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중 이계 공략 (1)
1925년 대홍수로 인한 한강 흐름의 변화로 본류가 바뀌어 지류로 전락한 송파강.
그 송파강을 매립하여 만든 인공호수가 석촌호수였다.
석촌호수는 송파대로 잠실호수교를 사이에 두고 동호, 서호로 나뉘었다.
동호는 방이동 먹자골목과 가까웠고, 서호는 유명 대기업이 만든 테마파크의 인공섬을 품고 있어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석촌호수는 수십 년간 서울 시민에게 사랑받은 휴식과 놀이의 장이었다.
‘게임 속 세계에선 몇 년 전에 일어난 비극으로 아무도 찾지 않게 됐지만······.’
현재 시점 기준으로 몇 년 전.
석촌호수 서호, 테마파크의 인공섬 바로 근처에서 수중 이계가 생성되었다.
SR--급으로 판정된 미궁 하나.
팀 랭킹 중하위권에 속하는 프로 플레이어 팀도 단독으로 공략할 만한 난이도였다.
‘······여기서 안전 불감증이 문제가 됐어.’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건 남궁 그룹의 남궁물산 리조트 부문이었다.
그들은 이계 발생 직후 외부 인공섬의 어트랙션은 전부 운휴 처리하고 손님을 대피시킨 후, 내부 테마파크와의 연결 통로도 폐쇄했다.
그러나 내부 테마파크 운영은 중단하지 않았다.
‘상위에 랭크되는 팀이 와 주긴 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손님 전원을 테마파크 밖으로 대피시켜야 했는데.’
그날, 그 만약의 사태가 터져 버렸다.
수중 미궁을 공략하던 상위 팀의 공격대와 수비대가 전멸하고, 에너미는 내부 테마파크로 밀려 들어왔다.
그 자리에 손님으로 있던 플레이어 몇 명이 대처했지만 복잡한 구조의 테마파크에서 곳곳에 흩어진 시민들을 전부 지켜 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플레이어 협회의 지원이 왔을 땐 수백 명의 연인, 가족 단위의 희생자가 나온 이후였다.
그리고 이 지옥도로 변한 테마파크는 그 시각에 모노레일을 타고 인터넷 방송을 하던 인기 스트리머에 의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수많은 사람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스트리머는 중상을 입고 혼절하는 바람에 방송 중단이 불가능했고, 인방 중계 서비스 운영자가 신고를 받고 방송을 중단했을 땐 이미 늦었었어.’
이 사건으로 테마파크의 소유주였던 남궁 그룹의 남궁물산 사장의 목이 날아가고, 그날 운영을 강행한 수십 명의 책임자가 기소당했다.
남궁 그룹 총수가 직접 머리를 숙여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석촌호수에 위령탑도 세웠다.
거기에 더해 한 달간 테마파크 무료 입장이라는 초강수도 뒀다.
하지만 떠난 손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손님들도 담력 시험하는 기분으로 온 거라는 묘사가 있었지.’
왜 상위 팀이 고작 SR--급 미궁에서 전멸을 당한 건가.
지원을 온 협회와 프로 플레이어 팀들에 의해 그 수중 이계와 에너미들 아주 간단히 공략되었다.
그 공략 과정을 분석한 결과 플레이어SAT-K가 관측한 난이도에도 이상이 없던 것으로 판명되어, 그 상위 팀이 방심했다는 결론이 났다.
‘진짜 원인이 밝혀지는 건 앞으로 몇 달 후, 주수혁과 안다인이 해결할 퀘스트에서였지.’
1학년 2학기 시점에 발생할 사건이다.
1학년들은 2학기를 맞이해 올림픽 공원으로 첫 단독 이계 공략을 나선다.
그들은 근처에서 연이어 발생한 이계에 긴급 지원을 나서게 되는데, 거기에서 석촌호수 퀘스트가 시작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석촌호수의 비극의 전모가 드러나고, 마족이 이계 공략 최대 공헌자가 된 주수혁에게 눈독을 들이게 돼.’
나비령이 석촌호수, 그것도 동호를 지정한 건 그 퀘스트와 관련이 있을 거다.
‘석촌호수에 문제의 씨앗이 있는 걸 알고 있었는데, 쉽게 움직일 수 없었어······.’
석촌호수와 테마파크의 방문객이 줄었다고 하나 잠실역 주변은 여전히 유동 인구가 많아 흑막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가능성이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2학기 때 주인공 일행에 합류해 사건을 수습할 계획이었지만, 진족과 영원의 호수가 협력해 미리 대처한다면 더 일이 간단하게 해결될 거다.
