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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107화 (107/172)

107화

내 말에 주니앙이 물었다.

“…설마 네가 의심하고 있던 게 무예선생이었어?”

“일단은요.”

“이미지가 너무 안 맞는데.”

주니앙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차라리 다른 대사범이면 몰라…….”

“예를 들면요?”

“…탄코 선생?”

이 여자도 사람 보는 눈은 없구만.

딱 봐도 구려 보이는 놈인데, 왜 죄다 의외다,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말을 하는지 원.

“…뭐, 좋아. 무예선생의 방은 3층 제일 끝방에서 오른쪽이야. 통신 수정은 없지만 다른 교관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다른 교관을 만나면 내 심부름 중이라고 말해.”

“네.”

“그리고 가는 김에 내 방에 가서 연초 좀 가져와 주라.”

“…….”

그럼 진짜 심부름 아닌가?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후안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가는 동안 다른 교관과 부딪치지는 않았다.

문고리도 잘 열렸다.

교관 동의 방도 영도의 방처럼 잠금장치가 없었던 것.

탁.

어렵지 않게 후안의 방에 입성한 다음, 문을 닫는다.

사실 회귀 전에 교관의 방은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주니앙과 둘이 얘기를 나눌 때 말이다.

그땐 상황이 상황이라 방 내부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일단 우리가 쓰는 방보단 살짝 더 넓은 것 같다.

그렇다고 넉넉한 편은 아니고, 딱 필요 최소한의 가구만 갖춰진 여관 느낌이랄까?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배드니커에도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 양반이 이런 곳에 단서를 흘려 놓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후안이 제사장인 걸 확신하고 있는 나라면, 뭔가 달리 보이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책상.

책상 위엔 몇 권인가 책이 쌓여 있었는데, 죄다 무학에 관한 것이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는 걸 보니 자주 읽은 듯하다.

팔락-.

한 권 집어서 훑어보니 책의 페이지는 빛이 바래 있었고 이런저런 주석이나 의견까지 달려 있었다.

후안 선생의 필체는 모르지만, 그가 직접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것도 연출일까?

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을 내려놓은 다음에 서랍을 뒤졌다.

여기도 별다른 건 없다.

필기구와 거울, 액세서리, 향수, 심지어 화장품까지…….

후안 선생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느끼하게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평소에 치장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의외라고 해야 하나.

연초도 있었다.

사 놓고 구석에 처박아 뒀는지, 담뱃잎이 좀 누리끼리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수첩 한 권을 발견했지만, 여기도 별다른 건 없다.

간혹 생각날 때마다 적었던 준비물이나 수업 내용의 정리, 심지어는 각 영도에 대한 정리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카론 우드잭.]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췄음. 수련회의 커리큘럼이 이 영도에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이미 완성됨. 경쟁할 상대가 있을 때 더 빨리 강해지는 성격인 듯한데…….]

[헥토르 배드니커.]

[평균 이상의 재능을 지녔지만, 천재냐고 묻는다면 글쎄……. 판단하기로는 근면 성실한 노력파에 가깝다. 다만 나이에 비해 뛰어난 리더십을 갖췄으므로 미래가 기대됨.]

[세렌 굿스프링.]

[기본적으로 우수하지만, 타인과 어울리는 걸 꺼리는 듯함. 혹은 배드니커의 영역이라서 자신을 숨기는 걸지도.]

영도 39명에 대한 정리가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

아. 한 명만 빼고.

[에반 헬빈.]

[잘 ■■■■ ■■■.]

에반에 대해선 딱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뭔가를 썼다 지운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혹시 궁금해져서 내 것도 찾아봤다.

[루안 배드니커.]

[소문만큼 구제 불능은 아닌 듯하지만, 수업 태도가 다소 불량. 기본적으로 매사 의욕이 없고, 최소한의 과제만 수행하는 느낌.]

[의외인 점. 사교성은 생각보다 좋은 듯.]

“음.”

내 기억으론 나름 수업에 성실하게 참가한 것 같은데… 아닌가?

어쨌든 나는 수첩을 덮고 복잡한 기분에 빠졌다.

나도 모르고 봤으면 교인이란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어떤 면에선 이상적인 교관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첩에 적힌 내용은 단순히 치밀한 위장을 위해서 썼다기엔 지나치게 자세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적어도 무예선생은 마각을 드러내기 전까진 교관이라는 업무에 성실히 임한 듯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김이 빠져 수첩을 서랍 안에 던지듯 떨어뜨렸는데.

덜컥-.

“…음?”

서랍에서 조금 미묘한 소리가 났다.

혹시 밑에… 빈 공간이 있는 건가?

나는 서랍을 조금 두드리다 내 추측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고.

서랍 바닥을 드러내서 그 아래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했다.

그곳엔 진귀한 종이가 한 장 있었다.

평범한 종이가 아니다.

“이건…….”

사진이잖아.

연금술의 성지인 [울크아]에 있다는 사진기寫眞機.

그걸 쓰면 순간의 풍경이나 인물을 종이 위에 저장할 수 있는데… 나도 용병 시절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사진이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제국의 가장 뛰어난 화가도 이만큼 현실적인 그림을 그릴 순 없을 거다.

그 때문에 사진기의 발명에 게거품을 문 예술가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진엔 두 명의 청년이 어깨동무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낀 여자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일단 한 명은 누군지 알겠다.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나랑 함께 있었던 사내, 칼자크다.

용병 시절인 걸까?

