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청명, 하늘이 차츰 맑아지다 (4)
때는 2월, 환몽 게이트로 시끄러웠을 시기.
한국 5대 이계 공략 팀이자 세계 10대 이계 공략 팀 중 하나인 붉은 사자의 본거지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종로1가의 초고층 팀 빌딩의 최상층.
팀 마스터 홍염의 제왕 염방열의 집무실에서 소홍룡 염준열이 염방열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올해도 은광고에 남을 예정입니다.”
염준열은 올해부터 1년간 유학을 하기로 결심했었다.
그 결심을 바꾼 계기가 된 건 올해 1월 1일에 터진 환몽 게이트의 ‘적벽괴도’다.
“준열아, 정말 유학은 그만둘 생각이니?”
“네, 아버지. 3월 한 달. 미국과 중국, 각각 2주씩 플레이어 양성소 견학만 하고 올게요.”
“나야 준열이 네가 한국에 있으면 좋긴 하지만······.”
염준열은 홀로그램을 전개하며 말했다.
“올해나 내년에 열린다는 한중일 청소년 플레이어 교류전에도 흥미가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그램은 아주 낮은 해상도와 화질의 ‘불의 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국에 남아서 적벽괴도를 찾고 싶어요.”
염준열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불의 벽이 하나로 합쳐져 하늘로 승천하였다
그는 이미 수백 번은 본 그 영상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동일한 광림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데, 왜 이게 홍룡으로 보이는 걸까.
발화 속도, 유지력, 규모, 제어력······.
적벽괴도의 기술은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신기로 보였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 이상향을 정확하게 구현한 것 같았다.
“홍룡을 가진 저라면 알아요. 이건 저와 매우 비슷한, 그럴 리는 없지만 동일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능력입니다······ 그리고 적벽괴도는 저보다 훨씬 강해요.”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동경에 염방열은 몹시 당황하였다.
용족의 후예와 결혼했을 때, 자식을 갖는 걸 포기했었다.
그러다 기적처럼 얻은 귀한 외아들 염준열은 언제나 염방열에게 최고의 자랑이고 보물이었다.
자신이나 용족 외의 누군가를 동경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적벽괴도의 강함은 인정했지만, 이건 아버지 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다.
“그, 그러니까. 너보다 강한 아이는 없다! 이 적벽괴도는······ 한 내 나이 정도는 된 베테랑일 거다!”
“네. 그럴 수도 있겠죠.”
염준열은 차분한 얼굴로 염방열의 말을 흘려 넘겼다.
‘적벽괴도를 찾고 싶어.’
염준열은 방학 기간 내내 철저하게 적벽괴도를 조사했다.
작은 증언과 단서 하나하나 모두 파고들었다.
“걸리는 게 두 가지 있었어요. 첫째, 은광고 신입생인 이레나의 증언. 부모가 강제로 끌고 온 그 아이는 침묵맹세가 걸린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어요. 하지만 적벽괴도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어요. 마치 감싸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벽괴도가 정말 자신과 같은 외모와 능력을 가졌다면 선배인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이레나가 입을 다물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염준열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둘째, 복구된 문서에서 발견된 의문의 단어. 붉은 사자 측에서 독자적으로 입수한 자료 중 복구에 성공한 건 극히 일부분이었죠. 거기에 특이한 단어가 있던 거 기억나세요?”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구나.”
“사월세음. 암호이거나 더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학교에 입학 예정인 그것도 이레나와 같은 반 학생의 이름이었어요. 저는 학생회 소속이라 신입생 명부를 확인할 수 있었죠. 게다가 그 학생은 작년에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었더군요. 어느 사이엔가 단순 가출 사건으로 종결되어 있었지만.”
염준열은 자신의 추리에 결론을 맺었다.
“두 사람 다 은광고, 그것도 1학년 0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게 우연일까요?”
역시 똑똑하고 잘생기고 이능도 빼어나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향상심이 넘치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내 아들!
