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2화 (82/925)

23. 출석률 50% (2)

주수혁의 방.

주수혁은 침대 위에 누워 홀로그램으로 일정표를 확인하다가 창을 거칠게 꺼 버렸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겠는데.’

최근 파티 참석 요구가 이어지는 중이다.

단순히 파티에 참석할 것을 권하는 게 아니었다.

어른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서 늘 같은 인물, 선도부의 부장인 3학년 오혜지와 동행할 것을 권했다.

이쯤 되면 주수혁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건 지금 도착한 이 메시지다.

[혜지 누나] 이번엔 너랑 같이 선상 파티 가라는데?

[나] TC랑 같이 준비하는 거요?

[혜지 누나] 응. 이번에 네 턱시도랑 내 드레스. 같은 곳에서, 같은 드레스 코드로 맞추게 할 생각인 것 같아.

[나] 진짜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주수혁은 깜짝 놀랐다.

‘공식 석상에서, 공적인 사이가 될 거라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의상 같은 건 경호원 겸 비서 역을 수행하고 있는 김철에게 전부 맡겨 둔 그였다.

‘그날 의신이랑 효돈이도 오는데!’

잘못하다간 학교 친구 앞에서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주수혁은 두통을 느꼈다.

[혜지 누나] 그날 일부러 샴페인 쏟아서 예비 드레스 입을 거야. 그 자리에 복구 이능 가진 플레이어 있으면 망하겠지만. 너도 만약을 대비해서 예비 턱시도 준비해.

[나] 넵!

[혜지 누나] 나도 가출하고 싶다.

[나] 미안해요, 혜지 누나.

[혜지 누나] 수혁이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노친네들이 노망이 나서 그렇지^^!

‘혜지 누나도 억지로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하는 건 싫을 거야.’

오혜지의 친언니, 오혜정은 주수혁의 육촌 형과 반강제로 약혼을 발표한 날 가출해 버렸다.

오혜정은 오혜지만큼 강하진 않았지만, 경호원을 때려눕히고 탈출할 만한 실력과 강단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는 약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던 홀 대기실에 날붙이로 크고 살벌하게 ‘지랄 마’라고 써 놓고 사라져 버렸다.

‘그땐 깜짝 놀랐는데.’

평소 언론을 피하고, 행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던 오혜정이었다.

한때 그녀의 행보를 두고 이능을 타고났지만 병약하다, 소심하다, 수줍음이 많다 등등의 낭설이 돌았었다.

하지만 그 약혼식장에서 남긴 세 글자, ‘지랄 마’를 떠올리면 그 소문은 다 가짜인 게 분명했다.

그간 오씨 가문에서 오혜정을 세간에 내보이지 않은 건 그 괄괄한 성격을 감추기 위함이었을 거다.

‘혜정이 누나 아직도 못 찾았나 보네.’

오혜정의 가출 계기가 계기인 만큼 공개적인 수색도 할 수 없고, 그녀의 얼굴도 알려지지 않아서 제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실 주수혁은 내심 오혜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서로한테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애하고 결혼하면 안 되나.’

그 생각까지 미치자 주수혁의 머릿속에 안다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다시 주수혁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속이 답답해서 가출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운 일탈 행위 정도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등교 거부자 민그린.

민그린이 게임 속에선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그녀의 정보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몰랐던 사실이 많아.’

수많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민그린은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은광고 교내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등교하는 게 싫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지금까지 보인 행적을 고려하면 그것도 아니야.’

민그린이 진심으로 학교에 오기 싫었다면 중간고사 때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

게임 속에서 항상 소꿉친구인 송대석과 함께 움직였던 민그린이었다.

중간고사 첫째 날 등장한 게 민그린뿐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민그린은 과거에 있던 사건 탓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가 있다는 묘사가 있었어. 그런데도 학교에 왔어. 나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인 거야.’

그래도 사람이 많으면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알 수 없음)] 기독 처리됐는데

[(알 수 없음)] 왜 답변이 없어?

