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내한 공연 (5)
적벽괴도가 사라진 후.
염준열은 회복 아이템 카드를 사용한 뒤, 그는 같은 부활동 선배인 학생부회장 지명수가 가르쳐 줬던 기록 기기 없는 루트를 골라 폐쇄 구역을 빠져나갔다.
교문 앞으로 갔을 때, 누군가가 염준열을 불러세웠다.
“준열아.”
“용제건 선생님······!”
“나 퇴근했으니까 형이라고 해도 되는데.”
“아직 교내잖아요. 혹시 기다려 주신 거예요? 얼른 가요.”
용제건은 감이 좋다.
용족 중에서도 최고의 기척 감지 스킬을 지닌 용제건이다.
염준열은 혹시 그가 적벽괴도에 관해 눈치챌까 걱정했다.
하지만 염준열에게 자신을 기다려 준 용제건을 두고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준열아, 훈련하던 중이었니?”
“네?”
“네 힘의 흔적이 있는데, 혼자서 열심히 했구나. 네 기척이 가득해.”
훈련을 마친 지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아서인가.
염준열은 행여 다른 기운이 섞여 있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용제건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승님의 기척은 못 느끼신 건가.’
다행이라 생각하며 염준열은 용제건과 함께 교문 밖으로 나섰다.
평소보다 용제건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염준열은 행여 말실수할까 봐 그 이유는 묻지 못했다.
대신 말을 돌리기로 했다.
“어버이날 선물 사러 같이 가요! 아버지 선물은 정했는데, 어머니 선물을 고르는 게 쉽지 않네요. 조언 좀 해주세요.”
염준열의 말에 용제건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금요일 방과 후, 다음 날이 주말인 것도 있어 은광고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귀가했다.
귀가하는 학생을 배려해 부활동도 쉰다.
그 덕에 황명호의 대저택으로 일찍 갈 수 있었다.
“조용하네.”
“오늘 아침부터 다들 바빠 보였어. 우선 이야기부터 할까.”
현관에 들어섰지만 은호의 후예 삼 남매도 백호군도 올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 어딘가에 있는 건지, 저택 밖에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올무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황지호를 따라 응접실로 이동하자 곧바로 차와 다과가 나왔다.
오늘의 차는 검은깨와 찻잎을 볶아 우려낸 흑임자차.
다과는 나비 모양 다식판으로 모양을 낸 흑임자다식.
평소엔 제철에 맞게 차와 다과가 준비되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흑임자 제철은 10월인데 왜 지금 이게 나왔지.’
오늘은 계절에 맞게 차와 다과를 선택할 기분이 아닌가 보다.
“조의신, 너는 영물과 미물의 차이점에 대해 알고 있나?”
“조금은 알아.”
인간이 핏줄에 따라 귀천을 따지는 것처럼, 진족도 근원에 따라 서로를 영물, 미물로 나누기도 했다.
근원이 한반도의 개천신화에 기반한 호족.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달토끼 전설을 기반으로 하는 토족.
그 외 12지에 속한 진족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영물 취급을 받았다.
반면 근원이 애매하거나 인지도가 낮은 진족들은 미물이라며 경시당하기도 했다.
“잡힌 웅족이 말하길, ‘그분’의 곁에서 총애를 받는 미물이 있는 모양이다······ 미물이라는 표현은 개인적으로 어리석은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내 기준으로는 웅족이 미물이니까.”
미물은 변변치 못한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상대적인 표현이라 황지호가 미물이라 칭해진 진족을 특정 짓긴 어려울 거다.
게임을 통해 정보를 알고 있는 나와 달리.
‘웅족이 말한 그 미물은 분명 접족(蝶族). 그중에서도 아마 나비령이라는 이름을 쓰는 여자일 거야.’
나비령.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나온 고사성어,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를 근원으로 탄생한 진족이었다.
인지도가 높다고 하나 인간의 도가 사상가가 남긴 저서 속에 몇 줄 정도로 등장하는 나비령은 미물 취급을 받았다.
‘게임 속에서는 웬만한 영물보다도 강했었는데.’
만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나비령의 광림은 사기 그 자체였다.