크으, 내 아들이 이렇게 잘났다!
염방열은 감탄사를 뱉을 뻔했으나 터질 것 같은 아들 부심을 누르고 애써 엄격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적벽괴도는 환몽 경매를 단독으로 부수었다. 독자적인 정보 루트와 위험한 능력을 갖고 있어. 엮이면 안 된다! 허락 못 한다! 차라리 유학을 가! 그 대신 한국에 자주 오고, 연락도 매일 하고, 경호원 따돌리고 어디 놀러가지 말고!”
아들 바보 염방열의 입에선 엄격한 말은 1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늘 아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전 은광고에 남아서 적벽괴도를 찾을래요.”
“준열아아······.”
적벽괴도는 자신과 몹시 비슷한 이능을 가졌으나 훨씬 강했다.
반드시 그와 만나고 싶었다.
염준열은 염방열이 계속 뭐라 하는 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환몽 게이트 조사 결과 리포트를 다시 읽어 내렸다.
“준열이는 걱정 마. 염방열.”
“용제건 님!”
황호와의 교원 계약으로 스스로의 힘을 묶고, 은광고의 교사가 된 괴짜 용족, 용제건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자유인. 아니, 자유 용족 용제건은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훌쩍 나타나곤 했다.
“내가 은광고에 있는 한 준열이에게 화가 미칠 일은 없어.”
“부탁드립니다, 용제건 님!”
용제건은 황홀해하는 얼굴로 창밖의 야경을 주시했다.
“올해 은광고 생활이 정말 기대돼. 무명의 초신성에 준열이. 거기에 적벽괴도까지 있으면 더더욱 즐거워질 거야.”
저 유희계 용족은 본인이 즐거운 일에는 눈이 뒤집히는 괴짜였다.
용제건의 저 표정을 본 염방열은 몹시 찝찝한 기분이 되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 * *
은광고 2학년, 학생회 소속의 스타 플레이어 용족의 후예 소홍룡 염준열.
그가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듯 이쪽을 향해 척척 걸어왔다.
염준열이 걷는 순간 등굣길이 런웨이가 되고, 은광고 교복이 모델이 걸친 최고급 의상이 된 것 같았다.
“준열이, 단기 유학 일찍 끝내고 왔대! 원래 2학년 내내 유학 예정이었는데. 대박.”
“앞으로 홍룡이랑 같이 학교 다니는 거야? 진짜로?”
“진짜 준열이 오빠 완전 잘생겼다······ 실물이 더 쩔어······.”
“준열이 우리랑 동갑이다.”
“잘생기면 다 오빠야. 난 양심 같은 거 없어!”
그의 등교 소식을 듣고 1, 2, 3학년 가릴 거 없이 몰려왔나 보다.
켕기는 게 있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염준열은 지금 유학 중이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있지?
설마?
‘설마,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적벽괴도가 걸렸나?
그렇게 긴장하고 있을 때.
염준열은 사월세음 앞에 멈춰 섰다.
“나랑 얘기 좀 해 줘. 세음아.”
염준열이 볼일이 있는 건 사월세음이었나 보다.
허무해졌다.
‘게임 속에서 염준열과 사월세음은 접점이 없는데.’
염준열이 사망하는 건 주수혁이 2학년이 된 시점이다.
사월세음이 구출되는 건 주수혁이 3학년이 된 시점이니 둘은 게임에서 만난 적이 없다.
“뭐야, 할 말 있으면 같이 듣는다.”
맹효돈이 사월세음을 자기 뒤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중학생 시절, 빼어난 싸움 실력과 수상 이력으로 선배에게도 시비가 털리던 맹효돈이라 경계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그 선배 놀이 하던 것들을 다 역관광시켜 버리고, 맹효돈 최강 전설을 만들었지만.
그의 당당한 모습에 염준열의 눈에 조금 이채가 서렸다.
“저기, 괜찮아. 효돈아.”
둘의 짧은 대치 상태를 끝낸 건 사월세음이었다.
