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더비 매치 (4)
상대는 입학시험 때보다 더 희귀도가 높은 에너미다.
레벨 차도 역력하다.
하지만 레벨은 상성,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괜찮아.’
입학시험 때와 다르게 장비도 충분히 갖췄고,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고 경험도 쌓았다.
게다가 지금 나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퍼억―!
촤아악―!
쿠오오오······!
“오, 멈췄다.”
“됐다.”
“스킬이 취소됐어!”
맹효돈이 에너미의 오른팔을 노리고 보호대로 감싼 주먹으로 가격했다.
왼팔은 주수혁이 검격을 날려 스킬 모션을 중단시켰다.
어그러진 용의 형태를 한 사령종 에너미의 양팔에 각각 주먹과 쌍검 모양의 흔적이 남았다.
‘이 둘이 막아 줄 거라 믿었어.’
레벨 차도 있는 데다 상대는 물리 공격이 잘 안 먹힌다.
HP를 크게 깎을 만큼 데미지를 주는 건 어렵지만 물리적으로 스킬을 사용하지 않게 방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라면 내가 당하기 전에 막아 주리라 예상했다.
맹효돈은 그냥 본능대로 움직인 거고 주수혁은 정확히 상황을 판단한 후 행동한 결과겠지만.
“또 스킬 쓰려는 거 같은데. 시후야, 아직이야?”
“준비 끝났어, 간다!”
주수혁의 물음에 도시후가 바로 답했다.
전위를 맡던 두 사람이 그 말에 반응해 뒤로 뛰어오르자 다시 전기술이 작렬했다.
파지직―!
리플렉테네브의 HP는 앞으로 반도 안 남았다.
마침 캐스팅이 완료되어 롯드를 크게 들어 올렸다.
“의신이가 캐스팅을 끝냈어!”
전원 뒤로 물러난 걸 확인한 후, 주문을 외쳤다.
“임브렘 루미니스 (Imbrem Luminis)!”
롯드를 중심으로 빛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내 신호에 따라 빛의 비가 사령종 에너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파파팟―!
어둠 속성 에너미와 상극인 빛 속성 마법으로 공격하자 남은 HP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쿠오오······.
빛의 비 안에 갇혀 마지막 발버둥을 치던 리플렉테네브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남은 HP는 0 . 쓰러뜨렸어!”
장남욱의 목소리에 이어 디바이스에서 플레이어SAT-K가 보낸 안내문이 떴다.
―이계 외부 생성 에너미, 리플렉테네브가 토벌되었습니다.
―플레이어SAT-K가 해당 지역의 기록 기기에 성공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플레이어SAT-K가 토벌 과정의 전후 관계를 분석합니다.
―토벌 최대 공헌자: 도■■(정보 비공개 설정 플레이어: 정보 공개가 제한됩니다.), 무명의 초신성
이번 최대 공헌자는 나와 도시후인 것 같다.
각각 HP를 거의 반씩 깎았으니 이렇게 된 건가.
HP를 더 많이 깎은 건 도시후니까 우리 둘 중 하나를 MVP로 뽑자면 도시후가 되겠지만.
“조금만 더 버티자. 곧 협회나 붉은 사자 쪽에서 여기로 와 줄 거야.”
“그래······!”
내 말에 장남욱이 아까보다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귓속에선 계속 중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차례차례 토벌 완료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지금 막 올라온 건 세 번째로 나타난 이계 쪽 수비대에서 온 것 같은데요. 최대 공헌자의 이명을 보니 붉은 사자나 용족이 아닙니다. 무명의 초신성은 은광고 학생 아닙니까?]
[네, 은광고 입학시험 마수 난입 사건 때 살아남은 학생 플레이어로 알려졌죠? 오늘 경기장에 왔다가 참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운했지만 운이 좋았네요. 잠실 경기장.]
[네, 그럼 저희는 경기장 상황 계속 이곳저곳을 비추면서 플레이어 협회에서 만든 이계 발생 시 행동 강령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해설자도 캐스터도 처음 중계를 시작했을 때보다 많이 진정된 목소리였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중계와 섞여 시스템 음이 들렸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것 같다.
“또 온다. 준비해!”
우리는 다시 에너미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번 에너미는 물리 공격은 먹히는 타입이지만 물 속성이 약점이라 나와 주수혁, 맹효돈을 중심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구장 상황 중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현재 1, 3루 테이블 석에 앉은 양 팀의 차기 총수 일가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네, 뭔가를 보고받는 중인 것 같죠. 이동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의신이 반대편으로 유인하자.”
“그래!”
맹효돈이 주저 없이 에너미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발로 걷어차 내 반대편으로 날려 버렸다.
퍼억―!
저걸 유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선수석 상황입니다. 굳은 표정을 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야구 배트를 놓지 못하네요.]
