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0화 (30/925)

9. 비가 그치고 (2)

은광고 학교 부지 근처에 위치한 황호의 미학을 담아낸 대저택은 은광구의 명물 중 하나였다.

은광고보다 더 강력한 결계로 엮은 황금색의 담장.

자칫 길을 잃을 만한 규모의 미로 정원.

그 중심에 있는 5층 대저택이 황명재단 이사장 황명호의 사택이었다.

“어서와, 백호. 적호.”

그 대저택에 호족 셋이 모였다.

상석에 앉은 황호가 두 친우를 환영하며 입을 열었다.

“셋이 모인 건 30년? 50년 만인가? 왜 둘이 동시에 나를 찾아온 거지?”

“황호, 그건······.”

“잠깐. 내가 맞춰 볼게.”

황호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광구 정화 건은 적호의 사후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사건은 이미 종결된 상태다.

무슨 용무로 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왜 왔는지는 짐작이 갔다.

“조의신이 부탁한 거지?”

부정하는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놀랍군.’

은광고에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된 17세의 고교생, 조의신.

조의신은 황호가 파악한 것만으로 벌써 다섯 명이나 구해 냈다.

입학시험 당시 장남욱, 유상훈, 손민기.

입학 첫날 이레나.

그리고 오늘 새벽 맹효돈까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더 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10대 청소년의 모습을 한 황호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황호의 미소를 본 적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호가 눈을 빛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존재를 파악해 낸 정보력, 진족을 상대하는 담력, 미지수인 광림과 스킬 그리고 17세라고 생각할 수 없는 통찰력. 모든 면에서 조의신은 우수하지. 너희들이 주목할 만해.”

황호의 시선이 적호를 지나 백호에 이르렀다.

“하하하! 대놓고 인간을 비호하는 적호는 그렇다 쳐도 백호까지 끌어낼 정도라니. 이렇게 유쾌한 기분이 든 건 15년 만이야.”

15년 전 독대를 청하던 어느 맹랑한 학생회장을 떠올리며 황호가 크게 웃었다.

“그래서 조의신이 무엇을 부탁했지?”

“12지 동맹 회담을 열고자 합니다. 황호.”

적호의 제안에 황호가 눈을 반짝였다.

“그 녀석들을 모으는 건 쉽지 않은데······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긴 시간을 살며 소중한 이들은 죽거나 잠들었다.

그나마 남은 친우들의 눈은 변해 버렸다.

그 죽은 눈을 본 후 모든 의욕을 잃고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쫓던 황호였다.

‘조의신이 이 둘을 바꾸고, 움직일 줄이야.’

지금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두 친우는 이전과 달랐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아득하고 먼 옛날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전사의 눈을 하고 있었다.

“백호, 적호. 둘 다 그만 나돌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앞으로 이 이사장 사택을 거점으로 할 것. 이게 내 조건이다.”

두 호족은 별 불만 없이 응했다.

“알았다.”

“알겠습니다, 황호.”

백호와 적호도 조의신의 행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으니 이리 쉽게 수락한 거겠지.

황호는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특히 백호. 너의 이름과 자리는 은광고에 만들어 뒀다. 각오가 되었으면 와라.”

“이름?”

“호적도 이미 만들어 놨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이름은 ‘백호군’이라고 한다. 한때 호족의 우두머리의 형제였던 너를 위해 군(君)을 붙여 줬지.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에서는 왕의 형제에게 그 단어가 들어간 작호가 내려졌다 하더군.”

황호는 눈을 반짝이며 아주 작은 악의를 담아 웃었다.

“‘백호군 군’이라고 부르는 게 웃기기도 할 거고. 넌 진명을 분실하고 웃은 적이 없잖아. 가짜 이름에라도 웃길 여지를 남겨야지.”

백호는 서리 같은 눈으로 황호를 바라봤다.

황호의 말에도 백호는 딱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겠다.”

백호의 말을 마지막으로 세 호족의 짧은 좌담이 끝났다.

*    *    *

“창천명궁 함근형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홍 팀장님.”

홍규빈과 함근형이 인사를 나눴다.

‘둘은 구면인가 보네.’

이명이 정해진 이후에도 홍규빈과 가끔 연락하고 있었다.

홍규빈이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날리고 내가 세 번에 한 번 정도 대답하는 수준이지만.

“홍규빈 팀장님,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로 학교까지 오셨어요?”

플레이어 협회 관계자가 왜 학교에 와 있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굳이 물었다.

협회의 목표는 ‘에너미의 토벌’과 ‘플레이어의 보호’였고 이번 일에는 두 개가 동시에 걸려 있다.

협회가 나서야 하는 안건이었다.

