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밥을 다 먹을 때쯤 지금이 어느 시간대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수련회 1주 차 금요일 점심이다.
풋내기 영도 녀석들이 슬슬 수련회에 적응해 가던 그 시간대 말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순차적으로 떠올려 보니…….
여러 사건이 본격적으로 휘몰아치는 건 내일부터다.
일단 토요일 오전에 영도들의 순위를 발표하고 오후엔 개인 과목 선택과 조 편성이 있다.
저녁에는 시험에 대비한 각 조의 포인트 사용 시간.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일요일-.
대참사가 발생하는 2차 특별 시험이 시작된다.
즉 회귀 시점이 금요일이라는 건, 사건 발생 전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고.
“루안, 어디 가는데?”
“잠깐 바람 좀 쐬러. 먼저 가라.”
“아, 그래.”
에반과 카리스를 먼저 보낸 다음, 나는 홀로 영도 동의 뒤뜰로 향했다.
잠깐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얼떨떨하고,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에 적응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오늘 저녁은 수렵선생의 대련 시간이었고, 오후 수업은… 뭐였더라?’
100일 전의 일이라 그런지 세세한 부분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거였다면 기억이 났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순간이다.
나 혼자 있는 뒤뜰에, 어쩐지 수상한 거동의 영도 두 명이 나타났다.
“…너는.”
“루, 루안?”
공교롭게도 둘 다 아는 낯짝이었는데, 한 놈은 여전히 파리한 안색의 소유자인 스컬.
다른 한 놈은 카론의 동료? 친구? 아무튼… 돈 많다는 거상 집안의 후계자인 제로스다.
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아, 안녕.”
“…….”
스컬이 머쓱하게 대꾸했고, 제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딴 데로 가자.”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뒤통수를 보며, 나는 친절히 조언해 줬다.
“그냥 여기서 해도 돼.”
“뭘?”
“포인트 거래 말이야. 그거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니야?”
“……!”
제로스의 얼굴에 파문이 번졌지만, 이 녀석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뒤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어떻게 알았어!?”
제로스가 스컬을 노려보니, 그제야 스컬이 자신의 입을 턱 막았다.
“미, 미안…….”
“…하아.”
제로스의 시선이 나를 보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100일 전부터.”
“하.”
제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이 새끼는 말투도 카론 판박이였다. 분위기도 비슷했고.
“말하기 싫다면 됐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제로스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우리는 벌써 너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점수를 모았다. 네가 얼마나 발버둥 치든 간에 이 점수 차이를 좁히긴 힘들-.”
“고작 31점이면서 무슨. 그 정도면 아직 할 만해.”
“……!”
나는 깜짝 놀란 제로스의 얼굴을 보며 낄낄 웃었다.
“카론은 43점. 신바란 놈은 28점이었나, 9점이었나.”
“너, 너… 그걸 어떻게…….”
물론 이건 내일 발표될 점수고, 수업은 아직 남았으니 세세한 점수 차이는 1~2점 정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며 슬슬 본론을 꺼냈다.
“뒤뜰에서 거래하는 이유는 교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겠지? 즉 통신 수정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건데, 나한테도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내가 왜.”
“싫으면 거래하든지.”
이 단어에 제로스가 살짝 반응했다.
“…거래?”
“응. 포인트로 살게.”
그러자 둘 다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본다.
“사겠다니…….”
“왜. 카론이 나랑은 거래하지 말라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했다고 해도 따를 이유가 없고. 거래에 관해선 내가 녀석보다 뛰어나니까.”
“오호…….”
역시 단순히 카론의 부하 노릇을 하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던 거다. 루안 배드니커, 넌 상위권을 노리는 게 아니었나?”
“그렇긴 한데, 뭐 이걸로 10점, 20점 요구할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때 소모한 점수 때문에 네가 순위권에 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걱정해 주는 거야?”
제로스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날 보더니 말했다.
“…눈앞의 실리만을 쫓는 상인은 평생 이류를 벗어나지 못해. 중요한 건 거래의 본질을 파악하는 거지.”
멋진 말인데.
“본질이라고 할 만한 이유는 없어. 그냥 여기서 몇 점 버린다고 크게 위태로울 것 같진 않아서.”
“…자신감이 대단한데. 배드니커라서 그런가?”
나는 그 말에 담긴 감정을 느끼고 물었다.
“배드니커를 싫어하나?”
“진심으로 묻는 거냐? 위대한 가문 중에서 너희를 좋아하는 곳은 손에 꼽을 거다.”
“흠…….”
그 정돈가?
“그럼 거절하는 거야?”
이 말엔 뜻밖에도 고개를 젓는다.
“아니. 사적인 감정을 사업에 실을 순 없지.”
“…….”
이거 사업이었구나.
“…3점이다. 그러면 내가 파악한 통신 수정의 위치를 모조리 말해 주지.”
“좋아. 거래 성립이다.”
나는 장난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놈의 성격상 거절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잡는다.
상인치고 단단한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한 가지 깨달았다.
적어도 제로스는 거래로는 절대 장난치지 않을 거다.
* * *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던 오후 수업의 정체는 교의선생의 이론 강의였다.
이단심문관 주니앙.
핏물로 주저앉았던 여자가, 단상 위에 선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태양교는 72교의 분파로서, 제국에선 국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지. 실제로 현 황제 폐하께선 태양교의 주교께 직접 세례를 받으셨으며-.”
“…….”
나는 왠지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 경우엔 반대로 영산에서 보낸 100일의 시간이 실은 꿈이었던 건 아닐까?