‘계획 변경을 위해 몇 가지 준비해야 해.’
나비령의 메시지.
석촌호수.
진족의 도움.
영원의 호수.
게임 속의 이계 클리어 과정.
내가 가진 정보를 하나하나 조합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황지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나] 나도 간다. 내일 가기 전에 해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황지호] 뭔데?
[나] 내일 이사장 앞으로 올라갈 내 이름 들어간 서류에 사인 좀 해 줘.
[황지호] 알았다. 그거면 되냐?
무슨 서류인 줄 알고 바로 알았다 하는 거냐.
첫 번째 부탁은 쉽게 들어주리라 생각하긴 했다.
문제는 두 번째다.
[나] 월궁계도 쓰는 게 토족의 수장 맞지? 내일 석촌호수로 불러 줘.
[황지호] 싫은데.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칼같이 거절 의사가 담긴 답변이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옥토연의 디바이스 코드도 받아 두는 건데.
‘······다음에 옥토연을 만날 일이 있으면 코드를 받아 둬야겠다.’
포기하고 황지호와의 통신을 종료하려 했을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내 부탁 하나 들어주면 불러줄 수도 있어.
거래할 생각인가.
옥토연은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되니 철벽을 치기로 했다.
[나] 가호는 안 받는다.
[황지호] ㅡ.ㅡ그거 말고.
황지호가 이모티콘 쓰는 건 처음 봤다······!
[황지호] 이번 주말에 내 집에서 자고 가. 은호의 후예들하고 신수가 너랑 더 놀고 싶다고 나한테 투정 부린다.
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마다 후예들과 우리 올무가 서운해했다.
뒤에서 그런 투정을 부리고 있었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로 답장을 날렸다.
[나] 알았다.
[황지호] 그래. 후예들과 신수에게 미리 말해 두마.
이번 주말 계획은 확정되었다.
그러면 완벽한 주말을 위해서라도 모든 준비를 다 마쳐야겠다.
[나] 홍규빈 팀장님, 지금 바쁘세요?
다음으로 메시지로 보낸 건,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 홍보실 언론 1팀 팀장 홍규빈이었다.
[홍규빈] 아니! 괜찮아. 오늘도 초과 근무하긴 했는데, 예정보다 빨리 끝났어. 지금 집이야.
초과 근무 운운하는 걸 보니 야근을 하긴 했나 보다.
‘그래도 전보다 일찍 퇴근했어. 슬슬 최편득 추종자들이 일으킨 사건들도 수습되어 가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홍규빈에게 마음 놓고 다른 일을 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늘 빠르게 메시지를 날리던 홍규빈이 한 템포 느리게 답장을 보내왔다.
[홍규빈] 의신아, 나 오늘 다시 야근하러 가야 하니?
홍규빈 눈치가 귀신같다.
예지 스킬이라도 발동된 게 아닐까.
조금 빗나가긴 했지만.
[나] 아뇨.
[홍규빈] 다행이다^^; 내일부터 겨우 정시 퇴근 할 수 있게 됐어. 오랜만에 6시간 넘게 잘 수 있겠지. 행복하다! 그러면 무슨 부탁하려고 연락했어? 밥 사 줄까? 필요한 아이템이라도 있어?
홍규빈은 필사적으로 일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감 좋은 그는 내가 일 시키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홍규빈이 좀 불쌍해졌지만, 일을 안 시킬 수도 없었다.
[나] 오늘은 아니고 내일부터 야근하셔야 할 것 같아요.
[홍규빈] 아······.
[홍규빈] 그래······ㅠㅠ
홍규빈의 짧은 현실 도피가 끝났다.
텍스트에서 홍규빈의 절망이 전해져 왔지만, 모르는 척 내가 할 말과 인사까지 전부 마치고 메시지창을 닫았다.
* * *
다음 날 아침.
학생들은 곧 있을 스승의 날 준비로 들떠 있었다.
우리 1학년 0반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스승의 날 준비는 우리 반에 배정받은 예산 안에서 끝낼 거야. 학교 예산으로 카네이션을 사고 먹고 노는 거면 문제가 안 된대!”
반장 김유리의 제안에 따라 1학년 0반 일곱 명은 모두 이른 시각에 학교에 왔다.
전원 착하게 일찍 등교해 스승의 날 준비 회의에 참석했다.