[덕아웃 안의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스포츠 음료 냉장고로 문을 가로막았습니다. 스태프들도 전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저게 최후의 방어선이네요.]
[허허, 연습용 알루미늄 배트를 꺼내서 스윙 연습을 하는 선수가 있어요.]
[이능은 없어도 다들 파이팅이 넘치는 선수들이죠. 쉽게 당하지 않겠다, 이거예요.]
[아직 경기장 내로 진입한 에너미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경기장을 중심으로 결계가 하나 더 쳐져 있습니다. 침입은 막지 못하지만 들어오는 즉시 경보가 울릴 거예요.]
촤아악!
“아, 광림 쓰고 싶다.”
주수혁이 그의 애검, 두 개의 빛나는 날개를 의미하는 순 한글말에서 따온 ‘두빛나래’를 휘두르며 작게 투덜거렸다.
주수혁의 개사기 광림 앞에선 약점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지금 상황이 답답하기도 할 거다.
“입 말고 손을 움직여!”
“하하하. 그래, 그렇지······!”
맹효돈의 일갈에 주수혁이 한 번 웃고는 다시 두빛나래로 에너미를 공격했다.
크아아아―!
맹효돈과 주수혁의 이어지는 협공에 에너미는 스킬을 쓸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두 사람의 활약 덕에 위기다운 위기도 없이 캐스팅을 마쳤다.
SR급 아이템, ‘해협의 물살을 부르는 롯드’를 높이 들어 올렸다.
“뒤로 물러나!”
장남욱의 말에 바로 두 사람이 물러났다.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바둠 마그니(Vadum Magni)!”
솨아아아―.
마력을 띤 파도가 에너미를 덮쳤고, 이미 3분의 2이상 깎여 있던 에너미의 남은 HP는 곧 0이 되었다.
플레이어SAT-K가 다시 토벌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두 마리째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
그렇게 다섯이 힘을 모아 순조롭게 한 마리씩 쓰러뜨렸을 때.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에너미가 동시에 나타났다.
하나는 이족 보행 타입의 에너미였지만, 문제는 남은 하나였다.
“······동시에 나타났다.”
“둘 다 SR급인 것 같은데, 큰일 났네. 하하하.”
“웃음이 나오냐! 하나는 비행종이잖아!”
“뭐, 여차하면 광림이나 쓰자.”
상황만 보면 절체절명이었지만 장남욱을 제외하면 낙담하거나 좌절한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날아오르려는 비행종 에너미를 향해 도시후가 전기술을 사용하기 전, 그보다 먼저 검붉은 불꽃이 에너미를 삼켰다.
화르륵!
불이 약점 속성이 아닌지 비행종 에너미는 날개를 퍼덕이며 저항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전소했다.
에너미가 소멸되는 순간 하늘에서 붉은 망토를 걸친 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파팟!
붉은 사자의 팀원들이 착지를 마쳤다.
우리 다섯 명 앞에 각각 멈춰 선 붉은 사자의 팀원들이 우리를 돌아봤다.
“와, 중계에서 나온 대로 진짜 고등학생인 거 같은데! 역시 준열이네 학교 애들이라 다르네.”
“은광고 말고 사관학교 애들도 있을걸. 고생했다, 얘들아.”
이들도 중계를 들으며 싸웠는지 여성 팀원들이 붙임성 있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장남욱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잠깐 휘청거렸다.
딱.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에너미를 태우고 남은 검붉은 불꽃이 사라지고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스킬을 사용한 인물, 염방열이 붉은 사자 팀원을 향해 말했다.
“용제건 님이 들어가셨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클리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우리도 간다.”
“우리 용족이 가도록 하지. 아직 성에 안 찬다는 녀석도 있는 것 같으니.”
용족은 어느 사이엔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이계의 틈, 타워 앞에 서 있었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청룡 님.”
“다녀오마.”
청룡과 용족 몇 명이 타워 안으로 사라지자 염방열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이곳의 수비대는 우리가 맡는다. 수고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확신할 수 있었다.
‘끝났다. 흑막의 한 수를 완벽하게 막아 냈어······!’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실 야구장 주변의 이계가 모두 공략되었다는 안내 메시지가 디바이스에 도착했다.
타워로 들어갔던 공격대들도 무사히 이계의 틈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옥토연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뭔가를 열심히 찾다 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푹 쉬다 모르는 척 다시 저편을 바라봤다.
‘참 알기 쉬운 진족이네.’
모르는 사이인 척하려고 한 것 같은데 저 꼴을 옆에서 다 본 용제건은 눈치챘을 거다.
나와 옥토연에게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자, 그럼 야구장으로 돌아가자!”
“경기도 하냐?”