마음만 먹으면 깽판도 칠 수 있을 텐데, 왜 몸을 낮추고 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흑막의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행보를 보면 애매한데······ 결국 아군인지 적인지 판별이 가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어.’
황지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웅족, 돈족, 긴 꼬리에 이어 또 다른 진족이 ‘그분’의 곁에 있는 것 같아. 미물이라고 해서 약하다고 할 수 없으니 골치 아프군.”
“그래.”
“······놀라지 않네.”
“놀랐어.”
억지로 놀란 척하면 더 의심받을 게 뻔했으니 평정을 가장했다.
미물에 이어 나온 화제는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이었다.
나는 간결하게 그날 있었던 사건에 관해 설명했다.
“어째서 붉은 사자, 용족, 망할 달토끼에 이어 너까지 거기에 있었는지 설명이 안 되는데.”
“우연이야.”
우연이라는 단어에 불신감을 숨기지 않고 황지호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가능하면 직접 알아내겠다는 의지가 꺾이지 않은 모양이다.
추궁하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월궁의 기술은 플레이어SAT-K가 잡아내지 못하는 ‘전조 없는 이계 발생’을 포착하는 모양이군.”
“그래.”
“지금 호족과 한국 정부, 플레이어 협회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아. 그들이 흔들리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데.”
황지호는 생각에 잠기다가 흑임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망할 달토끼를 족치고 월궁계도의 정보를 내놓게 만들어서 우리 쪽에서 어떻게든 해 볼까······ 인원 배치에 여유가 없어질 것 같군.”
진족답지 않은 이타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의 발상과는 조금 어긋나 있었다.
나는 인간이 할 법한 제안을 했다.
“호족이나 토족이 이계 공략에 항상 신경 쓰긴 어렵잖아. 플레이어 협회와 힘을 모으는 건 어때.”
황지호가 이계 공략을 할 때 인간의 단체와 힘을 모은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월궁과 플레이어 협회의 기술 제휴라. 알았다, 고려해 보지. 얘기가 잘 되면 황명 그룹이 교두보 역할을 하마.”
황지호가 몇 마디 덧붙였다.
“······회사를 몇 개 사야 할 것 같군. 그간 돈을 별로 안 썼던 게 도움이 될 것 같네.”
돈지랄은 충분히 하는 중인 것 같은데.
나는 황명호 대저택과 은광고의 설비 수준을 떠올리며 어처구니없어했다.
마지막 주제를 꺼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있어선 가장 의미 있는 주제일 거다.
“영원의 호수 팀 마스터 내한 공연 티켓 남는 거 없어?”
이레나는 취소 티켓을 잡는다며 쉬는 시간마다 새로 고침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이 점점 까맣게 변하는 게 잠도 안 자고 지옥을 헤매는 중인 것 같았다.
“그거 알아봤는데······ 있었는데, 없어졌다.”
뭐라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는 본 모양이다.
“황명재단의 학교에서 하는 거니까, 나한테 초대권은 몇 장 보내 줬더군. 문제는 호족 내에서 권제인의 팬이 많아서······.”
황지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황지호는 평소 초대권이 들어오면 부하 호족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하며 권제인 콘서트 초대권을 나눠 갖기로 한 부하 호족들은 티켓을 두고 크게 다투었다.
호족은 팬이 많은 탓에 초대권 4장을 두고 태호권 토너먼트까지 치렀다.
수십 시간에 걸친 경기 끝에 우승자를 정했다고 한다.
‘호족도 유쾌하게 사는구나.’
황지호는 우승한 호족이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를 덧붙였다.
“뭐, 우승한 놈이랑 태호권으로 싸워서 뺏어 올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호족하고 척지고 싶지 않아.”
“그건 그런가······ 우승한 놈 평소 하는 짓을 보면 표 뺏으면 울 것 같긴 해. 하하하!”
그런데도 뺏으려고 했냐.
무서운 놈.
호족 중에서 권제인의 열성 팬이 있나 보다.
권제인은 쉽게 내한하지도 않고 한국에선 콘서트도 잘 열지 않는다.
한반도를 떠나기 어려운 호족 입장에서 이번 기회를 뺏으면 정말 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라이브 연주를 듣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
황지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콘서트홀 일일 스태프 자리는 비워 둘 수 있어. 갑자기 정해진 내한 공연이라 보안 심사 문제로 잡일을 할 스태프는 아직 다 못 뽑았다.”
