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4분기 학생대표회의 (3)
‘처음부터 이상했어.’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홍보실 언론 1팀 팀장, 은광고 관련 사건을 전부 담당하고 있는 홍규빈.
그는 은광고에 사건이 터지면, 황명재단 병원과 은광고에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었다.
‘왜 게임 속 홍규빈은 비중이 적었을까.’
게임 속 은광고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다.
또 본 듯한 얼굴이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극 초반에 등장했다가 ‘어떤 이유로’ 사라진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또 위화감을 느낀 건······ 홍규빈이 사용하는 호칭이야.’
이 세계에 온 첫날.
홍규빈은 제갈재걸에게 자신의 직위와 풀 네임을 대며 자기소개를 하고 계속 제갈 선생님을 연호해댔다.
그와 달리 최편득의 생일빵 사건이 지나고 비가 갠 날.
홍규빈은 함근형과 김신록에게 별 소개 없이 인사를 마친 후 ‘씨’라는 호칭을 붙여 대화했다.
‘함근형과 김신록도 좋은 교사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그런데 왜? 호칭을 구분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선생님.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교사나 강사, 교수 같은 직함을 쓰듯이 그 단어를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단어에 의미를 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 희미한 위화감의 단서가 된 건 중간고사 기간 때 맹효돈이 한 말이었다.
[중학교 때 선생 같은 새끼가 하나도 없었다. 그 학교에 있는 유일한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수학밖에 없었어.]
맹효돈은 중학교 때 ‘선생님’이라고 칭할만한 존재는 한 명뿐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홍규빈도 비슷한 게 있는 게 아닐까.
제갈재걸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의문은 본인에게 물어보면 해결되겠지.’
은광고 정문.
오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쉬고 있다가 뛰쳐나왔는지 가벼운 차림의 홍규빈이 보였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은광고 정문을 통과해 학교 안에 있는 내 앞까지 왔다.
“홍규빈 팀장님은 학교 방문 허가증 없어도 은광고 출입이 가능하시군요.”
윤 대리나 정 사원은 학교 방문 허가증을 목에 걸고 있었지만, 홍규빈에겐 없었다.
그때는 입고 있는 코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홍규빈은 은광고 보호 결계 시스템에 등록된 인물인 듯하다.
학생이나 교직원처럼.
‘은광고 상시 출입 허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아. 홍규빈은 주요 인물인 게 분명해. 게임 속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현장을 뛰지 않게 됐거나 은광고에 오지 않게 됐거나 플레이어 협회를 그만뒀던 거야.’
그렇다면 그 게임 속 어떤 사건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한정시켜야 한다.
‘개학 전이나 3, 4월에 일어난 사건일 거야.’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이 부분은 홍규빈과 대화를 나눠 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신아, 오랜만이네.”
“설마 학교까지 오실 줄 몰랐어요.”
제갈재걸과 관련된 일로 상담하고 싶다는 말에 바로 은광고까지 달려올 줄은 몰랐다.
홍규빈은 평소대로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표정이 딱딱했다.
“그 선생님께 위기가 온 거지?”
자세한 얘기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지.
홍규빈에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학교에서 할 얘기가 아니지? 따라와. 내 차에서 이야기하자.”
홍규빈을 따라 이동한 교문 밖.
‘이 시간에 학교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다.’
학교 정문 근처에 주차된 홍규빈의 차 쪽으로 이동했다.
유려한 라인을 그리는 동체, 이계 금속으로 만든 파츠가 눈에 띄었다.
‘플레이어카네.’
홍규빈의 차는 대한민국 4대 그룹 중 하나인 남궁 그룹의 주력 계열사, NK자동차의 플레이어카였다.
플레이어의 이능을 감당하는 내구성.
거기에 미려한 디자인과 강력한 엔진 출력에 제동 능력을 갖춰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드림카인 플레이어카.
차 기종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해서 시세는 모르겠지만 작은 집 하나가 굴러다니는 꼴이라는 건 알겠다.
“······왜 나한테 연락했는지 물어봐도 되니?”
홍규빈은 운전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홍규빈은 내 쪽을 보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 홍규빈이 굉장히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 거다.
“홍규빈 팀장님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교사는 제갈재걸 선생님밖에 없잖아요. 플레이어 협회에 제갈재걸 선생님 건으로 조용히 도움을 청하려면 홍규빈 팀장님께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어요.”
홍규빈이 뭐라고 대답할까.
여기서 틀리면 대충 얼버무려야지.
“······날카롭구나. 다른 교사 분들 앞에서는 주의했었는데 실수했네.”
