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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3화 (83/925)

23. 출석률 50% (3)

민그린은 내가 건넨 아이템을 군말 없이 착용했다.

민그린은 1학년 0반 교실 문 앞까지 왔지만, 머뭇거리며 들어가지 못했다.

중간고사 때 민그린 기준으로 사람이 많았던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들어가면 아이템 줄게.”

“아, 알았어!”

민그린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교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사이 나는 디바이스를 가동해 사전에 준비한 세팅해 둔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쉬이익―!

교실 문이 열리고, 긴장한 얼굴로 안을 둘러보던 민그린이 입을 떡 벌렸다.

놀라긴 한 것 같지만, 민그린은 도망가지 않았다.

“어, 이건······ 사부님 화실이잖아!”

내가 민그린에게 건넨 건 AR 글래스였다.

AR 글래스는 디바이스와 동기화하면 안경 유리알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섞어서 보여 주는 기기다.

지금 민그린은 얼굴을 감추기 위해 꼈던 도수 없는 뿔테 안경 대신, 안경 형태의 증강현실 기기를 착용 중이다.

‘민그린을 붙잡기 위해선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좋을 거야.’

민그린이 이전엔 도망쳤던 교실보단 그녀의 스승, 홍경복의 화실이 더 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 디바이스로 연동한 AR 글래스는 우리 반 교실이 홍경복의 화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민그린이 한국 미술계를 뒤흔들던 시절, 언론에 두 사람이 작업 중인 화실의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어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홍경복의 화실과 교실의 크기도, 구조도 다르니 완벽하지는 않지만······.’

교실 책상은 옻칠한 원목 탁상처럼 보이게 바꾸고, 교실 벽 여기저기에는 홍경복과 민그린이 남긴 그림을 장식했다.

비어 있는 책상 위에는 한지, 벼루, 분채, 석채, 채묵, 바탕천에 물 아교와 금분이 담긴 병을 구현했다.

내가 구성한 필터가 적용 중인 AR 글래스를 끼고 보면 1학년 0반 교실은 화실로밖에 안 보일 거다.

준비한 건 배경 필터 외에도 더 있었다.

“진짜 오셨네요!”

“중간고사 때 왔던 걔네.”

“와, 얘가 그린이구나!”

원형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1학년 0반 아이들이 보였다.

민그린을 제외하면 이제 교실에 있는 인원수는 총 일곱이 되었다.

민그린 기준으로 많은 사람이 교실에 있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민그린은 도망가는 대신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닭······ 돌멩이······ 바이올린······.”

민그린이 사월세음, 맹효돈, 이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뭐?”

“아, 의신이가 준 ‘마커’에 설정한 필터를 말하는구나!”

이레나의 말이 정답이다.

움직이지 않는 배경과 달리, 움직이는 사람을 AR 기기가 실시간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바로 필터를 씌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보완해 주는 기술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그게 ‘전용 마커’다.

‘어젯밤에 AR 글래스와 전용 마커를 파는 가게가 일찍 문을 닫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커는 사람의 얼굴로 지정할 수도 있지만, AR 글래스의 카메라에 그 얼굴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을 때는 마커를 인식하지 못해 필터가 해제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민그린이 패닉을 일으키겠지.’

이 세계에선 AR 글래스나 디바이스가 전자 인식이 가능한 전용 마커를 사용하면, 그 마커에 맞춰 가상 정보를 덧씌울 수 있었다.

즉, 반 아이들이 미리 배부한 마커를 착용하고 있으면 AR 글래스가 항상 반 아이들을 내가 지정한 필터를 덧씌운 상태로 보이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야! 돌멩이가 뭐야, 부반장!”

“닭이라니, 어째서······.”

참고로 우리 반 아이들은 삼등신 정도 되는 솜인형으로 통일한 상태다.

솜인형에는 특별히 홍경복 화실에서 쓰는 앞치마를 입혀 뒀지만, 그 외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최소한 구분은 하라고 솜인형 얼굴 위에 사진이 붙어 있는 형태로 보이게 설정해 뒀다.

그 얼굴 위에 붙은 사진, 사월세음이 닭이고 맹효돈이 돌멩이였다.

“배경에 너무 신경 쓰느라 디자인할 시간이 없었어.”

어차피 사람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린아, 나는 뭐로 보여?”

“나도 봐줘.”

곧 민그린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였다.

민그린은 당황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답변해 줬다.

그녀의 눈에는 솜인형들이 몰려와 말을 거는 모양새니,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나 보다.

“그러니까, 쟤는 닭, 얘는 돌멩이, 그리고······.”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의 솜인형에 붙여 준 사진은 각각 이랬다.

사월세음, 닭.

맹효돈, 돌멩이.

이레나, 바이올린.

황지호, 호랑이.

김유리, 목련.

한이, 케이크.

