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내한 공연 (4)
폐쇄 구역, 구교사.
서둘러 달려온 듯한 염준열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 네 스승이 될게. 흠잡을 곳 없는 시구였어.”
“감사합니다, 스승님! 시구는 그냥 덤인 것 같지만요.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철저히 공략 대비를 해서 이계 클리어 최대 공헌자의 자리를 노렸을 거예요.”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이계 클리어의 최대 공헌자는 각각 염방열, 청룡, 용제건이었다.
이 셋 이상의 활약을 해 최대 공헌자 자리를 노리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역시 염준열은 향상심이 남다르다.
“스승님께서 왜 이런 조건을 거셨는지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아직 가르친 게 하나도 없는데.
스승님 연호를 하니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조건의 세 가지였죠. 제게 시구를 요구한 건 아버지의 붉은 사자 팀과 용족을 부르기 위해서. 제가 시구를 하면 그분들이 오시지 않을 리 없죠.”
“그래,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염준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요구는 끝까지 앉아 있을 것. 이건 보통 용족들이 시구하러 와도 5회 시작 전에는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에요. 이계가 나타난 건 5회가 끝난 이후. 그 시간까지 붙잡아 두기 위해서겠죠.”
염준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세 번째는 시구하는 당일까지 비밀로 할 것. 아마 이 조건이 제일 중요했을 거예요. 그렇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염준열이 자신의 추리를 말하는 걸 기다렸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내 뜻을 알았는지 바로 말했다.
“단순히 이계가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겠죠. 플레이어 협회를 불러 대비해도 될 거예요. 익명으로 투서를 쓰거나 적벽괴도의 이름을 써서 경고했다면 협회도 움직였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적벽괴도의 이름을 쓰느니 홍규빈한테 빚이라도 져서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복잡한 기분이 된 나를 내버려 두고 염준열은 홀로그램을 전개해 통계 자료를 보여줬다.
지난 5년간, 5월 5일에 서울 시내에 발생한 이계 발생 수와 올해 5월 5일에 발생한 이계 발생 수를 비교한 통계치였다.
“그날, 지난 5년간 동월 동일의 평균 대비 서울 시내에서 발생한 이계의 수는 500% 이상 증가했어요. 세계 위성 중에서도 최고의 적중률을 자랑하고, 최근 대대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점검을 받은 플레이어SAT-K가 SR++급 이계를 셋이나 놓쳤죠. 우연이라 생각하기엔 이상해요.”
홀로그램은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그날 잠실 야구장에 있었던 일을 정리한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매진된 잠실 야구장의 좌석표와 주오 그룹과 TC 그룹 차기 총수 일가의 사진이 떠올랐다.
“믿기 어렵지만, 이번 이계는 누군가가 위성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여 이계를 만들었고, 플레이어 협회를 방해하기 위해 서울시 곳곳에서도 자잘한 이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전조 현상 없이 나타난 세 개의 이계는 잠실 야구장을 가득 채운 약 2만 6천 명의 시민과 주오 그룹과 TC 그룹의 차기 총수 일가를 노린 테러였던 거예요.”
염준열은 홀로그램을 끄고 까마귀 가면을 쓴 나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일까지 비밀로 해야 했던 이유는 이계를 생성하고 나타날 곳을 지정하는 게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스승님은 범인의 눈에 띄지 않게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던 거죠? 범인을 직접 노려 이 일을 막지 못한 건 아직 범인의 정체까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하다.
전부 정답이다.
게임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나와 달리 염준열은 아주 한정적인 정보만 잡고 있는데도 여기까지 추리해 냈다.
‘바로 이계를 만들어 내는 능력, 이계 부르기를 떠올렸다는 게 대단하다. 이 세계에선 고정 관념을 파괴한 개념일 텐데.’
‘이계 부르기’의 존재는 아직 이 세계에선 허무맹랑한 것이다.
내가 이전에 있었던 세계로 따지면, ‘운석을 인위적으로 불러내 지구에 떨어뜨릴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헛소리로 취급받을 거다.
이 자리에 염방열이나 용족이 있었다면 염준열 부심을 참지 못하고 있겠지.
“내 제자답다. 전부 맞아.”
“감사합니다······!”
나도 이제 염준열 스승이니까 부심을 부려 봤다.
염준열은 제자라고 불러주는 게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난 범인이 무슨 짓을 할지 파악하고는 있지만, 누구인 것까지는 몰라. 협력해 줘.”
“물론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허락하시면 아버지와 청룡 삼촌께도 말씀드려 도움을 청할게요!”
