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플레이어의 궤적 (1)
대한민국의 플레이어 ‘광림(光臨)’ 허용 연령은 17세다.
그러나 이계 충돌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 플레이어의 이능에 관해 법적인 나이 제한은 없었다.
광림은 물리 법칙, 고정 관념, 개념을 무시하는 것으로, 미숙한 정신과 신체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미성년자의 광림으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많았다.
광림 규제 관련 법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입법자들은 플레이어를 규제하는 법 제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 약 30년 전.
지금은 폐교가 된 강원도 서구초등학교.
그곳에서 어느 초등학생의 광림의 폭주에 세 학급이 휘말렸다.
여론이 들끓었고 광림 대책을 세우지 않은 정부와 국회에 질타가 쏟아졌다.
그 결과 제정된 것이 청소년 광림 제한법.
일명 ‘서구초법’.
이 법은 17세 미만의 플레이어의 광림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17세 미만의 플레이어는 이능이 발현되는 즉시 플레이어 협회에서 개발한 ‘광림 봉인술’의 인장을 몸에 심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지금.
1월 1일.
이 세계의 나는 17세가 되어 광림 사용이 가능해졌다.
‘봉인술의 인장이 사라졌어.’
왼쪽 손목에 새겨져 있던 엄지손톱만 한 붉은 반점은 1월 1일이 되는 순간 사라졌다.
광림 봉인술의 인장이 사라진 순간 광림이 무엇인지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적이 빛이 되어 신체에 강림한다]
‘게임 속 텍스트에서 백호군이 한 광림의 묘사 그대로야······!’
무엇이 광림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광림을 사용하는 법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광림을 사용하자 각양각색의 빛을 머금은 수백, 수천 장의 카드가 내 몸에서 흘러나왔다.
카드들을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카드에 새겨져 있는 것은 내가 게임 속에서 10년 간 키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었다.
스토리나 퀘스트 진행 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선택하는 장면.
그 장면에서 나오는 캐릭터 카드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게임의 간판이었던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
그런 주요 인물보다 인기가 더 많기도 했던 조연들.
스토리에 한두 번 등장하고 죽은 엑스트라급 캐릭터.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조작한 백호군까지.
카드들을 훑어보다 메뉴를 열어 광림의 상세 설명을 확인해 봤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의 상세를 열람합니다.〉
[플레이어의 궤적]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와 그 과정, 꿈의 기록을 재현한다.
광림의 상세 설명대로 단순히 캐릭터 육성이 완료된 마지막 버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캐릭터에도 그 캐릭터의 성장 순간들, 그 과정이 카드별로 기록되어 있었다.
백호군의 캐릭터 카드만 해도 그 종류가 수십 장이었다.
그리고······.
‘유상희의 카드네······.’
복수의 여신과 계약하여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마수 학살자가 되었던 모습이다.
‘여기에 남아 있는 건 내가 플레이했던 기록이구나.’
유상희가 복수귀가 되는 미래는 사라졌으니까.
그러니 여기에 있는 대(對)마수 최종 병기 유상희의 카드는 이 세계에서는 다른 차원의 가능성이자 기록에 불과했다.
한 장, 한 장.
캐릭터 카드들을 시선에 담을 때마다 여러 감정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이 카드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고, 저기에 있는 카드는 군대에 있을 때, 이거는 취업 준비하고 있을 때······.’
플레이 시간 약 10년.
기쁜 순간, 힘든 순간을 전부 함께한 플레이어 캐릭터들이다.
내 캐릭터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도 힘내야겠다고 위로받곤 했었다.
내가 플레이한 모든 기록, 궤적.
그것들이 카드가 되어 눈앞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멈춰 서서 그 카드들을 바라봤다.
엔딩에서 이 게임의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죽는다.
당연히 이 캐릭터 카드들에 있는 인물들은 전부 죽었던 캐릭터들이다.
‘죽은 캐릭터들도 잠재 능력 한계까지 끝까지 키웠지만.’
중간에 죽어 버린 캐릭터에게도 미련을 가지고 프리 배틀이나 프리 퀘스트를 이용해 키우곤 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캐릭터가 사실 살아 있었다.’라는 뻔한 전개도 기대했으니까.
스토리상 죽은 캐릭터들도 스토리 모드에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캐릭터 육성 자체는 가능했다.
플마고의 폐인이었던 나는 한 캐릭터도 버리지 않고 전부 육성해 냈다.
‘이번엔 해피엔딩을 보자.’
내 결심에 캐릭터 카드들이 응하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럼 써 볼까!’
첫 카드를 고른다면 당연히 내 주력 캐릭터 백호군.
백호군의 카드 중 백호군에게 걸린 ‘천신의 진노’의 제약이 풀린 최종장 버전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카드를 사용하기 전.
