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NEW!] [2위. 루안 배드니커. 90점.]
“씁…….”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낮은 점수는 아니었고 순위도 높았지만…… 세상천지 2위를 하고 기뻐할 놈은 드물 것이다.
까놓고 말해 내 대응이 나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철혈공의 점수를 넘었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까지 했었는데.
‘설레발은 죄악이다…….’
오늘도 셋째 사형의 명언을 떠올리는 동시에 궁금해졌다.
철혈공은 [순발력의 방]을 어떻게 클리어한 걸까?
툭툭, 허공에 뜬 화면의 [델락 배드니커]라는 이름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에 ‘C’가 없다.
이때의 철혈공은 아직 미들네임을 받기 전이라 그런 모양이다.
[델락 배드니커의 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Y / N]
“응?”
이런 기능도 있었나?
나는 반사적으로 Y를 꾹 눌렀고…….
뒤이어 작은 화면에 철혈공의 모습이 나타났다.
[…….]
지금도 소년공이라 불릴 만큼 어린 외견을 하고 있지만, 이때의 철혈공은 훨씬 더 앳된 느낌이다.
‘아버지… 맞나?’
꼭 다른 사람 같다.
그 이유가 단순히 서너 살 더 어려 보이는 외견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나는 곧 위화감의 이유가 표정이자 자세, 몸짓, 기도……. 통틀어서 분위기의 차이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이때의 철혈공에겐 왠지 모르게 비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표정하지도 않았고, 냉혹한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인상만 따지면 소심한 편이다.
꼭 겁 많은 소동물처럼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
‘미친.’
철혈공인 걸 떠나 아버지에게 품을 감상은 아니라 고개를 털었다.
어쨌든 철혈공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시련에 임했는데.
1단계부터 3단계까지의 대응은 나와 큰 차이가 없었고…….
전혀 다른 대응을 보인 건 역시 마지막 4단계였다.
쿠우우우웅……!
4단계.
천장이 뒤집히며 벌집 같은 구멍과 그 안쪽에서 무기의 모습이 보인 순간-.
[…….]
철혈공이 번개처럼 허리춤의 검을 뽑더니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칼날에서부터 휘몰아친 검풍이 그대로 천장을 박살 냈다.
“…허.”
아무리 어려도 철혈공은 철혈공인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점수 산정 방식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이 시련에 뚜렷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철혈공이 더 빨랐다.
철혈공은 천장 벽면이 뒤집힌 즉시 그곳에서 투척물이 쏟아질 걸 예상했고, 역으로 공격해 벽을 박살 냈는데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음.”
발상도, 반응 속도도 내 완패다.
철혈공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한편, 자존심이 구겨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카르텔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당시 철혈공의 나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열두 살.
‘…아무리 느슨하게 임했어도, 열두 살한테 진 건 좀.’
아니. 이 말도 핑계겠지.
짜악, 나는 손바닥으로 두 뺨을 후려쳤다. 다행히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다.
방이 두 개 더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순발력보단 힘과 속도에 훨씬 자신 있다.
내가 막 방을 나서려는데…….
[재도전하시겠습니까?]
[Y / N]
“…엉?”
문득 화면에 그런 문구가 나타났다.
* * *
시험이 시작하고 8시간이 경과했을 무렵, 절반 이상의 영도가 탑에서 퇴출당했다.
즉 아직 탑을 오르고 있는 영도 전원이 아카데미 편입을 허락받은 셈이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열심히 탑을 오르는 중이었다.
이쪽에서도 딱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탑은 학장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악취미적인 놀이터였고…….
본디 놀이터란 사용하는 이가 있어야 비로소 놀이터인 것.
학장이 저들의 퇴출을 바라지 않는 이상, 영도들은 오늘 하루 동안 계속 탑을 올라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몰란드 교수는 살짝 뜻밖의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드러난 결과가 다소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번 [수행의 탑]에 입장한 영도는 총 서른다섯 명이고.
배드니커의 수련회에서 온 영도가 열 명.
굿스프링의 증명식에서 온 영도가 스물다섯 명이다.
그리고 지금, 수련회 출신의 영도는 전원이 생존해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마나를 먹는 계단]을 넘었다는 뜻인데…….
반면, 증명식을 치른 영도들은 고작해야 여섯 명만이 1층을 넘었다.
‘이 정도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은.’
영도의 평균적인 수준은 배드니커 쪽이 월등하다.
어떤 분야건 얽혔다 하면 비교되는 두 가문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
한편, 탑을 오르는 수많은 영도를 뒤로하고 올더슨 학장의 시선은 오직 루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재 3층에 진입해 있는 유일한 영도이기도 했다.