정답이구나.
내 추리는 맞았던 것 같다.
“그래. 나는 제갈재걸 선생님께 갚아야 할 은혜가 있어. 은혜를 갚을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싫은 건지 엄청 냉정하게 구셔. 아예 아는 척도 안 할 때도 있어.”
제갈재걸이 병원에서 홍규빈한테 친 철벽은 그거 때문이었나.
‘은혜 갚을 생각 말고 네 길 가라.’라는 의미를 담아서 그런 걸까.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늘 같다.
“오기가 생겨서 매일매일 메시지도 날리고, 만날 때마다 자기소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면서 명함도 내밀고, 제갈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들이댔지만. 하하하하!”
그냥 제갈재걸은 홍규빈이 꼴 보기 싫어서 철벽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도 엄청 들이대더만.
“제갈 선생님 정색하는 얼굴은 볼 때마다 신선해. 하하하! 저번에 이능 상실 학생 건으로 찾아뵈었을 땐 대놓고 ‘누구십니까?’라고 하더라. 하하하하! 하하하······ 아, 왜 웃음이 안 나오지.”
홍규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지 능글능글한 표정이 조금 어둡게 가라앉았다.
미안하다, 홍규빈.
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편이다.
하여튼 그딴 거보다 홍규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왜 제 메시지를 보고 제갈재걸 선생님이 위험에 처했다고 바로 생각하신 거죠?”
“나에게는 ‘예지’ 스킬이 있어.”
예지 스킬이라고.
그 희귀한 스킬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레벨에 따라선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할 텐데.
“레벨이 1에서 오를 생각을 안 해서 쓸모는 없어. 그냥 예감 같은 거야. 별거 없는데 귀찮게 구는 진족한테 찍혀서 가호가 걸리는 바람에 정밀도가 상승한 거 같지만.”
홍규빈은 ‘귀찮게 구는 진족’을 언급할 때 표정이 썩었다.
아마 제갈재걸도 홍규빈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할 텐데.
홍규빈은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를 아는지 모르겠다.
“올해 내내 제갈 선생님이 위험해 보였어. 그래서 은광고 사건은 다 내가 맡았는데······ 별로 도움은 안 된 것 같네.”
홍규빈은 지친 얼굴로 앞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은광고 정문을 바라봤다.
그의 잦은 야근은 내가 폭로한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본인이 자진해서 일을 맡았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제갈 선생님에게 일어날 사건엔 의신이 네가 관련될 거라는 걸 알았어. 플레이어SAT-K가 보낸 네 영상을 본 순간 예지 스킬이 발동했으니까.”
나를 상대로 예지 스킬이 발동해?
처음 보자마자 들이대고 자주 메시지를 보낸 건 그거 때문이었냐.
홍규빈은 늘 은광고 소식을 궁금해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하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홍규빈은 첫인상대로 능글맞은 계략가인 것 같다.
그는 예전부터 계속 이 순간을 준비해 왔나 보다.
“제갈재걸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 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도 말해 주고.”
나도 홍규빈을 이용할 거니까 괜찮나.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 홍규빈은 은사를 위해.
상부상조.
좋은 게 좋은 거다.
“네. 대신 조건이 몇 개 있어요.”
“정보 입수 루트는 묻지 말아 달라, 정체를 숨기고 싶다, 이런 내용의 부탁이지?”
홍규빈이 내가 부탁할 사항을 정확히 짚어 냈다.
“나는 감이 좋은 편이야. 협회 소속 플레이어니까 다른 플레이어들과 ‘이런 일’을 할 때도 많고. 걱정하지 마.”
제갈재걸과 홍규빈.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이 어떻게 사제지간이 되고 어쩌다 은혜를 갚네 마네 하는 사이가 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제자는 똑똑하게 잘 키워 낸 거 같은데.’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홍규빈은 바로 협회로 가 준비를 하기로 했다.
야근 확정.
힘내라, 홍규빈.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에게 물었다.
“만약 제갈재걸 선생님이 교사를 할 수 없을 만큼 다치시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긴.”
홍규빈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협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치료법을 찾아야지.”
게임 속에서 초반에 얼굴만 잠깐 비추고 안 나온 이유는 제갈재걸이 퇴장했기 때문인 건가.
수수께끼가 하나 풀리고 기나긴 1/4분기 학생 대표 회의 날이 끝났다.
* * *
아침.
1학년 0반.
오늘도 등교한 인원수는 일곱.
조례를 앞두고 애들이 각각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거 어제 엄마랑 쇼핑 가서 사 왔어! 어때?”
