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2화 (72/925)

20. 나비의 날갯짓 (4)

‘······잘못 봤을지도 몰라.’

아무리 다시 살펴봐도, 여전히 SSR급 이능 바이올린 아이템 카드가 내밀어져 있었다.

“왜 안 받는 거야?”

권제인의 목소리가 무겁게 깔린 침묵을 깼다.

이레나가 깜짝 놀라다 더듬더듬 말했다.

“······서, 선배님? 이 카드는 SSR급 이능 바이올린 아닌가요? 마, 마음만 감사히 받으면 안 될까요?”

“마음 말고도 바이올린도 감사히 받아 줬으면 하는데.”

“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가치가 큰 아이템이라. 부담이 좀······ 선배님이 쓰시는 게······.”

“······응? 부담? 난 희귀도 UR급 이상인 이능 바이올린만 쓰는데.”

권제인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권제인의 시선이 손에 쥐고 있는 카드로 향했다.

그녀는 김유리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이템 카드를 던질까 말까 고민 중인 것 같았다.

그걸 눈치챈 이레나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레나가 너무 떠는 탓에, 권제인은 김유리한테 한 것처럼 던져서 건네는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니?”

“그,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선배님, 저기, 그러니까······.”

“백금색 싫어해? 다른 색으로 준비할까?”

“좋아하는데, 그게 아니라······.”

권제인의 표정이 조금씩 침울하게 변해 갔다.

이레나가 이 아이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받지 않는다 생각하나 보다.

권제인의 기행 앞에 완전히 패배한 우리 셋이 굳어 있을 때였다.

“제인아, 아직도 후배들이랑 얘기 중이야?”

영원의 호수 팀 서브 마스터 재러드 리가 나타났다.

재러드 리는 게임 속에서 권제인의 돌발 행동의 수습을 담당하곤 했었다.

여기선 재러드 리를 이용해 이레나를 도와야겠다.

“권제인 선배님께서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권제인이 들고 있는 이능 바이올린 카드를 바라봤다.

재러드 리의 시선이 나를 따라 이동해 아이템 카드를 한 번, 떨고 있는 이레나를 한 번 바라봤다.

재러드 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제인아,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선물을 내밀면 부담스러워할 거야.”

“······그래?”

“게다가 아직 이 아이들은 어리잖아. 열일곱밖에 안 됐다고.”

“나는 열일곱 살에 이것보다 더 좋은 이능 바이올린을 켰는데.”

“······그건 그 마스터 크래프트맨이 네 연주를 듣고 직접 바이올린을 바치러 한국까지 와서 그런 거잖아.”

권제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재러드 리가 말려 줄 것 같다.

대화의 흐름을 고려해 봤을 때 이걸로 얘기가 잘 마무리되겠거니, 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럼 이 이능 바이올린을 받아 주겠니? 레나 양.”

“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건가.

재러드 리의 뜬금포가 안도하고 있던 이레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받아 주라. 제인이가 한국에 오랜만에 와서, 은광고 후배들 만나서 많이 들떠 있는 것 같아.”

그냥 많이 들떠 있다고 하기엔 도가 지나친데.

그 말을 듣고도 이레나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능 바이올린 아이템 카드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그걸 보며 재러드 리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인이 연주에 영향이 갈지도 몰라. 이상한 거에 집착하거든······ 오랜만에 하는 내한 공연인데, 어쩌지.”

이 말의 효과는 엄청났다.

이레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아이템 카드를 받았다.

자신 때문에 권제인의 연주가 잘못될까 봐 겁에 질린 모양이다.

“가, 감사합니다······.”

아이템 카드를 쥐고 있는 이레나의 손의 떨림은 멎을 기색이 없다.

지원 사격에 성공한 재러드 리는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권제인도 매우 만족한 얼굴로 웃고는 이번엔 나를 바라봤다.

설마 나한테도 폭탄을 던질 생각인가.