칼자크가 자신한 만큼 잘생긴 낯짝이긴 하다. 얼굴에 흉터가 좀 많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건 다소 음침한 생김새의 남자였는데,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는 한참이나 쳐다보고서야 이 남자가 후안이란 걸 깨달았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설마 칼자크 또래였나?

둘 다 대사범이 되기 전인 듯한데.

그 둘한테 사적인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후안은 귀족 출신 아니었나?’

바스케스 가문인가 뭔가 하는 곳 말이다.

그런 귀한 집 자식이 어째서 용병 시절의 칼자크와 같이 있는 걸까.

설마 용병이었나?

내 경험상, 귀족이 용병 짓을 할 만큼 떨어지려면 어지간히 시궁창 인생이어야 하는데…….

여러 의문이 느껴졌지만, 나는 생각을 접었다.

슬슬 나가 봐야 할 시간이다.

일단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방을 나섰다.

* * *

의무실에 주니앙은 없었다.

나는 책상 위에 연초를 놔둔 다음 교관 동을 나섰다.

지금 당장 영도 무리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고, 확인할 게 있기 때문.

공터에 영도들이 모여 있었고, 단상 위엔 후안이 서 있었다.

“-이제 모두 아시게 됐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론 영도가 추가한 룰은 [영도 간의 포인트 거래가 가능해진다.]였습니다.”

‘이때쯤인가.’

영도들의 점수가 게시되고, 카론의 룰 변경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발표된 시점.

그렇다면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나는 일부러 공터를 크게 둘러 가며 내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영도 동 1층에 있는 게시판을 보았다.

[1위. 카론 우드잭 43점.

2위. 제로스 실베르 31점.

3위. 신바 29점.

4위. 한스 밴더 28점.

5위. 헥토르 배드니커 25점.]

일단 상위권 점수는 내 기억이랑 같고.

그럼 내 점수는…….

[19위 루안 배드니커 17점.]

기억 속 점수보다 1점이 낮다.

등수는 16위에서 19위가 됐고 말이다.

1점 차이긴 하지만, 동 순위가 많아서 저렇게 된 모양.

와아아아아-!

그 순간 바깥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1층에 있는 창문을 통해 슬쩍 바깥을 보니 칼자크가 보였다.

“안녕. 도검선생 칼자크다. 사정이 있어서 수련회에 좀 늦게 합류하게 됐는데, 이제부터라도 잘 부탁한다.”

칼자크의 소개에 영도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도, 도검선생……!”

“뭔가… 생각보다 훨씬 젊지 않아?”

“그건 모르겠고 진짜 잘생겼다…….”

심지어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헥토르까지 조금 흥분된 것처럼 얼굴이 벌게진 게 보였다.

“선택 과목 시간이랬지? 나한테 오면 칼 쓰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마. 실전 위주라 지루하진 않을 거야.”

‘과목 선택 시간이군.’

막 합류한 칼자크에겐 자기소개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좋은 찬스였는데.

예상대로 칼자크의 앞에 영도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과연 도검선생.’

대사범 중에서 가장 유명인다우신 인기다. 젊어진 얼굴 덕도 좀 보는 듯하고.

“아니, 잠깐.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이잖아…….”

칼자크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얼추 세 봐도 20명 이상이 모인 것 같은데, 저 정도면 나머지 교관을 다 합쳐도 칼자크보다 적은 숫자다.

회귀 전에 가장 많은 영도를 확보한 건 후안이었는데…….

‘아.’

그 순간 나는 혼자 음울함을 풀풀 날리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

죽기 직전까지 미소를 지었던 무예선생.

후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칼자크를 보고 있었다.

* * *

과목 선택이 끝난 이후, 칼자크와 후안은 건물 뒤뜰에서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며 서 있었다.

“얼굴 좋네. 몰라보겠다, 야. 살은 좀 찐 것 같은데.”

“…….”

“혹시 담배 있으면 하나만 주라.”

“끊었어.”

후안은 오랜만에 반말했다.

어쩐지 입안이 껄끄러웠다.

“…네가?”

“그래. 그보다 여긴 왜 온 거지?”

“대사범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거 아냐.”

배드니커가 아무리 통이 큰 가문인들, 일 안 하는 놈한테 돈 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후안은 픽 웃으며 말했다.

“개인적 은원을 해결한답시고 몇 년 동안 자리를 비운 놈이 잘도 지껄이는군. 난 아직 납득이 안 돼. 가주님께서 왜 네 자리를 쭉 지켜 줬는지.”

“…뭐,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할 테니까 좀 봐주라. 그보다 수련회는 간만이라 기억이 좀 아리송한데, 나 한창 할 때랑 뭐 달라진 거 있냐?”

후안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의 냉소마저 지운 채 말한다.

“농담은 집어치워, 칼자크.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니잖아?”

“무슨-.”

“너, 나에 대해서 뭔가 들었지?”

칼자크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졌다.

후안은 그 사실을 깨달으며 쓰게 웃었다.

“안심해. 티 나지는 않았으니까.”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

“…누구한테,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말도 들어 봐. 듣고 나서 판단해. 다 설명할 수 있으니까.”

칼자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여기선… 다 말하기 힘들어. 시간도 없고. 그러니 오늘 자정에 만나자. 캠프 서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공터가 하나 나올 거야.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너 혼자 와.”

“…이게 진짜, 잠자코 있으니까 우습게 보이냐? 무슨 말이냐고 묻고 있잖아.”

후안은 칼자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바라 말인데, 죽었어.”

“…뭐?”

대앵-!

그 순간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후안은 말문을 잃은 칼자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해. 반드시 혼자 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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