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비의 날갯짓 (3)
때는 지난 5월 5일.
영국에 있는 영원의 호수 팀 빌딩, 그 내부의 권제인 전용 리사이틀홀, ‘for JANE’.
계단식 좌석이 300여 석이 준비된 이 홀은 보통 권제인이 개인 연습실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그날 기분에 따라 정부 고위 인사나 보육원 아이들, 길거리의 노숙자나 현대 미술가 등 마음대로 초대객을 정해 불러들여 공연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권제인 혼자였다.
바이올린을 목 밑에 가져간 상태지만 활을 든 오른손은 아직 들어 올리지 않았다.
권제인은 지판을 잡은 왼 손가락으로 현 위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 곡은 피치카토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튕기는 것보다 뜯는다는 감각으로 연주하자.’
영감이 떠올라 권제인이 활을 내려 두고 오른손을 D 현 위에 가져간 후 눈을 감았다.
홀을 울릴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달칵.
그 전에 스테이지 뒤쪽 문이 열리고 잡음이 섞였다.
“제인아, 노크를 100번 넘게 했는데 왜 반응이 없니! 전화 좀 받아. 나한테도 연락이 온다.”
노크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는데.
집중력이 깨진 권제인은 불만스러웠지만, 그녀는 이전에도 중요한 연락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사고를 몇 번 친 후, 팀 서브 마스터인 재러드 리에게는 자신이 연습 중에도 자유롭게 입실해도 좋다고 허락했었다.
“알았어.”
전원을 꺼 둔 디바이스를 가동했을 때였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디바이스가 수천 건의 메시지 수신을 알리며 알람음을 뱉었다.
권제인은 디바이스를 다시 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재러드가 직접 올 정도면 중요한 연락일 거야.’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하려던 중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 용제건 선생님]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은광고를 다니던 시절, 교사를 하던 특이하고 인상 깊은 용족이었다.
‘이분한테 오는 연락이라면, 재러드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해.’
권제인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제인아, 안녕.]
조금도 변하지 않은 용제건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주 잠깐 은광고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한국, 은광고, 옛 친구와 은사들과 두고 온 가족······.
치밀어 오르는 향수를 꾹 눌렀다.
권제인은 ‘나비’를 찾기 전까진 한국에 가는 걸 자제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용제건 선생님, 무슨 일로 연락하셨죠?”
[한국에도 전조 없는 SR++급 이계가 셋이나 등장한 거 알고 있니.]
“뉴스는 봤어요. 용족과 염방열 선배님의 팀이 우연히 막았다고 들었어요.”
[내 생각엔 우연이 아닌 것 같아.]
용제건은 한국과 용족들과 연관된 사건을 차례대로 말했다.
환몽 게이트.
그 사건을 해결한, 용족의 후예 염준열으로 의심받는 적벽괴도.
적벽괴도를 찾기 위해 예정을 바꾸고 귀국한 염준열.
갑자기 적벽괴도 수색을 중단하고 시구자로 나선 염준열.
그가 시구자로 나간 경기장에서 발생한 전조 없는 이계 현상.
[이게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예전에 말한 그 ‘나비’, 아직도 찾는 중이지?]
용제건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황홀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용제건의 저 목소리는 이전에도 들었다.
권제인의 은광고 재학 시절.
그녀의 은광고 선배 염방열이 무모하게도 청룡 앞에서 용족의 후예에게 프러포즈했던 적이 있었다.
용제건이 그 광경을 봤을 때도 저런 목소리를 하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맨체스터에서 전조 현상 없이 이계가 나타났을 때, 나비가 영원의 호수 팀을 인도한 것처럼 우리 용족도 뭔가에 이끌렸을지도 몰라.]
용제건의 목소리는 불길했지만, 내용은 권제인이 10년을 넘게 찾아 헤맨 나비의 단서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조 없는 이계 발생 현상을 꿰뚫는 기술을 가진 진족이 있어. 그들은 얼마 전에 전멸할 뻔했고, 지금은 호족과 함께 행동 중이지. 호족은 은광고를 중심으로 사건에 휘말리는 중이야.]