“경기 취소가 아니라 중단이었잖아. 아마 아직 1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할 거야.”
주수혁의 말에 모두 들뜬 얼굴로 다시 야구장으로 향했다.
용제건은 이계 공략을 마치고도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공간술과 비행으로 걷는 수고 없이 다시 야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주수혁의 말대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오, 진짜 다시 하나 봐!”
“우리 팀이 오늘 홈인 데다 용족의 도움까지 받았잖아. 주오 드래곤즈가 오늘 이기겠다.”
“하하하, TC 나이츠는 어린이날 승률이 나쁘지 않으니까 아직 몰라.”
주수혁과 도시후의 가벼운 신경전 속에 우리는 남은 경기를 관람했다.
중계석에서는 틈만 나면 붉은 사자 팀과 용족들을 비춰댔다.
물론 가장 많이 화면에 나오는 건 스타 플레이어, 소홍룡 염준열이었다.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가 붉은 사자 팀원들 사이에 섞여 웃고 있는 장면이 몇 번이나 홀로그램을 채웠다.
적벽괴도와 약속한 대로 끝까지 앉아서 볼 생각인가 보다.
‘게임 속에선 경기는 중단되고, 그 뒤로 이 경기의 승패가 어떨지 알 수 없었는데.’
오늘 경기는 9회 말, 주오 드래곤즈의 5월 들어 다소 부진했던 1번 타자가 끝내기 안타를 치며 주오 드래곤즈의 승리로 끝났다.
토벌을 마친 후, 기운이 없어 보이던 장남욱이 벌떡 일어나 감격한 얼굴로 주오 드래곤즈의 응원가를 열창한 게 인상 깊었다.
* * *
토벌이 완료되기 직전.
[플레이어SAT-K에 등록된 정보에 의하면 세 번째로 등장한 이계 공략 파티에는 고등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명을 받을 정도로 실전 경험이 있는 학생은 은광고의 강철의 쐐기, 무명의 초신성 둘뿐인데요.]
[은광고등학교, 군사관학교 고등부. 둘 다 한국 최고의 명문고들로 꼽히는 곳이죠. 대한민국, 우리나라 플레이어계 미래가 밝습니다.]
[아, 지금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희소식입니다! 붉은 사자와 용족 그리고 관객으로 있던 플레이어 연합의 이계 공략이 종료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헬리캠이 접근 중입니다! 보이십니까? 이계의 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요. 공략 난이도는 SR++. 사전 준비도 없이 급조된 전력이······ 감격스럽습니다.]
[너무나도 기나길게 느껴지던 정비 시간, 경기 중단이 끝났습니다.]
[네, 경기장에도 안내가 나가고 있죠.]
―와아아아아!
[관객 여러분들의 환성이 들립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질서를 유지한 우리 관객 여러분들도 또 하나의 영웅입니다.]
[현재까지 부상자 수 0명.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야구계에도, 플레이어계에도 미담으로 남을 것 같은데요.]
[중계석에 응원 메시지가 굉장히 많이 도착해 있습니다. 이만한 댓글 수가 모이는 건 한일전 정도인데요. 함께 마음 졸이며 이 상황을 지켜봐 주신 전국의 야구팬과 시청자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광고 후 경기 재개합니다. 여기는 잠실입니다.]
파지직! 쾅! 와장창!
광고 화면이 뜨기 전에 스크린과 디바이스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물건에 화풀이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러다 몸 상해. 그러지 마.”
인공 광원이 모두 파괴된 방 안.
어둠 속에서 달콤한 음성이 들렸다.
사뿐사뿐, 목소리의 주인은 이 방 안의 주인을 향해 걸어갔다.
“내 몸이 문제냐! 일족의 명운이 걸렸는데, 망할 용족 때문에······!”
“그 영물(靈物)들이 이리 긴 시간 그 장소에 머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네.”
“우연히 시구자가 그 망할 것들의 후예였다니, 제기랄! ‘그분’의 위대한 힘과 안배가 우연 하나에 이리도 허망하게 끝나다니!”
그녀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달래는 그녀는 작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게 우연일까.’
어둠 덕에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출 수 있었다.
그의 파괴벽에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의 어깨에 살짝 얼굴을 기대며 속삭였다.
“최근 불행한 우연이 자주 겹치는 것 같네. ‘그분’도 만능이 아닌가 봐?”
“······한낱 미물(微物)이 ‘그분’을 의심하는 거냐!”
“미안해. 나는 너희 영물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까 이해해 줘.”
“제기랄, 젠장······ 혼자 있고 싶으니까 꺼져.”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그녀는 미련 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어둠을 믿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처연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응, 언제든지 불러 줘.”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기색은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빛나는 비늘 조각을 떨어뜨리며 나비가 하나 날아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