사월세음은 염준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도 염준열 선배님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 조례 전까지 시간 좀 내줘.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염준열이 한가득 모인 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학년 건물 입구 근처, 바람을 타고 온 벚꽃 잎을 배경으로 염준열이 팬들에게 웃어 주니 이 공간이 화보 촬영장이 되었다.
“세음이랑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자리 좀 비켜 줘.”
꺄아아아아!
주파수가 대기권을 돌파할 기세다.
높은 음역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준열이가 여길 봤어. 내가 봤어, 봤다고······!”
“네. 당장 비킬게요.”
“넵. 얘들아 가자!”
“준열이가 이렇게 말했는데 안 꺼지는 것들은 뒤질 줄 알아.”
“뒤져도 좋으니까 남아도 됨?”
“체육관으로 따라와.”
“오늘 일기 쓰고 잔다. 두 번 쓴다.”
염준열의 한마디에 팬들이 해산했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행동력 넘치는 팬들에 의해 끌려갔다.
팬들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염준열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여기에선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좋겠다.
“맹효돈, 가자. 사월세음, 수업에 늦지 않게 와라.”
“잠깐, 부반장······.”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염준열에게도 대충 인사를 하고 맹효돈을 1학년 건물 안으로 끌고 갔다.
맹효돈은 마지못해 끌려오긴 했지만 아직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척 봐도 사월세음은 비리비리해 보이고, 염준열은 키도 크고 강자의 기운이 흘러넘치니 걱정하는 건 당연하긴 했다.
“정말 괜찮냐, 부반장.”
“그래. 염준열 선배님 좋은 사람이야. 유명인이라 행동 잘못하면 바로 기사 떠서 함부로 뭐 하지도 못해.”
“유명인이었냐?”
홀로그램을 띄워 염준열의 프로필과 이름이 뜬 기사를 보여 줬다.
맹효돈은 염준열이 정말로 누군지 몰랐는지 흥미진진해 하는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
특히 염준열의 이계 공략, 에너미 토벌 활약상이 편집된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스킬, ‘운명력’이 발동하였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하나 더 터졌다.
맹효돈이 자신의 디바이스로 화면을 전개해 몰두해 있는 사이 자리를 뜨기로 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어.”
맹효돈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예고 좀 하고 터져라. 플레이어의 궤적을 써야 하나······!’
그때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한산한 교실 복도에서 아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벚꽃 잎이 있었다.
보통 벚꽃 잎보다 훨씬 붉은 벚꽃 잎 하나가 하늘거리며 내 눈앞에서 흔들렸다.
‘따라오라는 뜻인가 보네.’
벚꽃 잎을 따라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벚꽃 잎은 바람 한 점 없는 복도에서 유유히 허공을 떠다니며 움직였다.
내 눈에만 보이는지 가끔 마주치는 학생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1학년 건물 2층 복도 끝, 전통 문화 학습실이었다.
‘다행히 사용 빈도가 낮은 교실인 데다 조례를 앞둔 시간이라 아무도 없네.’
동양화들이 한지로 마감된 벽에 걸려 있었고, 벽 근처에는 수십 개의 마네킹이 명주, 옥양목, 갑사, 항라, 국사 천 등으로 된 각종 한복을 입고 있었다.
저편에는 서민복, 제례복부터 구군복에 관복, 곤룡포도 보였고 열려 있는 자개장 사이로 용과 호랑이가 양각된 필묵함이 보이기도 했다.
‘별로 쓰지도 않는 교실에 이렇게까지 투자를 하다니.’
붉은 벚꽃 잎은 미닫이 격자 창문에 달라붙었다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격자 창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이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건가?’
그 창문 밑에는 사월세음과 염준열이 있었다.
주변이 조용한 탓에 둘의 목소리는 여기까지 들려왔다.
“정말로 염준열 선배님은 적벽괴도 님이 아니셨군요.”
“······그래. 나도 적벽괴도를 찾고 있어.”