“하하하, 무슨 일이긴. 당연히 ‘일’ 때문이지.”

홍규빈은 평소대로 능글능글했다.

그러나 잘 보니 그의 눈가엔 진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안구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홍규빈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혹시 못 주무셨어요?”

“그래, 못 잤지. 환몽 게이트 때문에 올해 내내 야근이었는데 금요일 밤······ 아니, 토요일 새벽에 긴급 소집령이 내려와서 팀장급은 전원 밤샘해야 했어.”

그 와중에도 홍규빈의 머리는 잘 세팅되어 있었고, 코트와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평소대로 꿈 하나 없이 꿀잠, 숙면을 취한 나보다 더 빠릿빠릿한 차림새다.

“플레이어SAT-K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고 협회에 비상이 걸렸지. 어제 은광고 주변에서 창천명궁 님이 토벌한 에너미에 위성이 전혀 경보를 보내지 않았으니까.”

홍규빈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숨도 안 쉬고 말했다.

“환몽 게이트 건으로 잘린 협회 직원 중에 위성 신호를 교란시킨 정신병자가 있었어. 참고로 그 정신병자는 지금 무너진 건물 속에서 중상을 입고 알몸으로 발견되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완벽한 불구가 됐지.”

아마 그 정신병자는 내가 작살낸 변태들 중 하나일 거다.

내 행적이 그 병자의 몸과 마음의 밸런스를 조정해 준 것 같다.

정신만 맛이 간 게 아니라 몸도 불구가 되도록 말이다.

“창천명궁 님이 전부 토벌해 주지 않았더라면 위성 관리팀 대리급 이상은 다 사직서 써야 했을 거야. 그래도 시말서는 써야겠지만. 하하하하!”

오늘의 홍규빈은 조금 무서웠다.

몸과 마음이 병든 자가 지을 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함근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 어깨를 잡아당겨 나와 홍규빈을 좀 떨어뜨려 놓았다.

홍규빈의 폭주, 머신 건을 쏴대는 듯한 독백은 계속되었다.

“접근 가능한 기록 기기를 전부 확인해 봤는데, 플레이어 하나가 무너지는 건물에서 에너미에 쫓겨 은광고로 탈출한 게 확인됐는데 그 건물주가 은광고 교사인 최편득이던데. 또 탈출한 플레이어가 은광고 1학년 0반 맹효돈 학생이던데.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지? 의신이도 1학년 0반이잖아. 효돈이는 여태까지 등교도 잘했고, 학교생활도 잘했다고 말해 줄래?”

웅족의 권속인 에너미들.

환몽 게이트에 연루된 협회 직원.

플레이어 위성 신호 교란.

은광고 교사 최편득 소유의 건물.

그 건물 속에서 발견된 영구 제명 플레이어들.

우수한 수상 실적을 가진 은광고 학생 맹효돈의 탈출.

이 정도의 단서라면 맹효돈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플레이어 협회에선 파악해 냈을 거다.

‘홍규빈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홍규빈은 현실 도피를 시도하며 헛된 희망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함근형이 그의 희망을 박살 냈다.

“맹효돈 이제 첫 등교했습니다. 오늘도 바쁘시겠네요.”

함근형의 이 말을 해석하면, ‘너의 추리는 옳다. 넌 오늘도 야근이다’가 되겠다.

“하하하하, 주말 내내 야근 확정이군요.”

함근형의 말을 제대로 해석해 낸 홍규빈이 빛을 잃은 눈에 절망을 담아서 웃었다.

“최편득 건은 재단 홍보팀과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맹효돈 건 협조 부탁드립니다. 맹효돈의 담임, 창천명궁 님.”

이 말이 ‘살려 주세요’로 들리는 건 나만이 아닐 거다.

“맹효돈은 지금 정밀 검사 중입니다. 제가 대신 얘기하죠. 일단 들어갑시다.”

“네, 부탁드립니다. 윤 대리님, 정 사원님. 최편득 건부터 자료 받으러 가세요. 재단 홍보팀은 15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라 합니다. 저는 나중에 합류하죠.”

홍규빈이 학교 방문 허가증을 목에 걸고 있는 두 명의 남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팀장님.”

“넵, 팀장님!”

윤 대리로 추정되는 인물은 곧바로 몸을 돌려 은휘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젊어 보이는 남자 쪽, 정 사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진지한 얼굴로 나와 함근형을 노려봤다.

‘뭐지······?’

정 사원은 갑자기 나와 함근형이 있는 쪽으로 척척 걸어오더니 홀로그램을 전개했다.

함근형이 바람같이 움직여 내 앞을 막아섰다.

‘왜 여기로 오지?’

정 사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입을 열었다.