[(알 수 없음)] 1학년 0반 부반장 디바이스 맞나요?

생각에 잠긴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답 독촉 메시지가 날아왔다.

‘메시지도 활발하게 보내고, 저번에 말을 걸었을 때 제대로 답변한 것도 그렇고. 1대1이나 소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거라면 문제가 없을지도 몰라.’

본인이 극복할 의지도 있고,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다.

‘민그린이 스승의 날 하루뿐이 아니라, 계속 등교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게임을 통해 알고 있는 민그린의 정보.

민그린의 트라우마.

1학년 0반.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떠올렸다.

‘······아주 단순하고 무식한 해결책밖에 안 떠오르는데.’

그래도 해 보고 망하는 게 나을 거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민그린이 언제 또 등교할지 모른다.

[나] 1학년 0반 부반장 맞아. 답변 늦어서 미안.

[나] 저번에 말한 대로 내일 등교하면 ‘인어의 숨결이 담긴 물방울’을 줄게.

[(알 수 없음)] 알았어. 몇 시에 가면 돼?

[나] 조례할 때 간단한 파티를 할 예정이야. 그때 와.

[(알 수 없음)] ······바로 집에 가면 안 돼?

여차하면 먹고 튈 생각이었나 보다.

[나] 안 돼. 적어도 조례 끝날 때까진 있어야지. 아이템 카드는 조례 끝나면 줄게.

한참 동안 답변이 없었다.

[(알 수 없음)] 아, 안 되는데······ 사람 너무 많은데 ㅜ_ㅜ······.

[나] 앞으로도 계속 등교할 생각은 없어?

[(알 수 없음)] 아, 사람 많아서 안 돼!

사람이 많아서 ‘싫어’가 아니라, 사람이 많아서 ‘안 돼’다.

그럼 그 ‘사람이 많아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주면 민그린이 계속 등교할지도 모른다.

[나] 내 조건을 하나 더 들어주면 조례 끝나기 전에 보내 줄게.

[(알 수 없음)] ······뭔데?

내가 조건을 하나 말하자 민그린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알았다고 답변을 보냈다.

민그린이 스승의 날에 끝까지 교실에 남아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기회는 얻었다.

‘그럼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쇼핑 다녀와야겠다.’

나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밤 쇼핑을 나섰다.

다행히 은광구 내에서 필요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 아직 영업 중이라, 먼 곳으로 원정하러 갈 일은 없었다.

*    *    *

스승의 날, 아침.

음식 조달을 담당한 나, 사월세음, 한이, 황지호는 아침 일찍 서문 앞에서 만났다.

“직접 여기에 방문하는 건 처음인데.”

교실에서 메뉴를 고를 때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황지호도 서문 앞 빵집의 단골손님인 것 같았는데.

여태까지 부하를 시켰거나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는지 직접 가는 건 처음인 듯했다.

“저는 이틀에 한 번은 와요!”

“나도.”

“다음엔 같이 갈래요? 혼자 먹기엔 좀 큰 빵도 있어서······ 반반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사월세음과 한이가 밝게 웃으며 약속을 잡았다.

이틀에 한 번씩 오고 있었다니, 그렇게 자주 오는 줄은 몰랐다.

“사람 많다.”

“거의 다 우리 학교 사람들 같은데.”

“예약하고 오길 잘했네요.”

예약 줄과 일반 줄로 나뉘어 사람들이 빵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광구 유명 맛집 중 하나, 서문 앞 수제 빵집 ‘MITRON’.

빵집 이름은 프랑스어로 ‘빵집 조수’를 의미했다.

‘맛과 평판에 비해선 굉장히 겸손한 이름이네.’

우리 넷은 예약 줄에 섰다.

일반 줄과 달리 예약한 빵과 케이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서 있는 예약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빵집 안으로 들어가자 갓 구워진 빵과 쿠키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어서 오세요. 은광고 1학년 0반 학생들이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파티시에 복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단골인 사월세음과 한이와는 면식이 있는지 서로 간단히 안부도 묻고 있었다.