“와, 어디서 샀어?”
“예쁘다.”
“나 또 사고 싶은 거 있는데, 셋이서 같이 갈래?”
“응, 가자!”
김유리가 새로 산 머리 장신구를 보여 주며 말했다.
나비를 이미지한 비즈 머리핀이었다.
은광구에서 새로 오픈한 수제 액세서리 전문점에서 샀다고 한다.
얘기를 들어 보니 우리 반 여자애 셋이 오늘 수업 끝나고 함께 가 볼 예정인 것 같다.
“오늘 아침 특식으로 나온 백설기 맛있더라. 그냥 흰떡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어, 저는 그냥 바바루아 먹었는데요. 생크림 올라간 게 맛있어 보여서······.”
“넌 왜 맨날 양식만 먹냐. 달토끼떡도 먹어 봐라.”
기숙사생 맹효돈과 사월세음.
이쪽은 기숙사 식당 맛 감평 중이었다.
맹효돈은 맨날 먹는 얘기만 하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은 아닐 거다.
아직 달토끼떡 후려치기가 끝나지 않아 매일 특식으로 달토끼떡이 나오는 중인데, 사월세음이 아까운 짓을 했다.
‘평화롭다.’
그 평화를 깨려 하는 놈이 있었다.
“조의신, 진짜 나 할 거 없냐? 응?”
황지호는 다른 애들이 듣기 전에 좀 닥쳤으면 좋겠다.
이번 일은 홍규빈이 도와주기로 해서 황지호는 필요 없다.
“심심하면 올무랑 놀아 주든가.”
“······걔는 나랑 안 놀려고 하던데.”
뭐.
우리 올무가 참 똑똑하구나.
벌써 사람······ 아니, 진족을 가릴 줄 안다.
“사실 학교 업무랑 그룹 일이 바빠서 분신 여러 개 굴리느라 좀 바쁘긴 해. 동시에 움직이니 부하가 좀 심하군.”
황지호도 만능은 아니구나.
분신을 한 번에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나 보다.
‘그럼 애초에 도와주기 힘든 거 같은데······ 그럴 거면 왜 말을 꺼낸 거야.’
귀찮게 느끼는 일이나 마주치기 곤란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방어 기제 ‘도피’.
시험공부할 때 괜히 방 청소를 시작하는 짓을 황지호가 하려 했다.
진족에게도 방어 기제가 발동하는구나.
“하······ 태만의 결과물이 이렇게 쓰구나. 놀고 싶다.”
황지호는 지금까지 내팽개쳐 둔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나 보다.
자업자득이다. 일해라, 이사장.
조례를 앞두고 수업종이 울려 징징거리던 황지호가 드디어 닥쳤다.
수업종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스파이물의 테마곡이었다.
아카펠라 소모임이 그 곡을 아카펠라 버전으로 커버했다.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구현해 낸 무반주 합창 테마곡을 감상하며 수업을 준비했다.
* * *
방과 후 신문부.
문새론이 힘없이 책상에 엎어져 있는 걸 보니 또 뭔가 실패한 모양이다.
“아, 3학년 0반 미친 거 같아, 진짜!”
“왜, 우주의 기운 어쩌고 취재한다고 하지 않았어? 중앙 구역에서 뭐 한다면서.”
“그거 개구라야.”
그냥 학생 대표 회의 땡땡이치고 싶어서 한 거짓말이었나?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우주의 기운을 독점해야 한다고 헛소문 낸 거야. 만우절에 공중 정원 띄운 것도 다 쇼야. 지들끼리 몰래 다른 구역으로 갔대.”
뭐······.
3학년 0반은 생각보다 더 쓸데없이 똑똑하게 맛이 갔나 보다.
그딴 걸 숨기려고 만우절부터 정성 들여 그 난리를 떨었나.
“중앙 구역은 더미였어. 중앙 구역에서 내가 몇 시간을 돌아다녔는데. 아악!”
“대체 어떻게 미쳐야 그런 생각을 하냐······.”
3학년 0반은 아무도 탐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을 독점하기 위해 공을 들여 정보 조작을 한 것 같다.
문새론은 멋지게 거기에 낚인 거고.
‘그럼 3학년 0반은 그날 어디서 뭘 한 걸까.’
홍규빈의 비밀을 알자마자 새로운 수수께끼가 늘었다.
이건 별로 정답이 궁금하지 않지만.
* * *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2학년 0반의 반장, 부반장.
금찬솔과 왕찬솔 콤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나] 내일 종례 시간에 해 주세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