용제건의 감은 그가 흥미 있어 하는 일에 한해 매우 잘 맞는다.
염방열이 청룡에게 불꽃 세례를 받고 용족의 후예에겐 대련 중에 뺨을 맞고 저 멀리 날아가 청랑호에 처박히는 와중.
용제건은 그걸 보고도 ‘저 둘, 언젠가 결혼할 것 같은데?’라는 발언을 했다.
결국, 염방열과 용족의 후예는 사랑에 빠져 은광고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해 아들까지 봤다.
용제건의 감은 믿어 볼 만했다.
[은광고로 와, 제인아. 난 은광고의 호족을 중심으로 사태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 호족 쪽에도 연락해 볼래? 호족 중에 네가 내는 소리에 죽고 못 사는 녀석들이 많아, 저번에도 네 콘서트 못 갔다고 장관 두 명을 터는 걸 봤어. 제인이 네가 직접 연락하면 낚일 거야.]
“감사합니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한국에서 보자.]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용제건은 권제인이 한국으로 갈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제인아?”
“나, 한국 갈래.”
용제건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꼴이었으나 나비의 단서를 놓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니, 제인아. 왜 그런 말을 해. 대체 미스터 용이 뭔 소리를 한 거야!”
재러드 리가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권제인은 이미 머릿속에서 공연 계획을 하기 시작했다.
호족에서 권제인의 소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 은광고에서 연주회를 열고 초대장을 보내야겠다.
은광고에서 공연한다고 하면 상인관이 편하겠지만 여러 추억이 있는 호연관에서 하는 게 좋겠다.
“제인아, 제인아? 듣고 있니?”
“안 갈 거면 나 혼자 갈게.”
“널 어떻게 혼자 보내니! ······지금부터 일정 조정할게. 언제 갈 거야? 반년 뒤? 빠르면 석 달 정도 뒤에?”
“아니. 최대한 빨리. 한 다음 주에.”
“······제인아. 팀 일정 담당하는 팀 메이트들이 울지도 몰라.”
“미안해, 그럼 나 혼자 갈게.”
“······아니. 내가 잘못했어. 절대 혼자 가지 말아 줘.”
재러드 리가 우는 소리를 내며 리사이틀홀 밖으로 사라졌다.
‘한국에 간다······.’
한국에 보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초대장을 보내기 곤란한 사람들도 있는데. 다른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초대장은 보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와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푸른 몸체의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 * *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 당시, 옥토연과의 대화로 뭔가를 눈치챈 것 같은 용제건.
그 용제건의 요청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권제인의 내한.
그녀가 호족의 관계자와 접촉하려 했다는 30대 황호의 발언.
나비를 찾으러 왔다는 권제인의 말.
단서를 조합해 가설을 세웠다.
‘······권제인은 설마 접족을 찾으러 온 건가.’
아직 정보가 부족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저기.”
김유리의 나비 모양 머리핀을 보던 권제인이 눈살을 찌푸리다 말했다.
“나비를 찾으러 한국까지 왔지만, 그래도 나비는 싫어.”
어쩌라는 건가.
김유리는 의미 불명의 화법을 구사하는 권제인을 보며 말을 잃었다.
권제인이 점점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머리핀, 내가 연주하는 동안 착용하지 말아 줘. 나비가 있는 게 싫어.”
“네?”
나비가 진짜 싫은가 보다.
게임 속에서도 참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실물은 더했다.
“대신 이걸 줄게.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
권제인이 자신이 하고 있던 머리핀을 빼 김유리에게 내밀었다.
목련을 이미지한 머리핀이다.
백금으로는 꽃잎을, 임페리얼 토파즈로 꽃술을 표현한 머리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공연 때 착용하려 했던 장신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양도되려 하고 있었다.
‘저걸 지금 그냥 준다는 건가. 연주하는 동안, 김유리가 나비 모양 머리핀을 착용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상식 밖의 일에 김유리가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휙―.
받을 기색이 없는 김유리를 향해 권제인이 머리핀을 던졌다.