순식간에 손발과 시공간이 오그라들었다.
잊고 싶었던 그 부끄러운 칭호를 둘이 연호해대고 있었다.
‘이걸 들려주려고 운명력이 발동된 건가!’
염준열은 적벽괴도를 찾기 위해 조사를 했나 보다.
붉은 사자의 정보력이라면 사월세음의 이름을 경매 목록에서 찾아냈을 거고, 사라진 사월세음을 적벽괴도가 구해 냈다고 추측해 냈을 거다.
‘왜 염준열은 적벽괴도를 찾고 있는 거지.’
사칭죄를 묻고 싶은 건가.
“염준열 선배님은 왜 적벽괴도 님을 찾는 거죠?”
사월세음이 나를 대신해서 물어 줬다.
“적벽괴도가 내 스승이 되어 줬으면 해.”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승이요······? 제가 알기로 염준열 선배님의 스승님은 아버지인 홍염의 제왕 염방열 님과 용족 중 한 분이라고 들었는데요.”
“적벽괴도가 정말 내 모습을 하고 있었나 보구나. 나에 대해 조사한 걸 보면.”
사월세음이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듯 얼굴색을 흐리며 입을 가렸다.
괜찮다, 어차피 염준열 흉내 내고 다닌 걸 다 들킨 거 같으니까.
“상관없어. 만약 내가 그 환몽 경매를 알고 있었다면 나도 그랬을 거야. 아버지와 용족들이 말려서 직접 가긴 어려웠겠지만.”
염준열은 좋은 놈이었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아버지도 용족들도 나를 너무 아끼셔서 제대로 된 훈련이 안 돼. 난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염준열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스타 플레이어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은 외모도 혈통도 이능도 아닌 그 강렬한 향상심이었다.
“적벽괴도는 강해. 단독으로 환몽 경매에 쳐들어가는 담력도 사전에 치밀하게 깔아 둔 잠복 불씨도 잠복 불씨를 발화시키는 타이밍과 속도도 그 불의 벽을 유지하는 능력도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제어력도······ 나로서는 흉내 낼 수 없어.”
“네! 정말 그분은 강하고 멋지셨어요! 그분이 없었다면 전 학교에 오지 못했을 거예요. 꼭 찾아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적벽괴도는 강한 것뿐 아니라 인망도 갖추고 있구나.”
순간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는 것 같았다.
오그라들었다.
그만해라, 내 정신력은 이미 0이다!
두 사람의 적벽괴도 찬양극은 한참 이어졌다.
운명력은 내 정신과 손발을 마르고 닳게 하려고 여기에 불러낸 것인가.
다행히 점점 조례 시간에 가까워져 두 사람은 내 정신력을 깎는 대화를 마무리하고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게. 적벽괴도를 찾았을 때도 괜찮으면 연락 부탁해.”
“적벽괴도 님이 괜찮다고 하신다면······ 염준열 선배님이 적벽괴도 님이 누구신지 아시게 되면······.”
“그래. 꼭 물어볼게.”
“네······!”
안 된다, 안 괜찮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면서 살아야겠다.
‘나를 스승으로 두고 싶다고?’
염준열이 강해진다면 든든해지긴 할 거다.
사망이 예정된 캐릭터들이 강해져서 대비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
‘염준열이 한국에 돌아온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걸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다음 달, 그러니까 5월 초.
주수혁에게 큰 위기가 닥칠 예정이다.
나 혼자만의 힘으론 막기 어려운 규모였다.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네 자리에 달하고 훗날 주오 그룹과 TC 그룹 반목의 계기가 될 대사건이다.
대처하기 위한 수는 여러 가지 생각해 봤지만, 염준열의 힘을 빌린다면 아주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흑막의 눈을 속이기도 쉬울 거고.
‘생각해 봐야겠다.’
그 대신 염준열 앞에 적벽괴도를 드러내야 할 텐데.
정말 아주 많이 고민해야겠다.