“창천명궁 님 사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무명의 초신성 님하고 사진도 같이 찍고 싶은데, 그리고 두 분 디바이스 코드 좀.”

지금 뭐라는 거야.

함근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평소보다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 대리가 급 U턴을 해 돌아와 정 사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가자.”

“악, 대리님. 놔 주세요! 잠깐만,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창천명궁 님, 무명의 초신성 님! 대리님, 아, 진짜!”

윤 대리가 지나치게 쾌활한 정 사원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 자유로워 보이는 두 사람은 어쩐지 홍규빈의 부하 직원다웠다.

“······정 사원이 은광고 플레이어 광팬이라 좀. 무시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홍규빈이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웃었다.

*    *    *

중앙 구역의 중앙 대강당 상인관(上寅館)에 위치한 응접실.

상인관에서는 외부 공연도 가끔 열렸기 때문에 VIP 전용 대기실 겸 응접실이 존재했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나.’

현재 응접실에 있는 건 나, 함근형, 홍규빈, 이 셋이었다.

내가 끼어 있는 건 부자연스러웠지만 함근형, 홍규빈 둘 다 내 동석을 허락했다.

“흔한 케이스네요. 플레이어 자녀를 노예처럼 부리는 부모는 매년 나옵니다. 이계 충돌 이후 복권 긁는 기분으로 자식 낳는 사람들이 늘었죠. 파이트 클럽에 팔아먹기까지 하는 쓰레기는 드물지만요.”

함근형이 맹효돈이 처한 상황을 간략히 전하자 홍규빈이 신랄하게 말했다.

“바로 그쪽 아버지와 연을 끊고 빚 문제를 해결할 변호 인단을 준비하겠습니다. 언론에도 맹효돈 학생 이름이 흐르지 않도록 막죠. 대신 연막용으로 창천명궁 님 쪽에 인터뷰가 크게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 인터뷰는 황명재단 홍보팀과 준비하겠습니다.”

함근형과 홍규빈은 앞으로의 대책을 죽 논의했다.

결론만 요약하면 맹효돈 건은 앞으로 이렇게 전개될 예정이다.

아들을 노예로 팔아먹은 빚쟁이 백수

VS

플레이어 협회와 황명재단 합동 변호 인단

질 구석이 없다.

저 상황이 게임으로 나오면 난이도가 너무 낮아서 망겜 취급받을 거다.

맹효돈 건은 문제없이 해결될 것 같다.

“맹효돈 학생과 면담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어렵죠? 안정되는 대로 직접 만나고 싶네요.”

“네. 맹효돈과는 저를 통해 연락해 주십시오. 홍 팀장님.”

“하하하, 창천명궁 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홍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최편득 씨의 퇴폐 업소를 무너뜨린 인물.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기록 기기에는 제대로 남지 않았던데요.”

“글쎄요.”

함근형은 성의 없이 답변했다.

홍규빈은 함근형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다 씨익 웃었다.

“뭐 플레이어 중엔 얼굴을 숨기고 자경단을 하는 괴짜가 한둘이 아니지만요. 적벽괴도처럼.”

그놈의 적벽괴도.

왜 또 거기서 그 쪽팔린 칭호가 나오는 걸까.

환몽 게이트와 연관되어 있으니 당연히 나올 법하긴 했지만.

홍규빈은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 아니, 진족의 후예 김신록이었다.

‘무슨 수를 썼기에 그새 여기에 바로 엮인 걸까.’

김신록이 있으면 편하긴 하지만.

실제 당사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교사같네.’

지금의 김신록에겐 학용품을 늘어놓고 보였던 비인간적인 음산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사람 좋은 교사가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신록 씨. 오랜만이네요.”

“홍 팀장님. 안녕하세요, 들어가시는 길인가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홍규빈과 김신록도 구면이었는지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자리를 뜨기 전에 홍규빈이 한마디 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무명의 초신성.”

홍규빈은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일개 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으니 어쩔 수 없다.

‘······억지를 쓰자면 1학년 0반의 부반장으로서 동석했다고 우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 홍규빈도 이상했다.

‘팀장급이 계속 현장을 뛰는 것도 이상한데. 플레이어 협회에는 특별한 업무 철학이라도 있는 건가.’

사소한 위화감이지만 뭔가가 더 걸렸다.

제갈재걸과 달리 함근형과 김신록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질 않았다.

홍규빈은 함근형과 김신록을 부를 때에는 뒤에 ‘씨’를 붙이거나 플레이어 이명을 사용했다.

제대로 존칭과 존댓말을 쓰니 문제는 전혀 없긴 했지만.