시험이 시작하고 8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 대부분의 영도는 2층에서 막힌 형국이니까.
당연하다!
[지식의 층]에 준비된 문제는, 저명한 학자나 각 분야의 권위자들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초고난도 문제들이었으니까!
특히 마도학 같은 분야는 기초적인 지식조차 마탑이나 학회에서 엄정히 관리하고 있다.
막강한 만큼 위험한 힘이라 그렇다.
물론 루안은 배드니커의 핏줄을 이었다.
배드니커엔 가문의 수호자이자 대마법사인 아사드도 있으니, 마도학 지식을 접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겠지.
‘그렇다고 해도…….’
전혀 다른 분야의 질문까지 척척 대답하다니?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건가?
아니. 좀 다르다.
‘단순히 머리가 좀 좋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야.’
애초에 저건 정석적인 공략법이 아니다
왜 굳이 2층 방이 도서관의 형태를 하고 있었겠나?
난해한 문제를 마주했을 때 관련 서적을 찾아 단서를 손에 넣으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2층 도서관 책장을 꽉꽉 채운 건 쉽게 구하기 힘든 고서古書의 필사본이었다.
[지식의 층]이 이런 형태를 갖게 된 이유는 순전히 올더슨 학장의 고집 때문이었는데…….
요새 젊은이들이 날이 갈수록 도서관을 찾는 빈도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서, 원하는 지식을 직접 손으로 찾는 재미를 깨닫게 해주려고 특별히 준비한 것.
…물론 고작 한 문제를 풀기 위해 짧게는 한 시간, 길면 서너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체계가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아무튼……!’
그걸 저 건방진 애송이는 30분 만에 죄다 풀고, 표표히 2층을 떠났다!
…하지만 그랬던 루안 배드니커도, 의외로 3층에선 막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몰란드 교수.”
“네.”
“루안 배드니커가 3층에 얼마나 머물고 있지?”
“이제 막 3시간이 흘렀습니다.”
“흐음. 잘 풀리지 않나 보군.”
올더슨이 다시 차분해진 태도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침없이 진격할 땐 [배드니커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지경이었지만…….
역시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철혈공 정도는 아닌 듯하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인재가, 이토록 짧은 간격으로, 심지어 같은 가문에서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도 제법 잘해 줬어.’
루안 배드니커의 나이는 올해로 열여섯.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 활약을 보이다니…….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가 아닐 수 없다.
여유를 되찾은 올더슨 학장이 한층 푸근해진 미소를 지으며 다시 홍차를 들이켰다.
“…….”
반면 몰란드는 어쩐지 불안한 기색으로 루안을 보고 있었다.
3층은 다른 곳과 달리 통신 수정이 몇 개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대기실뿐이고, 따로 준비한 세 개의 방……. 그러니까 [힘]과 [속도], [순발력]의 방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단 뜻이다.
‘음…….’
3층에서 총합 150점을 얻은 자만이 4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즉 평균적으로 하나의 방에서 50점은 확보해야 한다는 뜻인데-.
쉽지는 않다.
각 방의 난이도는 3단계부터 훌쩍 뛴다.
솔직히 말하면 영도 수준에서 그 시련을 극복할 인재나 몇이나 될까 싶은데.
‘…그래도 [마나를 먹는 계단]을 신기록으로 주파한 영도인데, 이 정도까지 오래 걸리는 게 맞나?’
몰란드의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어쩐지 저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엿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축하합니다. 단련의 층을 통과하셨습니다.]
“……!”
루안 배드니커의 화면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 * *
[힘의 방: 99점.]
[속도의 방: 97점.]
[순발력의 방: 93점.]
[종합 순위.]
[NEW!] [1위. 루안 배드니커. 289점.]
[2위. 레오네. 281점.]
[3위. 델락 배드니커. 280점.]
[4위. 하이드 우드잭. 277점.]
[5위. 카엘라 골단. 265점.]
“…….”
종합 1위의 자리를 따냈지만.
성취감 이전에 여러 의문이 들었다.
첫째로. 의외로 철혈공이 종합 1위가 아니었다.
철혈공은 순발력의 방에선 1위를 거머쥐었지만, 힘과 속도의 방에선 2위와 3위에 그쳤다.
그리고 힘의 방, 속도의 방에서 1위를 차지했던 게 직전까지 종합 순위 1위였던 레오네라는 녀석이다.
‘누구야?’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나머지 이름은 그래도 눈에 익었다.
철혈공은 말할 것도 없고, 카론의 아버지이자 대륙 최강의 레인저인 하이드 우드잭도 유명인이다.