그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염방열하고 청룡이 알면 위험한 일에 염준열을 끌어들였다고 반은 죽여 놓을 거다.
또 갑자기 굴러 들어온 놈이 스승 노릇을 한다는 이유로 남은 반까지 다 죽여 버릴 게 뻔하다.
“······그래. 필요하면 말할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네······! 스승님을 믿습니다. 스승님은 환몽 경매로 고통받던 이들에 이어 잠실 야구장을 찾은 어린아이들과 시민들을 구해 낸 영웅이시니까요!”
적벽괴도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데도 이렇게 낯이 간지럽다니······!
염준열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 더 그렇다.
말을 돌리자.
“내 정체는 묻지 않을 거야? 수상하지 않아? 너를 이용하려 드는 놈들은 주변에 많잖아. 그런 놈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데.”
“어찌 제자가 스승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무수한 인명을 구하신 영웅을요.”
되레 이 질문에 염준열이 정색을 했다.
아직 가르친 게 없는데 내가 여태껏 한 활약이 매우 인상 깊었나 보다.
염준열은 그 말에 덧붙여 기대를 담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이 언젠가 제게 말씀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스승님의 정체를 감당할 만큼 강해지면 반드시 말씀해 주시겠죠.”
“······그래.”
궁금하기는 한가 보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무작정 안 된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그럼 첫 수업을 시작할까.”
“네!”
1시간 후.
열기를 머금은 세로로 열린 동공이 내가 만든 불꽃을 노려보고 있었다.
염준열은 인간보다 용족의 형태에 가까워져 머리카락이, 눈이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다.
염준열의 집중력이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갑니다!”
파아아―!
염준열의 목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수십 개의 불덩이가 쏟아졌다.
그가 최대 화력으로 내 손바닥 위에 있는 불꽃을 향해 공격을 가했지만 내 불꽃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사전에 쳐 둔 내가 불꽃으로 만든 방어막에 염준열의 모든 공격이 흡수되어 버릴 뿐.
“윽······!”
힘을 너무 쓴 걸까.
염준열의 힘을 구현한 홍룡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아닙니다, 더 할 수 있어요!”
홍룡이 다시 실체를 되찾았다.
염준열이 심호흡을 하고 이번엔 이능파를 방출할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것 같네.’
내가 요구한 건 ‘이능 삼키기’였다.
불, 물, 전기, 바람, 땅 같은 자연계의 이능의 경우, 동일한 스킬의 소유자는 상대가 발동한 능력의 주도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삼킨다 해도, 상대의 능력 전부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 현재 외부로 발현된 만큼의 이능의 주도권을 뺏는 것뿐이지만.’
예를 들어, 지금 염준열이 화염술로 불덩이를 만들어 나를 공격했다 치자.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 중인 나는 염준열과 동일한 화염술 스킬을 가지고 있으니 이능 삼키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이능 삼키기엔 동일한 스킬을 사용해 덮어쓰거나, 이능파를 방출하는 방법 등이 있지. 둘 다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능 삼키기에 성공하면, 나는 염준열이 만든 그 불덩이를 조작하는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
실패했을 때는 보통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만약 이능파가 역류하게 된다면 정신에 데미지를 입게 된다.
‘염준열같이 재능이 넘치고,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플레이어라면 이 정도 리스크가 있는 수련법이 효율적이야.’
염준열에게 이능 삼키기를 시도해, 내가 발동한 화염술의 주도권을 빼앗아 보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1시간 정도 계속 실패가 이어지고 있다.
‘내 레벨이나 정신력이 월등하다곤 하지만 겨우 손바닥에 올릴 만한 크기의 불꽃인데. 전혀 삼켜 내지 못하고 있어. 염방열······ 대체 뭘 하고 있던 거냐.’
내가 쓰는 수련법은 염방열이나 화염술을 지닌 용족들도 쓸 수 있는데.
‘조절을 잘못하면 염준열의 정신이 다칠 수 있으니 그런가.’
염준열은 용왕신의 가호를 받아 그 신체가 불에 타는 일은 없지만, 정신은 달랐다.
화염술에 의한 이능파의 역류로 염준열의 정신에 손상이 올 수 있었다.
그걸 걱정해 염방열과 용족들은 이능 삼키기 훈련을 하지 않았을 거다.
이능 삼키기 외에도 조금이라도 위험한 훈련은 다 삼가고 있었을 거다.
‘염준열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나를 스승으로 삼은 거겠지.’
