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자칭 칼자크란 이름의 청년이 크게 소리친 이후, 장내엔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갈색 머리의 청년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알던 칼자크는 좀 더 수염이 많았는데…….”
“그건 산에 틀어박혀 있었을 때니까! 문명사회로 복귀했으면 당연히 외모 관리도 다시 해야지!”
“음. 좋아요. 당신 목소리가 칼자크랑 흡사하고, 수염 아래에 그런 매끈한 얼굴이 숨어 있었단 것도 인정하죠.”
내 생각보다 최소 20살 정도 어린 외견이긴 한데, 정작 내 부친부터가 동안 끝판왕이니까 납득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아직 남았다.
“발터 경,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네? 하지만…….”
“알겠습니다.”
발터가 동료 기사에게 눈짓하더니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청년이 휘파람을 불었다.
“뭐야? 가문에서 찬밥 취급받을 줄 알았더니, 제법 존중받는 모습이잖아.”
“실력주의 가문이잖습니까?”
“오호.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단 거군.”
나는 자칭 칼자크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얼굴을 뜯어봤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도 비슷하고, 이목구비의 위치도 맞다.
과도할 정도로 젊은 게 의아하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걸 물었다.
“그 팔은 뭡니까?”
나는 자칭 칼자크의 오른팔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산맥에서 봤던 칼자크는 외팔이였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와 전투에서 팔 한쪽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거? 큭큭…….”
칼자크는 내 말에 당황하긴커녕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루안. 네 덕분이야.”
“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칼자크는 상황을 설명했다.
나와 아르잔을 먼저 보낸 이후 동굴의 붕괴는 점점 가속화됐고.
때마침 떨어진 낙석이 제사장과의 사이를 갈랐단다.
칼자크도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 뻗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니 사방이 암석에 가로막혀 있었다고.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중간부턴 배가 고파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더라. 그래서 먹었지.”
“뭘요.”
“보석수.”
나는 두 눈을 깜박인 다음 물었다.
“사파이어 스네이크를 먹었다고요?”
“응.”
“…그거 먹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닌 것 같던데? 이빨 다 나갈 뻔했다. 그래도 어쩌겠냐. 살려면 먹어야지.”
아무튼 그렇게 보석수의 시체를 먹으면서 연명하다가, 자신의 육체에 변화가 생기는 걸 깨달았고.
마침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핵까지 먹은 순간…….
“엄청난 추위를 느껴서 이제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는데, 눈을 뜨니 이렇게 됐더라.”
“아하…….”
“원래 내가 좀 동안이긴 했는데 20살은 어려진 데다가, 이것 보시라.”
칼자크가 오른손을 흔들며 보였다.
“잘린 오른팔까지 돋아났지 뭐야?”
나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말만 들으면 칼자크는 흔히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경험한 것이었는데…….
그 정도로 드높은 경지에 도달한 건 아닌 듯하고.
보석수의 고기, 핵을 섭취하면서 육체가 재구성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팔이 새로 생긴 것도 말이 아예 안 되지는 않는다.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산증인이 눈앞에 버젓이 있으니 대놓고 부정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 핸섬한 얼굴 때문에 아무도 내가 나라는 걸 안 믿게 됐단 거지. 입구에선 아예 날 미친놈 취급했다니까? 솔직히 실망스러웠어. 어떻게 내 과거를 기억하는 놈이 한 놈도-.”
칼자크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나?
원래 말이 좀 많아 보이기는 했는데, 지금은 귀가 아플 지경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며칠간 구금 아닌 구금을 당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날 아는 녀석이 있었으면 몰라, 델락은 물론이고 대사범 녀석들까지 싹 다 자리를 비웠더라고.”
“수련회가 있었거든요.”
“그래. 타이밍 참 지랄맞더라. 어쨌든 본가에서 며칠 붙잡혀 있다가 겨우 풀려난 다음 숲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 새끼들이 정보 공유도 제대로 안 했는지 다시 잡혀 버렸어.”
“그래서 이 신세가 된 거고?”
칼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도 배드니커의 기사 놈들이니 내가 깽판을 칠 수도 없었고……. 답답해서 뒈질 뻔했다.”
일의 진상을 깨달은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됐다.
고작 이런 이유로 칼자크가 캠프에 합류하지 못한 거였다니?
사소한 일이 몇 가지 겹쳐서 일이 그따위로 전개된 것이었다.
‘일이 꼬이려니 진짜…….’
회귀 전에 칼자크만 있었어도 전체적인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나는 내심 속이 쓰렸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아무튼 지금의 나는 전성기 이상의 힘을 갖게 됐다, 루안. 사파이어 스네이크는 너 없으면 못 잡는 거였어. 그놈의 부산물을 내가 독차지한 셈이니, 네겐 평생 동안 갚아야 할 빚이 생긴 셈이지.”
칼자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론 내가 너의 뒷배가 되어 주마. 누구 괴롭히는 새끼 있으면 말해라. 다 쥐어패 줄 테니까.”
“오호.”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좋아요. 그럼 저랑 같이 목숨 좀 걸어 주시죠.”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리고 나는 칼자크에게 내가 알아낸 것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칼자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마왕 강림 의식이란 단어에선 해괴하게 바뀌었다.