카드 밑에 적혀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용 가능 시간 3초]
“3초로 뭘 하라고!”
지나치게 강한 카드는 사용 시간이 짧았다.
* * *
1월 1일, 0시 19분.
나는 집을 나섰다.
칼바람이 몸을 썰어 버릴 기세로 불고 있었다.
‘얼어 죽겠다.’
활동성을 고려해 조금 얇게 입었더니 얼음을 파헤치며 걷는 기분이다.
당장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쓸 만한 광림을 얻는 순간 바로 실행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만약의 경우엔 황호나 홍규빈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생각했었지. 귀찮지 않게 돼서 다행이다.’
‘플레이어의 궤적’은 기대 이상의 패, 기대 이상의 피스였다.
그렇다면 이제 피스를 움직여 다음 수를 둬야 할 때다.
‘자진해서 직접 지옥으로 뛰어드는 꼴이네.’
에너미와 마주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오싹하다.
화면 밖에서 스마트폰을 터치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면 뒤에 있던 게임 폐인인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아―.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자 밤하늘에 시뿌연 수증기가 흩어져 눈앞이 흐려졌다.
딩동.
웨어러블 디바이스에서 알람음이 들렸다.
장남욱과 유상훈과 나, 셋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의 메시지 알람음이다.
광림하는 동안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장남욱] 의신아, 상훈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나는 다른 고등학교로 가지만 자주 연락하고 만나서 놀자. 올해 잘 부탁한다.
[유상훈] 새해복ㅇ
[장남욱] 상훈아, 문자 입력이 귀찮으면 음성 입력으로 해. 아니면 차라리 스탬프만 찍어.
[유상훈] ㅇ
[장남욱] ······됐다. 알았다. 오늘 추우니까 감기 조심해.
[유상훈] ㅇ
발걸음을 멈추고 메시지 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 새해복ㅇ
메시지를 전송하고 괜히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 메시지를 본 장남욱이 또 잔소리를 해대고 유상훈은 ‘ㅋ’하나를 찍어 반응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별거 아닌 대화 로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공기가 따뜻해진 것 같았다.
나는 디바이스의 알림, GPS를 전부 OFF로 전환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내가 선택한 카드의 캐릭터는 올해 은광고 3학년이 되는 선도부 소속 플레이어블 캐릭터, ‘암중섬광(暗中閃光) 오혜지’이었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월하의 위태천(韋駄天)’을 사용합니다.〉
월하의 위태천은 야간, 그것도 달이 보이는 경우에 한정해 도약력과 이동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광림이었다.
게임 내에서는 쓰레기 광림, 타 캐릭터에 비해 밸런스가 망한 광림이라고 까였었다.
그 대신 조건이 갖춰졌을 때 이동 기능만을 고려하면 월하의 위태천은 몹시 효율적이었다.
‘효율적인 캐릭터 카드를 써서 힘도, 시간도 아껴야 해.’
마침 하늘에는 슈퍼문이 떠 있었다.
내 몸은 순식간에 밤하늘로 녹아들었다.
* * *
신년 맞이 파티가 열리고 있는 여의도의 한 컨벤션 센터.
밤하늘과 한강을 배경으로 경관 조명이 더해져 건물에 입체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부의 홀은 한 층에 약 500평.
파티에 참가 중인 이들은 약 1000여 명, 경비 인원은 100명 이상이었다.
컨벤션 센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곳곳에 배치된 경비원들이 3인 1조로 움직이고 이어링을 통해 10분 간격으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경비 태세가 단단해. 잠입은 어려울 거다.’
잠입에 유용한 캐릭터가 있지만 연비가 너무 나쁘다.
그 캐릭터 카드를 사용하면 탈출할 때 기력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수를 준비했지.’
나는 정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초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발을 멈췄다.
나는 턱시도를 입었긴 했지만 척 봐도 고등학생 애송이다.
그런데도 경호원은 예의를 갖춰 정중히 제지했다.
‘이곳에 높으신 분들의 아드님, 따님이 꽤나 오셨나 보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들어 올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초대장?”
“네, 현재 입장 제한이······.”
“잠깐!”
옆에 서 있던 다른 경호원이 이 얼굴을 아는 듯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이 학생, 이분은 그 유명한······!”
그는 당장 사인이라도 해 달라는 기세였다.
“그 유명한 ‘홍염의 제왕 염방열’ 님의 아드님, ‘소홍룡(少紅龍) 염준열’ 님이시잖아!”
나를 알아봐 준 경호원을 향해 씨익 웃어 줬다.
지금 내 얼굴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였던 소홍룡 염준열의 것이었다.
이계 공략 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붉은 사자.
그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 홍염의 제왕 염방열의 외동아들인 염준열.