염준열은 지금도 이 고통스러운 훈련이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홍룡과 같은 눈을 한 그의 이능파가 불꽃을 향해 쏟아졌다.
화르륵!
염준열의 이능의 간섭을 받은 내 손 위의 불꽃이 검게 변하며 염준열을 향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이능파 역류의 조짐이다.
“그만!”
주먹을 움켜쥐어 불꽃을 지워 버리고 염준열에게 달려갔다.
힘을 지우자 염준열이 책상을 치워 둔 교실 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홍룡은 점차 투명해지다 사라져 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처음보다 이능파가 더 무뎌졌어.”
염준열의 눈을 보니 정신에 큰 데미지를 입은 것 같진 않은데, 입가에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무리하고 있었나 보다.
‘······이 광경을 보면 염방열이나 용족이 나를 죽이러 올 것 같은데.’
염준열도 제 몸에 한계가 온 걸 아는지 분한 표정을 했다.
“적어도 당신의 ‘용’을 꺼내게 만들고 싶었는데. 손바닥만 한 화염조차 삼키지 못하다니.”
염준열은 환몽 경매 때 등장한 불의 벽과 초대장에 남긴 홍룡의 흔적이 신경 쓰이고 있을 거다.
‘지금 염준열을 상대로 내 홍룡을 꺼내면 수련 자체가 안 될 걸 알고 있겠지.’
나는 회복 아이템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염준열도 갖고 있겠지만 그가 보유하고 있는 회복 아이템 개수가 변한 걸 알면 염방열과 용족이 생지랄을 떨며 은광고를 털러 올 게 뻔했다.
“당분간 쉬어. 만약을 대비해서 삼 일 이내에 또 회복 아이템 쓸 일 없게 조심하고. 쉬는 것도 공부야. 명상이라도 하면서 내 불꽃을 삼키는 이미지를 명확하게 만들어.”
“······못난 제자라고 버리시진 않을 거죠?”
염준열이 풀 죽은 표정을 했다.
게임 속에서도 저런 얼굴을 하는 건 못 봤는데.
오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거에 충격을 크게 받았나 보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버릴 리가.
“제자로 삼아 준다고 했잖아. 다음에 보자.”
“네? 잠깐······!”
너무 길게 붙잡아 두면 용제건이 염준열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사용합니다.〉
곧바로 폐쇄 구역에 올 때처럼 게임 내 은밀 행동의 최강자, ‘무색인(無色人) 전무영’의 광림을 사용했다.
염준열은 점점 기척도 모습도 사라지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여전히 반쯤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두고 교실을 나서던 중 염준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스승님······! 이렇게 사라질 수 있구나. 적벽괴도 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꿈만 같다!”
교실 문을 나서기 전 시공간을 뒤트는 단어에 손이 오그라들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쓴 거고 나를 부르기 위해 사용한 건 아니니 봐주기로 했다.
* * *
밤, 기숙사 방.
내 개인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니 꽤 늦은 시간이 되었다.
디바이스를 가동해 보니 메시지가 또 잔뜩 도착해 있다.
여러 명한테 메시지가 와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유상훈과 황지호, 둘한테서 온 메시지다.
‘차례대로 확인해 보자.’
장남욱과 유상훈, 셋이 있는 메시지 방.
장남욱이 어린이날에 나와 만나게 된 과정과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놨다.
덤으로 나와 유상훈을 향한 잔소리도 첨부되어 있었다.
유상훈은 메시지 상으론 별 반응 없었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섭섭해하는 것 같다.
[유상훈] 그랬냐
[유상훈] 다음엔 불러라ㅡㅡ
[유상훈] 이번 주말 바쁨?
‘셋이서 같이 본 지는 좀 됐는데 한번 만날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유상훈을 빼먹고 같이 만나 놀고 에너미도 퇴치했으니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안 바쁨’이라고 메시지를 보내 놨다.
이렇게 보내 놓으면 장남욱이 알아서 주말 계획을 짜 줄 거다.
‘다음은 황지호······ 중간에 있는 건 쓸데없는 메시지 같아 보이니까 마지막 것만 확인해야지.’
[황지호] 야, 내일 수업 끝나고 우리 집 와라.
내일은 부활동도 쉬는 날이니까 가 볼까.
월궁계도에 대해 듣고 싶은 것도 있었다.
또, 올무도 봐야 한다.
[황지호] 김신록이 단서를 잡은 것 같다.
단서?
[황지호] 미물(微物)이라고 아냐?
······벌써 그 존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