“…배드니커의 땅에서, 마왕 강림 의식?”
“뭘 그렇게 놀라요? 아사드 님한테 다 들은 거 아니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칼자크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아사드 님은 그냥 수련회가 시작했으니 빨리 가서 합류하라고만 했어. 그래서 난 대사범 노릇을 하러 가는 줄 알았지.”
“…음.”
칼자크에게도 전부 말하지는 않았구나.
‘하긴.’
마왕 강림 의식이 일어나는 걸 알고 있었다면 칼자크 성격상 여길 엎어서라도 갔을 거다.
가문 놈들에겐 칼자크조차 완전한 결백이 아니었던 걸까?
주니앙한테도 숨긴 걸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제사장이 누군지는 알고?”
“네.”
“누군데.”
“무예선생이요.”
“…….”
칼자크는 잠깐 말문이 멎은 듯했다.
“…후안 녀석이? 진짜?”
어쩐지 내 예상보다 훨씬 충격받은 모양새다.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그, 렇군.”
나는 칼자크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그래.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됐다면 당연히 나도 도와야겠지. 이제부터 어쩔 건데?”
“일단은 저랑 같이 움직입시다. 물론 칼자크는 당장 캠프에 합류하지 말고, 숲에 숨은 채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칼자크의 존재는 웬만하면 숨기고 싶다.
루크가 방심한 제사장을 기습했던 것처럼, 이번엔 그 역할을 칼자크에게 일임하고 싶은 것.
그런데 뜻밖에도 칼자크가 의견을 냈다.
“아니. 후안이 제사장이라면, 그냥 내가 캠프에 합류하는 게 나을 거다.”
“어째서요?”
“그것만으로 녀석의 행동에 변화가 생길 테니까.”
“…….”
변화라…….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딱히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칼자크는 어쩐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루안, 한 번만 믿어 줘.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이 나쁘게 전개되지는 않을 거야.”
“음…….”
칼자크는 전직 용병이다.
그리고 베테랑 용병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감을 느낄 때가 있는 것.
나도 몇 번 정도 경험이 있다.
날로 먹는 의뢰 같아 보였는데, 어쩐지 구린내가 나서 거절했더니 참가한 용병이 죄다 전멸했다거나, 그런 거.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캠프로 갑시다. 대신 저랑 만났다는 건 숨기고.”
* * *
다시 수련회 캠프로 돌아간다.
칼자크와 나란히 숲을 질주하는데, 이 사내가 갑자기 툭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뭐요.”
“너도 뭔가 있었냐?”
뭔 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니 칼자크가 말했다.
“나야 뜻밖의 기연을 얻었고, 보석수의 핵까지 먹었으니 단시간에 강해지는 게 당연한데, 너도 나 못지않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아서.”
“…….”
“아니. 진전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그때 그 애송이랑은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그때도 범상찮은 놈이었지만.”
역시 도검선생이라고 해야 할까.
안목이 남다르다.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있었죠. 저도 댁 못지않게 개같이 굴렀습니다. 도중에 가주님한테 영약도 받았고요.”
“영약?”
“이거.”
나는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영옥을 꺼내서 보여 줬다.
칼자크가 살짝 감탄했다.
“영옥이잖아. 그것도 크기를 보니 최상등품 같은데.”
“탐나요?”
“탐나긴 개뿔.”
내 농담에 칼자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핵을 먹은 탓에 난 이제 화기火氣랑은 안 친해. 너나 많이 처먹어라.”
“아하.”
“그나저나 델락 녀석… 네가 상당히 맘에 들었나 보군. 그 정도 영약이라면 달리 써먹을 구석이 많았을 텐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캠프로 복귀했다.
“같이 들어가면 어색하겠지?”
“아마도요.”
“그럼 난 주변 좀 산책하다 갈 테니까 너 먼저 가.”
“오케이. 이따 봅시다.”
나는 칼자크와 헤어진 다음 의무실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주니앙이 나를 돌아봤다.
“왔구나. 목적은 달성했어?”
“네. 든든한 조력자가 생겼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그 조력자가 누군지 드디어 말해 줄 수 있겠군.”
만나러 가는 게 칼자크란 건 주니앙에게 숨겼다.
혹시 실패할 수도 있으니.
이제는 말해 줘도 상관없어서 대답해 줬다.
“칼자크입니다.”
주니앙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도검선생?”
“네.”
“언제 본가에 돌아온 거야?”
“일주일쯤 됐을걸요?”
“그래?”
주니앙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도검선생이라면… 조력자로서 부족함이 없지. 상대가 제사장이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 승부가 될 거야.”
나는 잠깐 눈동자를 굴려 시간을 확인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서 그런지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영도 녀석들은 오전 수업을 받고 있을 거다.
아마 무예선생의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깐만.’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주니앙을 보며 말했다.
“교관님, 여기 교관들도 2인 1실을 씁니까?”
“기본적으로는 1인 1실이야. 그건 왜?”
“하나 더, 교관 동 내부엔 통신 수정이 설치된 곳이 없죠?”
주니앙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제실을 빼면 그렇지. 애초에 통신 수정은 영도를 감시하기 위한 거니까.”
“그렇군요.”
나는 주니앙을 보며 물었다.
“혹시 후안 교관의 방은 어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