올해 은광고 2학년이 되는 염준열은 화려한 광림과 귀공자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아버지의 후광까지 더해지니 염준열은 이계 공략을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스타 플레이어의 반열에 올랐다.
‘플레이어의 궤적’은 그 염준열의 외견까지 완벽히 재현해 냈다.
‘염준열은 플레이어SAT-K가 붙인 이명 소홍룡(少紅龍)의 소(少)자를 아주 싫어했었어.’
소(少)라는 단어는 염준열의 역린이다.
앞에서 소홍룡이라고 부른다는 건 염준열에게 싸움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선 짜증을 내 줘야 할 거다.
나는 게임에서 본 염준열의 까칠한 표정을 흉내 내었다.
“소홍룡?”
“······아! 죄, 죄송합니다. 홍룡 님! TV에서 본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십니다!”
그건 그렇겠지.
염준열의 나이는 현재 18세다.
그러나 지금 내가 광림으로 선택한 모습은 19세였다.
정확히 말하면 염준열이 스토리상 19세의 나이로 죽은 이후에도 캐릭터 육성을 계속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계속 뻔뻔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내 얼굴을 보고도 초대장을 확인한다고?”
희미하게 띤 살기에 경호원이 당황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홍룡 님! 플레이어 등록증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증이라도······ 유명인으로 변장하는 플레이어도 많아서요.”
〈대상 캐릭터의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허공으로 뻗어 염준열의 힘을 구현화한 불의 용을 소환해 보였다.
파아아!
용의 머리가 손끝에서 열린 이공간의 틈 사이로 보였다.
비슷한 광림은 존재하나 완전히 동일한 광림은 존재하지 않고, 광림의 카피는 불가능하다.
홍룡의 존재는 지금 내가 염준열이라는 증거가 될 거다.
“이걸 다른 놈이 흉내 낼 수 있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경호원이 이어링을 한 손으로 누르며 위에 보고했다.
“······네, 정문입니다. 홍룡 염준열 님이 방문하셔서······ 아, 혼자 오셨습니다······ 네, 네······.”
소홍룡 염준열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심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염준열은 너무나도 탐나는 연줄의 발판이다.
끊어 내기 어려울 거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연줄로 잡아 보고 싶을 거야.’
염준열 혼자라면 만약의 경우에 제압도 가능하다.
오히려 인질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설 거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이 행사’에 참여한다면 그 사실이 염준열의 약점이 되니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리라.
나는 주최자가 염준열을 통과시켜 주리라 확신했다.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예상대로 그들은 길을 비켜 줬다.
* * *
소홍룡 염준열의 이름을 빌린 탓인지 연회 매니저가 직접 나를 회장까지 안내해 줬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도착한 연회장은 복층 구조였다.
복층 여기저기 턱시도, 드레스를 입은 파티객이 보였다.
불을 환히 밝힌 샹들리에와 창을 가린 금색의 벨벳 커튼 탓에 눈이 아팠다.
‘드레스 코드는 베가스 골드였나······.’
곳곳에 베가스 골드 색의 드레스, 머리 장식, 커프스 버튼, 행커치프 따위가 보였다.
‘돈지랄 열심히 해댔네.’
지상 컨벤션 홀보다 대관료가 몇 배는 비싼 에어 호텔을 대관하여 하늘에서 새해를 맞이한 S급, A급 셀러브리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한 이들도 이 사회의 승리자 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최자가 이 컨벤션 홀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본 파티에서는 경비원이 사용하는 경호용 인트라넷 기기 외의 모든 종류의 기록 기기의 사용과 통신 이용이 제한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연회 매니저는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언급하고 내게 금박 상자에 담긴 순은 동전을 내밀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연회 매니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사라졌다.
나는 은으로 된 동전을 내려다보았다.
〈아이템 정보를 열람합니다.〉
[아이템명] 침묵 맹세의 순은 동전 복제판
[형식] 소모품
[희귀도] SR+++
[효과] 침묵 맹세에 사용한다.
[설명]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이 사용했다는 순은 동전의 복제판.
앞면에는 시델렌티움의 인장이, 뒷면에는 까마귀가 새겨져 있다.
이 아이템을 사용한 침묵 맹세를 했다면, 해당 정보는 언어를 비롯한 어떠한 형식으로도 전달이 불가능하다.
이 침묵 맹세는 희귀도 SSR이상의 저주해제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혀를 영구적으로 제거하지 않는 한 파기할 수 없다.
전설계 웅족의 진웅팔선(眞熊八仙) 중 하나, 비탄의 웅녀에 의해 제작되었다.
예상대로 이 파티에는 내가 찾던 그 웅족, 진웅팔선의 비탄의 웅녀가 개입해 있었다.
‘여기서 못 찾아냈으면 고생 좀 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다.
비탄의 웅녀에 관해선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가 목표한 장소로 향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