“학생부장 선생님. 부탁하셨던 자료는 디바이스로 보냈습니다. 효돈이 검사 결과도요. 아직 받아야 할 검사가 몇 개 더 남긴 했는데······ 양호실로 가면서 얘기할까요?”

“네. 조의신, 가자.”

얘기를 들어 보니 김신록은 ‘우연히’ 양호실로 향하던 맹효돈과 함근형을 발견해 이번 일을 전해 듣고 협력하게 되었다 한다.

‘끼어들 타이밍을 잡으려고 함근형을 미행했겠지.’

맹효돈은 곧 기숙사에 입소할 예정이다.

그러니 지익회 고문인 김신록이 이번 일에 개입하는 건 딱히 이상할 일이 없었고 잘된 일이긴 했다.

“효돈이가 검사실 밖에 나와 있네요. CT스캔과 MRI검사도 끝난 것 같군요.”

앞서 걷던 김신록이 양호실 문을 열며 말했다.

나와 함근형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양호실인가.’

갑부재단이 세운 대한민국 최고의 플레이어 특목고의 중앙 구역 양호실다웠다.

아주 돈을 처바르다 못해 돈을 녹여서 만든 듯한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갖추고 있는 장비들 수준으로만 따지면 예전에 장남욱과 유상훈과 갔었던 황명재단의 종합 병원 못지않았다.

‘그러니 병원을 안 가고 양호실에서 정밀 검사를 하는 거구나.’

맹효돈은 그 번쩍이는 양호실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함근형의 옷을 빌린 건지 많이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맹효돈.”

검사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맹효돈이 슥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보자 그가 입을 떡 벌렸다.

“너, 너. 무사했냐? 부반장 조의신!”

내 진짜 얼굴은 학생증을 통해 보여 줬으니 바로 알아봤을 거다.

파바박!

와, 슬리퍼를 신고도 저렇게 뛸 수가 있나.

맹효돈은 검사대 위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내 앞으로 왔다.

쌩쌩한 걸 보니 정말 조금도 다치지 않았나 보다.

“나는 죽는 줄 알았다고, 부반장 새끼야!”

“안 다쳤으면 됐지. 밥은 먹었어?”

“검사받을 게 남아서 아직 금식해야 해.”

“그래? 나는 먹고 왔는데.”

“이 새끼가.”

내 농담을 받아치는 맹효돈의 입은 험했지만 울상과 웃상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반이라도 웃을 여유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맹효돈의 정수리 따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맹효돈에게 해야 할 말 중 가장 중요한 말을 건넸다.

“야, 내가 너 구했다는 건 비밀로 해.”

“왜?”

적벽괴도가 나라는 게 들키면 쪽팔리니까.

“하여튼 모르는 척해. 나 거기 다 박살 내고 왔으니까. 괜히 엮이면 귀찮아져.”

“······그래.”

맹효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나는 맹효돈과 별거 없는 수다를 떨었다.

잠은 잘 잤냐, 오늘 저녁밥은 뭐 먹고 싶냐, 기숙사에는 언제 정식으로 들어올 거냐.

그런 하찮은 얘기였다.

잡담하는 우리 둘을 함근형과 김신록이 어쩐지 그리움과 흐뭇함이 담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적벽괴도라는 단어를 처음 본 순간, 손발과 시공간이 오그라들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선행을 숨기려고 하는 것도 비슷하군.”

함근형은 대체 뭔 소릴 하는 걸까.

무명의 초신성이 힘을 숨기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디까지나 적벽괴도라는 쪽팔린 칭호 때문이었다.

“네. 의신이는 훌륭한 학생입니다.”

김신록도 잠깐 인간답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진족의 후예는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괜히 나대면 적벽괴도 얘기가 나올지도 몰라.’

나는 닥치고 있기로 했다.

그날 저녁 밥은 나와 맹효돈, 함근형과 김신록 넷이 기숙사 식당에서 먹었다.

황명재단 법무팀, 홍보팀에서 맹효돈 외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외식은 어려웠다.

‘밖에서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맹효돈은 기숙사 밥에 매우 만족한 것 같았다.

“야, 부반장······ 여기 기숙사 밥 원래 이렇게 맛있냐······?”

맹효돈은 그릇 가득 음식을 퍼 와서 먹다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행복해하는 얼굴로 저녁밥을 먹었다.

체할까 봐 말을 걸어 천천히 먹게 해야 할 정도였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네.’

기숙사 식당은 뷔페식으로 운영되니 정확한 양은 모르겠지만 맹효돈은 적어도 5인분 이상은 먹은 것 같다.

참 잘 먹는 그 덕분에 나도 맛있게 먹었다.

여태까지 먹은 기숙사 밥 중 오늘 게 제일 맛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일요일.

이번 사건이 기사로 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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