

사형이 나를 향해 쇄도하는 걸 본 순간, 나도 급히 정신을 차린 다음 대응할 준비를 했다.

우웅!

단순한 검이 아닌 듯하다.

칼날을 피한 순간, 용암과도 같은 열기를 느꼈다.

저 검, 염화제일공을 익힌 내게도 위협적일 만큼의 초고온이다.

어쩐지 나도 검으로 대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덜컥!

“……?”

그 순간 허리춤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뜻밖의 상황에 시선을 내리니, 칠죄검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이 검, 여태까지는 없었다.

[검도 썼던가?]

“한번 봐 보실래요?”

[재밌겠군.]

사형의 말에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제사장과의 마지막 싸움을 떠올리며, 즉석에서 은하검을 펼쳤다.

카카캉!

불똥이 튈 만큼 거친 공방.

사형의 검엔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검술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면만을 추구하는 살인 기술을 쓰는 느낌이다.

[좋은 검이군. 웬만한 강도로는 내 블레이드를 버티지 못할 텐데.]

“일단은 유물인지라.”

[분해하고 싶군.]

“에헤이. 벌 받아, 요!”

나는 마지막 어조에 힘을 주며 사형의 복부를 걷어찼다.

캉!

무슨 금속 판때기를 때린 것 같은 느낌이다.

‘오케이. 역시 내공 없인 못 뚫겠군.’

사실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서로 목숨을 뺏기 위한 살상전이 아니라, 서로의 무위를 겨루는 비무比武니까.

사형의 양팔은 계속해서 변했다.

칼이었다가 길쭉한 창이 됐고, 둔기에 도끼, 간간이 주먹까지 휘둘렀다.

무수한 톱날이 달린 흉측한 형태가 되기도 했고, 손가락이 맹금류의 발톱처럼 구부러지기도 했다.

섬뜩한 점은, 사형은 그 모든 무기를 완숙의 경지로 다뤘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만변萬變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만 가지의 수단을 지녔다고 해도 그걸 구사하는 건 한 명이다.

즉 반드시 많은 수단을 지닌 게 장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악마 무리와 최후에 싸웠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왼손엔 은하검, 오른손으로는 백일식.’

거기에 왼쪽 발로는 암보, 오른쪽 발로는 뇌천보를 밟아 볼까, 하는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가 접었다.

본래 발걸음이란 난잡하지 않고 조화로워야 한다.

푸화아아악!

그 순간 사형의 몸에서 거센 열풍이 휘몰아쳤다.

끓는 주전자에서 나올 것 같은 김이 몸뚱이에서 방출된 것이다.

살짝 몸을 움츠렸을 때, 이미 사형은 하늘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발바닥에서 무언가 뿜어져 나오는 건 알겠다.

저 출력을 바탕으로 비행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사형이 한쪽 팔을 뻗었고, 다른 손으로는 지탱하듯 팔뚝을 잡았다.

마치 팔이라는 이름의 무기를 내게 겨냥한 모양새다.

철컥!

아니나 다를까, 사형의 팔 형태가 다시 바뀌었다.

채채채챙!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형태로.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물었다.

“…그건 또 뭐죠?”

[뭐로 보이나?]

“음… 대포?”

[비슷하군.]

사형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천 배는 강할 거다.]

직후 대포 팔에 빛이 응축되더니.

꽈아아아아앙-!

귓전을 찢는 폭음과 함께 에너지탄이 내게로 방출됐다.

‘미친-.’

죽일 셈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투사체의 속도가 번개보단 빠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즉시 뇌천보를 밟았다.

뇌천보는 낙뢰를 피하며 고안해 낸 무공이며, 내 개인적 생각으론 경공에 한없이 가까운 보법이다.

그런데도 경공이 아닌 보법으로 분류한 이유는 뇌천보가 가진 특징 때문인데…….

목표 지점까지 이동한 이후엔 잠깐 몸이 멈춘다.

아마 이 단점이 사라지면 이 보법은 경공으로도 활용할 수 있겠지.