* * *
1학년 0반 교실.
나보다 먼저 사월세음이 도착해 있었다.
맹효돈이 옆에 붙어서 뭐 험한 일 안 당했나 확인하고 있었다.
불고기 싸대기 사건도 그렇고 맹효돈한테 은근히 보모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와, 염준열 선배 실물은 처음 봤어. 소문대로 잘생기셨더라.”
“······응, 그렇네.”
“레나한테 말 걸 때 놀랐는데. 무슨 얘기했어?”
“아니, 그냥 염준열 선배님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인 것 같더라.”
“그래?”
염준열은 이레나하고도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사교력 만렙인 김유리는 배려심을 발휘해 이레나를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본 건가. 염준열의 모습으론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이레나, 감이 좋네.’
“염준열 선배가 잘생겼는지 모르겠는데.”
“응?”
한이가 예고도 없이 폭탄을 던졌다.
“우리 반 남자애들이랑 별 차이 없잖아.”
한이는 어디까지나 무표정이었다.
교실에 있던 나를 포함한 남학생들, 맹효돈, 사월세음, 황지호가 입을 떡 벌리고 한이를 바라봤다.
우리가 염준열급이라고? 뭐?
‘염준열 팬한테 공개 처형당할 소리잖아.’
그 이후로 악의라곤 전혀 없는 칭찬 릴레이가 이어졌다.
황지호는 빵 터지려는 걸 참고 그저 고맙다고 말했고, 사월세음, 특히 맹효돈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 괜찮아 보인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 말을 들은 맹효돈이 나를 품평하듯 바라봤다.
“부반장이 뭐 생각하고 있을 때 완전 수상해 보이는데.”
“하하하, 하하하하하!”
맹효돈의 말에 황지호는 참지 못하고 크게 터져서 기절할 기세로 웃으며 굴러다녔다.
결국 교실 분위기는 개난장판이 되었고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 등신스러움이 유지되었다.
[우리 함께 선거해요. 여러분의 깨끗한 한 표, 민주주의의 꽃―]
수업종은 총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구장창 흘러나오는, 선거 관리 위원회에서 만든 선거 독려 캠페인송이었다.
합창부에서 쓸데없이 재능을 발휘하여 혼성 합창으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음색이 잘 어우러지도록 편곡까지 해 선거송이 아니라 찬송가처럼 들렸다.
‘아, 곧 총선이지.’
나는 총선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은광구를 지역구로 당선될 예정인 무소속인 그 후보는 올해 당선되는 국회의원 중에선 최연소 국회의원이 될 거다.
그는 은광고를 졸업한 대선배이자 플레이어블 캐릭터이기도 했다.
‘우린 아직 선거권도 없는데, 다들 시기 맞춰서 특집으로 수업종 준비하는 걸 좋아하나 보네.’
곧 수업종이 멎고 함근형이 조례를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왔다.
함근형이 교실로 들어오니 혼란스러운 교실 분위기가 즉각 수습되었다.
“좋은 아침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 반도 드디어 일곱 명이나 등교했다.”
일곱 명이나.
아직 출석률 50%도 안 넘었는데.
조금 슬프게 들린다.
함근형의 머리 위쪽에 놓인 급훈 판넬 ‘정시 등교’가 유난히 번쩍거리는 것 같다.
“이계 공략의 기본은 팀플레이다. 우리 반도 팀플레이를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계 공략의 파티원은 최소 다섯 이상이 권장된다.
우리 반은 그간 넷밖에 없었지만 단기간에 셋이나 등교하며 일곱 명이 되었다.
근거리 공격 타입인 맹효돈, 김유리, 한이.
원거리 공격 타입인 이레나, 사월세음.
만능 타입인 나와 황지호.
마침 밸런스 좋게 클래스메이트가 모였다.
“오전 공통 수업,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1 . 이계 공략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팀플레이 연습을 실시한다. 1교시 시작 전까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제5체육관으로 모일 것. 조례는 이상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