“꽃 사러 갈 팀하고, 먹을 거 살 팀으로 나누자!”
김유리가 전개한 사다리 타기 애플리케이션으로 두 팀으로 나뉘었다.
꽃 팀, 김유리, 이레나, 맹효돈.
음식 팀, 나, 황지호, 한이, 사월세음.
“억, 난 꽃 잘 모르는데.”
“괜찮아. 같이 고르면 돼!”
“저기, 새벽 양재동 꽃시장에 직접 가서 고르고 싶은데······ 가 보지 않을래?”
“응.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꽃시장도 가자!”
맹효돈은 복잡한 심경인 것 같았지만, 김유리와 이레나의 기세에 밀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 앞에 있는 수제 빵집에서 케이크 예약받고 있대요! 카네이션 꽃 모양이 들어간 케이크 어때요?”
“예산에 여유가 있으면 에어 호텔 ‘스노우 앤 에어’나 ‘이카로스’에서 파는 한정 디저트도 사고 싶어.”
달토끼떡도 버리고 양식 외길만 걷고 있는 사월세음.
단맛 애호가 한이.
우리 쪽은 두 사람에 의해 계획이 척척 세워져 갔다.
“몇 인분 준비하는 게 좋을까. 선생님 것까지 8인분?”
“······다른 분은 안 올 것 같으니까요. 그냥 8인분으로 할까요?”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아니. 누가 올지도 모르잖아. 적어도 9인분은 준비하자.”
혹시 올지도 모를 민그린을 생각하며 말했다.
나처럼 줄곧 닥치고 있던 황지호가 눈을 반짝인 것 같지만 무시했다.
“응. 1인분 정도는 혹시 남더라도 다 같이 나눠 먹으면 되니까 9인분 사자.”
“네. 그럼 앱으로 예약 신청할게요!”
우리가 계획을 거의 다 짰을 때쯤 수업종이 울렸다.
오늘의 수업종은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 (Nessun dorma)’.
성악부와 합창부, 오케스트라부의 협연으로 녹음된 곡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칼라프가 달빛 궁전의 정원에서 부르는 아리아의 절정 부분과 죽음을 목전에 둔 투란도트의 부하들이 부르는 여성 합창이 섞인 파트가 흘러나왔다.
힘이 넘치는 테너의 아리아를 들으며 우리는 함근형이 오기 전에 제자리에 앉았다.
* * *
조례를 마친 후.
인적이 드문 1학년 건물 0반 쪽 출입구.
나는 함근형 선생님을 쫓아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함근형 선생님. 이 서류, 이사장님께 바로 올려 주실 수 있나요.”
내가 내민 건 미리 준비해 둔 ‘1학년 1학기 재학생 이계 공략 참가 신청서’였다.
은광고 교칙상 1학년 1학기에 재학 중인 학생은 이계 공략이 금지되어 있으나 담임과 이사진의 승인이 있으면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보통 이사진이 쉽게 허락해 주지 않지만, 황명호 앞으로 보내면 바로 통과될 거다.
“······알았다.”
함근형은 서류를 보고 잠깐 놀란 것 같았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또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인가.
오히려 함근형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 왔다.
“나도 가도 되니?”
함근형이 온다면 공략이 더 편해지겠지만, 이야기가 매우 복잡해질 거다.
아쉽지만 거절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그래······.”
함근형은 그 이상 묻지 않고 서류를 받아 들었다.
내가 함근형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15년 전에 너와 비슷한 녀석이 1학년 학생을 한 명 데려와 같은 서류를 내밀었다.”
나와 비슷한 녀석.
15년 전.
맹효돈 구출 전에 언급한 그 사람인 것 같다.
‘15년 전에 지익회를 만든 학생회장 얘기구나.’
함근형의 말에 따르면 15년 전 학생회장이 어느 1학년 학생과 이계 공략에 함께 가기 위해 그에게 이 서류를 내밀었나 보다.
“나는 그때 허락하지 않았다. 정 필요하면 나를 데려가라고 했지만, 그놈은 그러지 않았지.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다쳤어.”
그 옛날 학생회장은 대체 뭔 짓을 한 건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함근형은 그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치지 말아라.”
그 말을 남기고 함근형은 돌아섰다.
그가 셔츠 안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사인하는 게 보였다.
* * *
방과 후.
5월 중순의 일몰 시각은 약 7시 반.
해가 져 으슥한 호숫가.
나는 석촌호수의 동호, 나비령이 보낸 메시지의 좌표 바로 앞에 도착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