‘MITRON의 파티시에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내가 가끔 빵 사 먹으러 올 땐, 계산대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추정되는 사람만 있었다.

시간대가 맞지 않았던 걸까.

“음······.”

“왜 그러냐.”

황지호가 불길하게 눈을 반짝이며 파티시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족의 가호를 강하게 받은 것 같은데. 누구지.”

수제 빵집 ‘MITRON’의 주인인 파티시에는 유명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러니 진족의 가호를 강하게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거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가요!”

“응. 가서 세팅해 두자.”

사월세음과 한이가 계산을 마치고 우리 쪽으로 왔다.

황지호는 진족의 가호를 강하게 받았다는 파티시에를 좀 더 관찰하고 싶은 눈치였다.

황지호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억지로 잡아끌고 1학년 0반 교실로 향했다.

*    *    *

1학년 0반 교실.

카네이션을 담당한 팀은 함근형의 옷에 달아 줄 꽃과 꽃바구니를 따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새하얀 바구니에 담긴 붉은 카네이션과 카네이션 사이사이를 채운 안개꽃, 편백이 보였다.

꽃바구니에는 벨벳 리본이 묶여 있고, 그 옆엔 푸른 활과 화살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함근형 선생님의 광림은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 이명은 창천명궁(蒼天名弓)이니 이 장식을 선택했구나.’

꽃바구니에 처음부터 활과 화살 모양의 장식을 달아서 파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건 따로 샀을 거다.

“이 장식은 남대문 액세서리 부자재 상가에서 샀어!”

내가 활과 화살 모양 장식을 빤히 바라보니 김유리가 웃으며 말해 줬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남대문 상가까지 멀지 않았어?”

“택시 타면 40분 정도밖에 안 걸려.”

충분히 오래 걸리는 거 같은데.

“남대문 시장 구경하는 거 재밌더라.”

“응! 신기한 거 많더라. 필요 없어도 사고 싶은 게 많아서······.”

“레나는 바이올린 모양 패치랑 장식품만 열 개 넘게 샀어. 나도 목련 모양으로 몇 개 사긴 했지만.”

“으······ 조금 많이 사긴 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책상을 옮기던 맹효돈과 이레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식 조달팀과 비교하면 시간은 많이 들였지만, 그래도 셋이 재밌게 놀다 온 거 같아 다행이다.

책상 배열을 마치고 케이크 세팅까지 끝내고 나니, 민그린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민그린이 오기 전에 아이들에게 부탁할 게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부반장 또 수상하게 웃고 있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맹효돈이 반 아이들의 시선을 모아 버렸다.

“하하하하!”

“의신이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저 ‘수상하다’라는 수식어에 아무도 반박을 안 해 주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할 말을 했다.

“부탁이 있어.”

나는 어제 산 물건들을 1학년 0반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    *    *

비교적 한산한 0반 쪽 1학년 건물 출입구.

계단 쪽 그늘에 숨어 있던 민그린이 내가 온 것을 보고 주변을 경계하다 걸어 나왔다.

오늘도 도수 없는 뿔테 안경에 후드 점퍼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차림새다.

‘저 종이봉투는······ 함근형한테 줄 선물인가.’

민그린은 A4 용지 사이즈 정도 되는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 왔는데. 네 말대로 해 보고 안 되면 그냥 바로 집에 갈 거야. 그렇게 되면 아이템 카드는 플레이어 전용 우편으로 보내.”

민그린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온 모양이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짜지? 안 주면 함근형 선생님께 이를 거야!”

민그린은 내 생각보다 함근형과 사이가 좋은가 보다.

그렇다면 내 단순무식한 책략은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네가 우리 반 교실에 한 번 들르기만 해도 아이템 카드는 줄게.”

내 뜬금없는 제안에 크게 따지지 않고 바로 응해 준 1학년 0반 애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 반 애들을 봐도 괜찮을 거야.”

나는 어젯밤에 사 둔 아이템을 민그린에게 내밀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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