‘…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방금까지 서 있었던 지면이 뒤엎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하늘에 있는 사형을 향해 크게 도약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형의 몸이 시야에 가득 채워질 무렵, 칠죄검을 휘둘렀다.

까앙!

사형은 어렵지 않게 왼팔로 막았다.

어느새 사형의 왼팔은 널찍한 금속 방패 같은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오른팔은…….’

아직도 대포의 형상.

‘과연.’

부피가 큰 만큼, 아까처럼 빠르게 전환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제야 나는 사형의 전투 방식을 조금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형의 신경 대부분이 칠죄검으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았고.

퍼억!

그 즉시 왼손으로 사형의 어깨를 잡은 다음 무릎 차기를 날렸다.

‘이건 느낌이 왔는데?’

내 무릎은 사형의 복부에 꽂혔는데, 주먹으로 휘둘렀을 때보단 감촉이 있었다.

물론 직후 사형이 왼손의 방패로 나를 후려쳤지만.

꽈앙!

나는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 지면에 처박혔다.

“푸핫…….”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여기까지인가.’

하산할 때는 내공 없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 나보다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선 그 필요성이 훨씬 부각된다.

사형은 내게 전투 의지가 사라졌단 걸 깨달았는지, 더는 공격할 기세 없이 천천히 하강했다.

“역시 강하시네요.”

[내공이 있었다면 달랐겠지.]

모든 수단을 쓰지 않은 건 사형도 피차일반이지만…….

굳이 서로 체면을 세워 줄 만큼 어색한 사이도 아니라서 그냥 웃었다.

[만족스럽나?]

“네.”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야겠군.]

나는 넷째 사형을 보았다.

신기한 기분이다.

사형의 얼굴은 이목구비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매끈한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고개를 마주할 때면 항상 시선이 맞은 듯한 느낌을 항상 받았다.

사형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까.

문득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이별 선물이다.]

핑그르르 날아온 물체를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이게 뭐예요?”

[코인.]

확실히 동전처럼 생긴 물건이긴 한데.

[단 한 번, 그걸 사용하면 날 부를 수 있을 거다.]

“어… 제 세상에서요?”

[네 세상에서. 그 정도 권능은 가진 물건이지.]

나는 신기한 눈으로 동전을 보았다.

생긴 건 평범하고, 뭔가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사용법은요?”

[하늘로 튕기면 돼.]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었지만, 좀 더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일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사형과 대화한 시간은 몇 시간도 안 돼서 그런가.

“또 볼 수 있을까요?”

사형이 낮게 웃더니, 갑자기 나를 불렀다.

[막내야.]

“네?”

[네 이름이 뭐였더라.]

“…….”

나는 두 눈을 깜박이다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어쩐지 넷째 사형도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루안이요. 루안 배드니커.”

[그래. 그걸 잊지 마.]

그 순간 사방에 있는 안개가 나를 둘러쌌다.

나는 거북함보단 편안함을 느꼈다.

적당한 온도의 온수에 전신을 담근 것 같다.

안개가 사형의 모습마저 집어삼켰다.

그 너머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해낼 거다.]

* * *

“…듣고 있어?”

“…….”

“이 자식 표정이 왜 이래?”

“집에 가고 싶은 거 아니야?”

“얘는 여기가 집이잖아.”

“아, 그랬지.”

실없는 대화 소리.

나는 잠깐 두 눈을 깜박이며 상황에 적응했다.

다소 소란스러운 장내 분위기와 음식 냄새, 내게 향해 있는 두 개의 시선.

이 녀석들은…….

“카리스.”

“어?”

“에반.”

“왜?”

나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 카리스와, 소교주가 되기 전의 에반을 보았다.

멀쩡한 이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여긴 식당인가?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무심한 얼굴의 헥토르와 불퉁한 표정의 카론, 막 식당을 나서는 세렌의 모습도 보였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에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푹.

손에 들고 있던 식기로 눈앞에 있는 소시지를 찌른다.

나는 조금 식은 소시지를 다소 난폭하게 뜯어 먹으며 웃었다.

“…절호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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