“어, 어? 자, 잠깐만요. 권제인 선배님?”
김유리는 반사적으로 머리 장신구를 받았다.
은광고의 플레이어라면 저 정도는 그냥 잡는 게 당연하긴 했다.
권제인도 그걸 알고 던졌을 거다.
권제인은 김유리의 손에 있는 장신구를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연주 시작하기 전까지 바꿔 줘.”
“네? 권제인 선배님, 노······ 농담이시죠?”
권제인은 진심인 듯 김유리의 말에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이번에 권제인은 이레나 쪽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이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이올린 연주하니?”
권제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이레나의 교복 위에 달아 둔 바이올린 모양의 배지 위였다.
현악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학생들은 전부 달고 있는 배지였다.
“아, 네······! 아직 흐리말리와 시라디크의 음계 교본도 끝내지 못했지만요.”
“응? 그건 스케일하고 핑거링 연습용 교본이잖아. 기초 중의 기초에 들어가는 걸 왜 아직도······.”
“바이올린은 학교에 들어오고 시작해서요, 열심히 해서 언젠가 권제인 선배님이 작곡하신 곡들을 연주하고 싶어요······!”
이레나는 거의 숨도 못 쉬면서 권제인과 말을 나눴다.
“바이올린은 뭐 써?”
“저, 학교에서 받은 바이올린을 쓰고 있어요. 사용 중인 모델은······.”
황명 그룹이 인수한, 창립한 지 50년이 넘은 악기 전문 브랜드에서 발매 중인 모델 이름이 나왔다.
천만 원은 가볍게 넘어가는 모델이다.
현악기는 가격에 천장이 없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비싼 나무 공예품으로 취급받는 바이올린이니, 바이올린 중에서 비싸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이레나가 연습용으로 쓰기엔 아주 충분해 보였다.
‘황지호가 정말 ‘소리’엔 돈을 아끼지 않네.’
황명 재단의 돈지랄에 감탄했다.
그러나 권제인이 충격받은 얼굴로 이레나를 바라봤다.
“넌 플레이어잖아. 왜 이능으로 만든 바이올린을 쓰지 않니.”
이 말에 이레나와 김유리도 입을 떡 벌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이능으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은 많지 않다.
그것도 바이올린을 만들어 내는 장인은 현재 전 세계에 한 명뿐이다.
‘······이능으로 만든 바이올린은 플레이어카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리 황명 재단이 돈을 아끼지 않아도 비싼 건 수십억을 호가하는 이능 바이올린을 학생에게 거리낌 없이 사 주는 건 어려울 거다.
아니, 어떤 진족이 학생한테 그 비싼 이능 악기를 사다 바치는 이벤트가 있긴 했다.
‘생각해 보니 게임 속에서 은광고 연말 학생 연주 발표회에서 감명받은 진족이 학생에게 이능 악기를 선물했다는 묘사가 있었어.’
학생들의 대화에서 언급된 이벤트인 데다 그 직후 플마고 콘크리트 붕괴 사건의 계기가 된 사건이 터지기 시작해 존재감이 희미했었다.
권제인의 돌발 발언에 정신이 잠시 딴 곳으로 튀었을 때.
권제인의 저세상 화법에 이레나가 모범 답안을 내놨다.
“네? 하, 하지만 전 아직 바이올린을 시작한 직후라······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이능 바이올린도 연주해 보고 싶어요······!”
“······그래.”
잘했다, 이레나.
이레나는 대화가 완전히 끊길 위기를 멋지게 극복했다.
그러나 권제인의 돌발 행동은 더 심해졌다.
“이거 받아.”
권제인이 이레나에게 아이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카드에 그려져 있는 건 백금색의 바이올린이었다.
‘이능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카드 테두리를 보니 희귀도는 SSR급.
뒤에 +가 붙을지, -가 붙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처음 본 학교 선배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이유로 후배에게 턱턱 줄 법한 선물은 아니다.
‘권제인이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하다!’
경악한 우리 앞에, 권제인은 무심한 얼굴로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