꾸욱…….
나는 주머니 안에 있는 동전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이단심문관이라.’
주니앙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봤다.
사소한 건 제쳐 두고 일단 눈치가 대단히 빠른 여자였다.
최종적으론 후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 꼴이 되긴 했지만, 머리가 나쁜 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끌어들여서 나쁠 게 없는 인재란 뜻.
나는 대충 수업에 집중하는 척, 이런저런 작전을 구상했다.
실질적으로 지금이 머리를 굴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우선은 모든 재앙의 원흉인 제사장.
그놈과의 일대일을 가정해 봤다.
‘기각.’
100일의 수련으로 나는 충분히 강해졌지만, 필승을 장담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전생에서 허무하게 죽은 건 주니앙이나 루크만이 아니다.
제사장 후안 또한 자신의 힘을 절반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마왕에게 죽었다.
그 남자가 다른 어떤 수단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혼자 싸우려는 것.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다.
‘아사드한테 말할까? 제사장이 후안이라고?’
그 대마법사 양반이라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테지만…….
이것도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 까다로운 인간이 내 말을 순순히 믿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만약 그 정체를 어떻게 특정했느냐고 묻는다면 변명거리가 궁하다.
‘음… 으음…….’
끙끙 골머리를 앓으며 필기에 이런저런 작전을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루안 배드니커, 가산점 1점.”
“…음?”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은 주니앙이 말했다.
“열정적인 태도가 보기 좋아서.”
“…….”
뜻밖의 이득.
이후로는 눈치가 좀 보여서 수업에 집중한 척 조금씩 연기를 펼쳐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시간.
식판에 음식을 퍼 담고 자리를 찾는데.
‘…….’
주황색 머리카락의 뒤통수가 보였다.
팜이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털썩 앉았다.
“안녕.”
“응? 루안이잖아?”
팜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보았다.
겁에 질린 채 죽어 있던 모습이 살짝 겹쳤다 금방 사라졌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딱히 없어.”
“그렇구나.”
“그나저나 너, 채소 좋아해?”
팜의 식판 위엔, 뭐랄까.
풀이 가득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부의 대초원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팜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응. 실은 고기를 못 먹어. 잡내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구.”
채식주의자셨구만.
전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약 일주일 동안 영도 녀석들과 열댓 번은 같이 밥을 먹었으니, 실은 조금만 주변을 둘러봤어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난 고기를 좋아해.”
“말 안 해도 그렇게 보여.”
“그래?”
이후로도 나는 팜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오두막에서 팜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조금만 더 이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생겼었다.
일반적으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지만, 나는 그 경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손에 쥐었다.
“아빠는 날 이해해 주는데, 엄마가 너무 고지식해. 솔직히 아직도 귀족 노릇을 하려는 걸 보면 짠하기도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며, 나는 팜에 대해 알아 갔다.
이 녀석은 언니가 한 명 있었고.
에반과 비슷한 몰락 가문 출신이며.
장래엔 출판사를 차리고 싶다는 듯하다.
수련회에 참가한 이유는, 그때를 대비한 인맥을 쌓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중에 헥토르 님이랑 관계 좀 주선해 주라. 덤으로 세렌 님도!”
“그 둘을 노리고 있었구만.”
“내 인맥 버킷 리스트 끝판왕인 두 명이거든! 이건 감이지만, 그 두 사람은 나중에 크게 될 게 분명해.”
팜이 눈을 빛내더니, 슬쩍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밖에도 카론이나 제로스, 샤를, 에반이랑…….”
손가락까지 써 가며 세던 팜이 갑자기 나를 가리키더니 외쳤다.
“그리고, 너도!”
“나?”
“응. 내 감은 잘 안 틀리걸랑. 아하핫.”
예의상 말하는 건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아서 나도 웃었다.
그때 팜이 급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헉… 네 약혼자다.”
세렌?
“야단났다. 우리 사이 오해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전 약혼자라니까.”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녀석도 아니다.
세렌은 식판을 반납한 다음 덤덤히 식당을 나섰다.
여전히 주변은 쳐다보지도 않는 잘나신 태도라고, 전이라면 생각했겠지만-.
이 앞에 일어날 참사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 세렌의 머릿속은 그걸 막을 생각으로 온통 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들에 할애할 신경이 없는 거겠지.
‘…본명이라.’
세렌의 유언이 잠깐 생각났지만, 어차피 지금은 시간 낭비다. 당장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식판 위의 음식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저녁을 먹은 이후엔 대련 시간이 펼쳐졌다.
오늘 하루 종일 고안하고, 수정하고 마침내 채택한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오늘도 만만한 상대를 찾아 헤매는 영도들 사이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금방 묵직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오늘도 나와 싸울 건가?”
수렵선생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일단 묻는 형식이긴 하지만, 표정과 기세를 보면 내가 거절할 것이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이죠.”
“흠. 좋다.”
수렵선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우리는 곧바로 대련을 준비했다.
열 발자국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봤다.
“…….”
나는 잘 단련된 수렵선생의 육체를 보았다.
전생에서 비록 허무하게 죽기는 했지만, 수렵선생은 분명 대단한 실력자이고 고수가 맞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심 이번 대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렵선생은 100일 만의 복귀전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는 상대니까.
‘…어떡한다.’
그래서 살짝 갈등이 일어났다.
작전대로라면, 나는 오늘 전과 달리 처참한 패배를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
무인으로서의 루안 배드니커는 다른 의견을 주장했다.
딱 한 번은, 이 남자와 전력으로 붙어 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