“이 후배한테는 아무것도 못 줬는데. 갖고 싶은 거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니?”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백지 수표를 주는 것 같은 발언을 했다.

‘권제인 성격상, 부탁하면 진짜 해줄 거다······!’

그걸 알고 있는지 재러드 리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나와 권제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까 능청스럽게 이레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권제인에게 부탁할 일이라. 이레나한테 하는 걸 보니 사양하면 더 일이 귀찮게 될 거다. 뭐든 부탁하자.’

게임 속에서 봤던 권제인의 모습.

이 세계에 있었던 일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들.

하나씩 떠올리며 고민하다 말했다.

“앙코르곡으로 ‘for LENA’를 연주해 주세요.”

오늘 수업종으로 실컷 들었던 곡이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제갈재걸을 구한 2학년 0반이 좋아하는 곡이다.

권제인은 그날 기분에 따라 앙코르곡을 정하니, ‘for LENA’가 아닌 다른 곡을 고를 가능성도 있었다.

라이브로 저 곡을 듣지 못하면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안 되겠는데.”

백금과 임페리얼 토파즈 액세서리, SSR급 정도의 이능 바이올린은 별생각 없이 내주면서 앙코르곡을 정하는 건 안 되는가!

다른 부탁을 떠올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권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오늘 공연의 앙코르곡으로 ‘for LENA’를 연주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곡을 연주해 봤자 네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니게 돼.”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뭔 생각을 하는지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제인아, 시간이 이제 없는데······.”

“······그래.”

권제인이 디바이스를 가동해 홀로그램을 전개했다.

홀로그램에 쓰여 있는 건 디바이스 코드였다.

유명인답게 회선을 여러 개 사용하는지 코드가 여러 줄이다.

“메시지는 확인 잘 안 해. 전화로 해. 세 번째나 네 번째 걸로. 부탁하고 싶은 거 생각나면 연락해. ······너희들도.”

권제인이 나를 한 번 보고, 그리고 권제인이 강제로 넘겨준 선물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김유리와 이레나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자, 제인아! 그럼 대기실로 가자. ······예비 액세서리가 있었나. 메이크업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이대로도 상관없는데.”

“안 돼. 코디네이터들 위에 구멍 난다! 네 연주회는 완벽해야 해!”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권제인의 괴상한 행동에 가장 피해가 적었던 나도 머리가 굳어 있는데, 김유리와 이레나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도 안 간다.

“저기, 무슨 일 있었나요? 권제인 선배님이 연주하시는 중엔 쉬어도 된다고 들어서 접이식 의자 가져왔어요. 스태프 대기실에 가면 관객석도 무대도 전부 보인대요!”

멈춘 듯한 시간을 움직인 건 접이식 의자 네 개를 들고 등장한 사월세음이었다.

지친 우리 셋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월세음을 보니, 겨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권제인 선배님이 오셨다 가셨어.”

“정말요? 조금만 더 일찍 올걸.”

“······세음이도 일찍 왔으면 휘말렸겠지? 하하하.”

“······네?”

사월세음은 아쉬움과 의문이 섞인 얼굴을 했다.

한편, 이레나는 아직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고, 김유리는 미묘한 얼굴을 하는 중이었다.

사월세음은 그런 두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우리에게 그사이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재잘거렸다.

사월세음이 다뤘던 무대 조명의 종류와 설치 과정에 관해 들으며 스태프 대기실로 이동했다.

사월세음의 말에 가끔 맞장구를 치면서도 머릿속엔 희미한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마음에 걸려.’

권제인의 행동, 발언,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했다.

그녀의 그저 변덕스러운 천재 예술가의 돌발 행동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홍규빈과 대화를 했을 때 느꼈었던 위화감과 비슷한데.’

아직 단서가 부족해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권제인은 악역도 아니니, 지금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에 의자 펴도 되나요?”