마지막으로 나, 체스 피스.

“저기, 저는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뭐야! 왜 우리 둘만 이래!”

황지호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은 전부 자기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해 문제가 없었지만, 사월세음과 맹효돈의 반발이 심했다.

두 사람이 뭐라 하는 사이, 다른 여자아이들과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 중인 민그린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시각 정보를 조작한다는 무식한 작전이 먹혔어. 다행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그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신체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인기피증, 사회공포증은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야. 눈앞에 사람이 많이 있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반응해 버리니까.’

‘누군가가 있다’라는 시각 정보를 받아들인 뇌가 시상하부, 뇌하수체를 거쳐 호르몬, 아드레날린을 과도하게 생성하게 만들어 신체에 이상을 부른다.

동공은 확장되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혈압은 상승하고, 긴장한 근육 탓에 손과 발은 떨리고, 속도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질 것이다.

그 결과 의지로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고, 도망을 택하거나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게 보통이다.

‘민그린의 근본적인 트라우마 완치는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하지만 민그린에게 극복 의지가 있다면 도움을 주는 건 가능할 거야.’

민그린은 중간고사 날,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쪄 있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고 도망쳤다.

즉, 그 자리에서 문제가 된 건 눈에 보였던 사람의 숫자다.

그렇다면 먼저 시각 정보를 조작해서 뇌를 속이면 되지 않을까, 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이 세계의 기술 수준으로도 가능했다.

“그린아, 단거 괜찮아? 설탕 안 넣은 생강 쿠키도 준비하긴 했는데.”

“······단거 잘 먹어.”

“그러면 리에주 와플 먹을래? 펄 슈가가 반쯤 녹아 있을 때가 제일 맛있어.”

“고, 고마워······.”

민그린이 손을 뻗어 김유리가 내민 와플을 받아들었을 때, 교실 문이 열렸다.

쉬이익―!

아직 수업 종이 울리기 전인데, 함근형이 벌써 와 버렸다.

아이들이 스승의 날 파티를 준비한다는 걸 숨기지 않아서 그런지 조례 때 시간 여유를 두려고 일찍 온 것 같았다.

함근형이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민그린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여덟 명이구나.”

“네. 의신이 덕분이에요!”

김유리가 대표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함근형에게 전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마커를 줄 때 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민그린이 중간고사 때 남긴 말을 들었을 땐, 낯을 많이 가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AR 글래스와 마커를 활용해 민그린이 학교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자, 라고.

“그래······ 그랬구나.”

설명을 들은 함근형이 아이들이 착용한 배지 형태의 마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험상궂은 얼굴로 웃던 함근형이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근형 나름의 칭찬인 거 같다.

“저, 여, 여기. 선물요!”

함근형의 말이 끝나자, 민그린이 함근형 앞에 달려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민그린이 내민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는 건 카네이션 그림이 그려진 한지였다.

한지에는 검은 먹선으로만 표현된 야생 카네이션이 그려져 있었다.

세필로 묘사된 섬세한 잎과 대담하게 그려 낸 줄기에서 생기가 넘쳤다.

“직접 그린 거냐? 와!”

“완전 잘 그렸다······!”

“우와,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그림 같아!”

방구석 폐인으로 살았던 민그린이라 좋은 재료를 사용하진 못했지만, 그림에는 그녀의 재능과 정성이 가득했다.

“고맙다, 민그린.”

함근형은 아주 밝게 웃으며 그 그림을 받아들였다.

한국 미술계의 신동이 그린 그림이라 가치가 너무 커 받을 수는 없어, 여전히 민그린의 소유인 상태로 교실에 장식해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러면 스승의 은혜 부르고 케이크 자릅시다!”

김유리가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들고 함근형 옆에 서며 말했다.

스승의 은혜 노래를 다 같이 부른 후, 다과회를 시작했다.

중간에 민그린이 도망가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끝까지 앉아서 우리와 함께했다.

“대석이 아닌 애랑 이렇게 먹고 얘기한 거······ 오랜만이다.”

민그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스승의 날.

우리 반은 등교생이 여덟 명이 되어, 출석률 50%를 달성했다.

*    *    *

점심시간.

1학년 전용 산책로의 벤치.

점심을 먹은 후, 후식으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민그린은 앞으로 오전 시간에는 등교하겠다고 했으니까, 출석률 50%는 달성한 셈이야.’

민그린은 1학년 0반이 다 같이 듣는 공통수업, 오전 수업 시간에는 등교하겠다고 말했다.

등교 기념 선물로 AR 글래스와 약속했던 ‘인어의 숨결이 담긴 물방울’도 줬다.

AR 글래스는 자기 돈으로 사겠다고 말한 민그린이었지만, 가격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민그린은 미안해하며 원하는 그림을 하나 그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팔면 AR 글래스는 몇 개는 사고 남을 텐데.’