게다가 카엘라 골단.
전에 지나가듯 얘기했던 케이안의 수양딸이자 현 용병왕이다.
하이드와 카엘라가 아카데미에 다닌 것도 놀랍지만…….
가장 뜻밖인 건 역시 레오네라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었는데, 철혈공보다 더 높은 순위에 있었다니.
‘가명일지도 모르겠구만.’
궁금해져서 철혈공처럼 기록을 열람했는데, 새까만 머리카락에 빨간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당연히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레오네는 모든 시련에 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임했는데, 확실히 육체 능력이 범상치는 않았다.
‘그래 봤자 내 밑이지만.’
어쨌든 이걸로 3층도 끝이다.
4층으로 가기 위한 점수는 150점이었고.
나는 거의 그 두 배나 되는 점수를 얻었다. 기준을 넉넉히 넘었으니, 이제 4층으로 갈 수 있을 터.
주변에 딱히 계단은 안 보이니, 아마 이대로 기다리면 앞서 봤던 것처럼 주변 풍경이 저절로 변하지 않을까.
…….
…….
…….
그런데 어째 주변이 바뀔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뭔 일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뜬 순간…….
[크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신 수정인가?
[-아. 들리는가, 루안 영도?]
올더슨 학장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별건 아닐세. 우선… 관제실에서 귀 영도의 활약은 아주 잘 보았다네. 정말 대단…….]
쓸데없는 치하의 말은 한 귀로 흘린다.
칭찬이나 하자고 말을 건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래서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네만, 루안 영도. 유감이지만 지금 상태로는 4층으로 갈 수 없을 걸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다음 층인 ‘대련의 층’엔 최소 도전 인원수가 존재한다네. 최소 두 명은 갖춰져야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는 뜻인데-.]
나는 학장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 말씀은…….”
[자네는 다른 영도가 오기 전까진 4층으로 갈 수 없단 말이지.]
엿 같은 구조구만.
급조한 설정은 아닐 테지만, 어쩐지 좀 삐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대련의 층이라면, 뭐 여기까지 올라온 영도끼리 일대일로 붙는 형식입니까?”
그렇다면 최소 인원수가 두 명인 것도 납득 간다.
싸울 상대가 없다면 평가도 못 할 테니.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네만, 그것과는 좀 다르네.]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저 혼자 도전해도 별 상관없습니다만.”
[그건 안 될 말이네, 어린 영도여. 그 어떤 때라도 규칙은 준수해야 하는 법.]
학장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닫는다.
다른 건 모르지만, 이 노인은 내가 탑을 더 올라가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3층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냥 내려가는 것도 아쉽겠지……. 루안 영도, 자네가 이 탑에서 보인 활약은 대단했네.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상을 줌세.]
올더슨 학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자네 지금 많이 지쳤지 않은가? 오늘 저녁엔 편입생 환영회가 있을 예정이네.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숙수와 빼어난 악단까지 초청했지. 파티용으로 옷도 갈아입어야 할 테니, 오늘은 이만 내려가는 게 어떠한가?]
그 말에 가슴속의 무언가가 꿈틀하는 게 느껴졌다.
바로 내 안의 반골 정신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학장님, 최소 인원수가 두 명이라고 하셨죠?”
[그러하네.]
“그럼 누가 됐건 한 명만 더 올라오면, 그 녀석이랑 같이 4층에 도전할 수 있겠네요?”
[…그렇긴 하지만, 영도들이 2층을 통과하는 건 쉽지 않을 걸세. 만약 통과한다고 해도 3층에서 자네처럼 150점 이상을 획득해야 하고, 거기까지 성공한다고 해도 그 영도가 자네처럼 4층의 도전을 희망할 확률은-.]
“좋습니다.”
나는 조금 무례하게 학장의 말을 잘랐다.
솔직히 말하면 1층과 2층은 물론, 3층에 있는 시련도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녀석들의 낯짝이 몇몇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 한 명.
딱히 근거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가장 빠르게 3층에 다다를 것 같은 녀석이 떠올랐다.
물론 순전히 감이긴 하다.
[…누굴 기다리는 것인가?]
내 태연한 모습에 살짝 불안해졌는지 올더슨이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감고 운공을 시작했다.
햇볕이 내리쬐지 않는 곳이라 효율은 좋지 않지만, 달리 할 것도 없으니 간만에 느긋하게.
그리고 염화제일공의 구결에 따라 소주천을 한 번 완료했을 때쯤.
파앗-!
대기실 중앙에 빛무리와 함께 인영이 드러났다.
막 3층에 입장한 영도인 모양이다.
나는 빛무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윽고 드러난 모습에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