“그래. 편한 대로 앉아. 얘들아, 수고했다.”

“통로만 안 막으면 상관없어. 고생 많았다!”

스태프들의 허락을 받고 접이식 의자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외부에서는 그저 방음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특수 벽 뒤에 자리 잡은 스태프 석.

이곳에선 무대와 관객이 비스듬하게 전부 보였다.

‘권제인의 뒷모습,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은 게 아쉽지만.’

관객석보다 더 가까우니 연주를 감상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삐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러드 리의 신호로 스태프들 사이에 개막 콜이 짧게 울렸다.

권제인이 반주자와 함께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게 보였다.

‘결국, 헤어도 메이크업도 전부 다시 했구나.’

정돈한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목련 모티브의 머리핀을 착용했던 권제인.

이번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콘플라워 블루 사파이어가 장식된 티아라를 하고 있었다.

짝짝짝―.

권제인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아직 활은 들지 않고 푸른 바이올린의 몸체만을 들고 있었다.

관객의 박수가 멎자 권제인의 손가락이 현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경쾌한 피치카토가 홀을 울렸다.

관객으로 가득한 홀 사이로 바람이 흘러가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권제인이 발표한 곡 중에선 없었던 것 곡 같은데. 신곡인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반주자의 연주가 시작되자 권제인이 손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손에서 아이템 카드가 활로 구현화 되었다.

피아노 반주만 두 마디 정도 흘렀을 때, 권제인의 활이 현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을 켜고, 줄의 진동을 이용해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인데 이능파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관객 몇 명이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매너를 지키기 위해 감탄이나 환성을 누르려 한 걸 거다.

상쾌하고, 경쾌하게 바람이 흘러가는 것 같은 소리에 묻어나는 감상.

관객으로 온 사람도 진족도 모두 권제인이 만들어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와, 이거 신곡이죠? 이런 멋진 곡을 가장 먼저, 직접 듣게 되다니 꿈만 같아요······!”

“응. 미발표곡이야······ 오늘 오길 잘했다······.”

곡이 끝나자 사월세음과 김유리가 작게 감탄했다.

이레나는 이능 바이올린 카드를 꼭 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권제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황지호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권제인의 콘서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앙코르곡, ‘for LENA’의 연주까지 마치고, 무대 인사를 했을 때.

손바닥만 한 나비가 허공에서 나타나 천장의 조명 근처를 맴돌기 시작한 게 보였다.

‘나비다······!’

권제인이 마침 인사를 마치고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도 나비를 발견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파앗!

빛나는 나비는 비늘 조각, 인편(鱗片)으로 터져 나가며 사라졌다.

자음과 모음, 알파벳 모양의 빛 조각으로 변하다 사라지는 나비.

권제인이 그 나비를 보며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이 능력은 본 적이 있었다.

‘게임 속에서 접족, 나비령이 메시지를 보낼 때 사용하는 능력이다······!’

권제인은 나비를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나비가 접족 중에서도 나비령이었나 보다.

‘그런데 은광고 내부에 나비를 들여보내? 비록 아무 위해도 주지 못했고, 나비령의 광림을 고려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야. 나비령은 은광고 결계 시스템 분석을 이 시점에서 벌써 끝낸 건가.’

십이지의 수장도 아닌 나비령이 은광고 결계를 뚫고 내부로 메시지를 보낼 줄이야.

나비는 관객석에서는 보이지 않은 각도에 있었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감지한 30대의 황호가 눈을 황금색으로 바꾸고 불쾌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 나비가······.”

재러드 리도 나비를 발견했는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태프 석으로 권제인이 급히 들어왔다.

“재러드, 나비의 인편(鱗片)을 봤어.”

“인편? 비늘 조각 말하는 거지?”

“그래. 나비가 메시지를 남겼어. 뜻은 아직 모르겠지만.”

권제인의 푸른 눈이 이미 사라진 나비를 쫓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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