물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려 준 그림을 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민그린이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고 나면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해.’

민그린이 그려 준다는 그림은 나중에 그녀가 AR 글래스를 벗고 등교할 때까지 받지 않을 예정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캔커피를 전부 마셨을 때,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린이랑 점심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식당에 사람이 많아서 안 되나 봐.”

“다음엔 테이크아웃 해서 밖이나 교실에서 같이 먹자!”

“그래!”

이레나와 한이, 김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점심시간까지 민그린을 붙잡아 두는 것에 실패했나 보다.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민그린도 저 셋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될 거다.

“난 오늘 에너미학개론 미니 테스트가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응, 종례 시간에 봐!”

“나중에 보자, 한이야.”

한이는 손을 흔들고는 종종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한이와 함께 듣는 공청훤 선생님의 에너미학개론.

그러고 보니 오늘 미니 테스트가 있었지.

‘나도 미리 교실로 가서 한이랑 복습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캔커피에 남은 커피를 빨리 마시려고 했다.

캔커피를 전부 마시기 전, 우리 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의신이다!”

“잘됐다, 의신이한테 메시지 보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나한테 할 말이 있었나 보다.

벤치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를 향해, 김유리와 이레나가 다가왔다.

“있잖아, 의신아. 부탁할 게 있는데.”

무슨 부탁인지 몰라도 티켓팅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랑 레나랑 효돈이. 셋이서 꽃시장 돌아다녔잖아? 그런데 효돈이는 꽃에 그리 관심이 없어 보여서, VR 게임방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었는데······.”

김유리가 카네이션 조달팀이 겪었던 일을 말해 줬다.

김유리의 눈에도 맹효돈은 밤샘 꽃시장 구경에 지쳐 보였나 보다.

김유리는 맹효돈을 배려해 다른 곳에서 쉬라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맹효돈은 주저하다 계속 따라다니겠다고 답했다 한다.

“알고 보니까 효돈이도 따로 카네이션 사고 싶었나 봐. 나중엔 우리보고 뭐 살지 도와 달라고 했어. 중학교 선생님께 드릴 거라고 하더라.”

맹효돈의 중학교 시절, 선생답게 군 교사는 3학년 때 수학을 담당하던 담임밖에 없었다고 맹효돈이 말했다.

그 점을 고려하면 선생님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그분밖에 없을 거다.

“꽃바구니도 하나 사고, 남대문 부자재 시장에 같이 가서 수학 기호 모양 장식품도 사서 달아 뒀는데······ 전하러 갈지 말지 망설이는 거 같아.”

“맞아. 교실 사물함에 꽃바구니 넣어 두긴 했는데, 그 중학교나 선생님껜 연락도 안 한 거 같아.”

“이대로라면 스승의 날에 효돈이가 카네이션 못 전할 거야.”

맹효돈은 카네이션까지 산 주제에 망설이는 건가.

‘여태까지 스마트폰 하나 없는 맹효돈이 그 중3 담임의 연락처를 알 리도 없고······ 좋은 추억은 쥐뿔도 없는 학교에 연락하긴 더더욱 싫겠지.’

그렇다고 직접 찾아가자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거다.

‘수업 끝나고 가면, 맹효돈의 중3 담임이 야간 당직이라도 아닌 한 퇴근하고 없을 텐데.’

중학교는 고등학교보다 수업이 일찍 끝난다.

맹효돈이 망설이는 사이, 방과 후가 되면 오늘 카네이션을 건넬 기회를 놓칠 거다.

“의신아, 네가 효돈이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내가 직접 돕고 싶긴 한데, 효돈이는 나랑 레나를 어려워하는 거 같아서······.”

김유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남고생 맹효돈은 아직 두 사람과 제대로 말도 못 섞나 보다.

‘돌머리 맹효돈이 수학을 고를 정도로 존경하는 교사인 거 같은데, 오늘 카네이션을 못 주면 후회하겠지.’

맹효돈의 중학교.

맹효돈의 습관.

오늘 수업과 남은 시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왔다.

티켓팅과 달리 이번 일은 쉽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공청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한이야, 미안하다.’

오늘 오후 수업인 에너미학개론은 또 빠지게 생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내 대답에 김유리와 이레나가 안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와, 고마워!”

“다행이다.”

갑자기 두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다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왜 저러지.

“있잖아······ 의신이가 그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안심돼!”

내가 또 그 수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    *    *

어떻게 맹효돈을 끌고 갈지 계획을 세우고 교실로 이동할 때였다.

벚꽃이 다 진 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인적이 드문 벚꽃길에서 청승을 떨고 있는 인물을 하나 발견했다.

‘주수혁?’

주수혁이 나무에 기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건 안다인하고 잘 안 될 때 짓는 표정인데.’

국민망겜 고인물인 나는 바로 알아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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