좌석은 얻지 못했지만, 다른 방법이 생길 것 같다.
황지호와 이야기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했을 때, 우리 앞을 누가 막아섰다.
“다녀오셨어요, 황호 님! 의신이 오빠!”
“황호 님, 조의신 형! 기다렸어요.”
“안녕하세요······.”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응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호 님, 저······ 오늘은, 어버이날인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랑 토족 분들의 신세를 질 때는요, 매년 감사의 마음을 받아 카네이션을 준비했었어요.”
“신록 오빠한테 부탁해서 준비한 재료로 만든 거예요. 아침에 드리려고 했는데 조금 늦게 완성됐어요······!”
“저기······ 이거······.”
막내인 은재호가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황지호에게 내밀었다.
아직 손재주가 없는 건지 전체적으로 엉성한 조화다.
카네이션 잎을 표현한 종이는 삐뚤빼뚤했고 꽃과 잎을 연결한 부분은 접착제를 몇 번이나 다시 바른 탓에 이음새가 엉망이었다.
“나한테 주는 거냐.”
“네······!”
황지호는 여태까지 본 얼굴 중 가장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은재호 앞에 몸을 낮췄다.
은재호는 옷핀을 이용해 황지호의 교복 위에 카네이션 조화를 달아 줬다.
“······고맙다.”
“저희야말로 늘 감사드려요, 황호 님!”
“아,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황지호가 장난기 없이 웃는 얼굴도 주름 하나 없는 교복 위에 장식된 서툰 솜씨의 카네이션 조화도 나쁘지 않았다.
‘착한 아이들이네.’
한국에 어버이날 개념이 들어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진족의 기준으로는 최신에 속할 인간의 풍습을 따르는 걸 보니 이 삼 남매의 아버지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왕왕······!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우리 올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있는 건지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신수가 기다리고 있나 봐요.”
“아, 맞다.”
“사실 의신이 오빠가 오늘 오신다고 들어서 오빠 것도 만들었어요!”
“네,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만들었어요!”
뭐, 내 것도 만들었다고?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주고받은 행위 자체가 워낙 오래돼서 상상도 못 했다.
주는 건 물론이고 받는 건 더더욱 그렇다.
“백호 님, 문 열어주세요!”
둘째 은이호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고, 현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이 열렸다.
현관 가까이라고 해도 복도 저편에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왕!
올무가 열린 문틈 사이로 한 번 얼굴을 빼꼼 내밀며 짖곤, 무언가를 물고 내 앞으로 뛰어왔다.
서툰 솜씨로 만든 카네이션 조화였다.
올무가 빨리 받아 달라며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나를 올려다봤다.
“신수가 의신이 오빠한테 직접 전하고 싶은지 계속 쳐다봐서요.”
“그럼 놀라게 만들자고 해서 숨어있었어요.”
올무는 삼 남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어설프게 만든 꽃관까지 썼다.
올무가 쓰고 있으니 생화로 만든 꽃관보다 더 빛이 났다.
카네이션을 받기 전에 올무를 끌어안고 외쳤다.
“천사인가······!”
우리 올무는 신수가 아니라 천사였나 보다.
예쁘고 기특한 짓을 한 올무는 물론이고 은호의 후예 삼 남매에게 감사 인사를 하나하나 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흔히 쓰는 감탄사인 건 알지만, 호족의 신수가 천족(天族)의 사자(使者)에 비유되는 건 미묘하군.”
내가 카네이션 조화를 교복 위에 달던 중에도 황지호의 혼잣말 같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잠깐만. 왜 조의신 쪽이 메인이벤트인 것 같지? 호족의 수장은 나잖아.”
제 교복 위에 매단 카네이션 조화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꽉 누르면서도 투덜거리는 황지호.
칭찬을 들을 때마다 밝게 웃으며 어떻게 이 조화를 만들었는지, 몇 번 실패했는지 조잘조잘 설명하는 삼 남매.
종이 꽃관을 쓰고 내 품 안에서 애교를 부리는 올무.
이 장면을 백호군이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백호군의 옷 위에도 카네이션이 달려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