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7화 (87/925)

24. 무박 2일 (1)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간.

현재 은광구에서 문을 연 상점 중 가장 평판이 좋은 곳은 서문의 수제 빵집, ‘MITRON’.

사과의 의미로 사는 추가 선물은 여기서 준비하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에도 줄을 서네.’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디바이스를 확인해 보니, 마침 새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메시지가 올라오는 건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유상훈] 야

[유상훈] 이거 장남욱임?

[유상훈] (기사 링크)

‘장남욱이 기사에 나올 짓을 했나?’

바로 기사 링크를 눌러 확인해 봤다.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1학년, 스승의 날 깜짝 매스게임]

헤드라인 아래, 기사 본문에는 동영상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생도들이 수백 명이 찍혀 있는 섬네일이 보였다.

‘숫자를 보니 1학년 생도들 전원이 있는 거 같은데. 그리고 이건······ 장남욱이잖아.’

예복을 갖춰 입고 줄을 선 사관생도.

가장 앞에 서서 생도들과 마주 보고 있는 게 장남욱이었다.

[장남욱] 그래, 맞아. 저거 나다.

[유상훈] ?

[장남욱] 스승의 날 행사로 1학년들이 준비한 이벤트였어. 시후가 옛날 자료를 보다가 갑자기 하자고 해서.

장남욱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도시후를 중심으로 사관학교 고등부 1학년 생도들은 단합이 잘된다고 한다.

그들은 단체로 스승의 날 이벤트를 기획하던 중 매스게임에 꽂힌 모양이었다.

‘매스게임은 규모에 따라선 준비 기간만 1년이 넘게 걸리는데. 지금은 군대에서도 의장대나 하는 거 아닌가.’

10년 전까지만 해도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생도들은 열외 없이 매스게임에 참여해야 했다.

전투력 향상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되지만 혹독한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게 매스게임이다.

매스게임 하기 싫어서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지원을 안 한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 널리 퍼진 후에야 사관학교를 졸업한 스타들이 총출동하여 매스게임을 폐지했다.

‘그걸 자발적으로 하나. 얘들도 선생님하고 사이가 좋나 보네.’

처음엔 자발적으로 할 사람만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만에 고등부 1학년생도 전원이 모였다고 한다.

[유상훈] 왜 도시후가 지휘 안 함?

[장남욱]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기획은 도시후가 했지만, 꼼꼼하고 잔소리 잘하는 장남욱이 매스게임 지휘에 어울리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장남욱이 어떻게 했나 볼까.’

새 창을 열어 동영상을 재생해 보니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장남욱의 구령이 울렸다.

구령이 변할 때마다 흐트러짐 없이 이름을 하나씩 만드는 카드섹션이 인상적이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수백 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현재 재직 중인 모든 고등부 교사들의 이름을 표현한 거구나.’

마지막으로 나온 건 카네이션과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휘장이었다.

카네이션과 휘장을 표현하고 군악대의 연주가 멎자, 연병장 사열대에 앉아 있던 교사들이 열성적으로 기립 박수를 쳤다.

사열대에는 사관학교 근무복을 입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정중앙에 정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정복에 달린 계급장을 보니 아직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계급장에 별이 있잖아! 스승의 날이라고 방문한 장성도 있나.’

장성들 앞에서 안 쫄고 실수 없이 매스게임을 끝낸 것만으로도 손뼉을 쳐 주고 싶다.

장남욱의 채팅에 힘이 빠져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고생 많았다, 잘 먹고 푹 쉬어.

정말 고생 많았다, 장남욱.

[유상훈] ㅅㄱ

장남욱이 한 수고는 고작 저 자음 두 자로 끝낼 수고가 아닌데.

[장남욱] 그래, 의신아, 상훈아, 고맙다. 요새 잠을 못 자서 조금 더 자야 할 것 같아. 교관님이 점심시간에 시후랑 정복 입고 오라는데 그 전까지는 자려고.

장성들의 기립 박수를 받은 다음 날, 매스게임 기획자와 지휘자를 정복 차림으로 불러낸다고?

장남욱이 점심시간에 누구와 밥을 먹게 될지 짐작이 갔지만, 장남욱의 숙면을 위해 닥치기로 했다.

단체 메시지방 창을 닫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도시후가 장남욱을 배려해 준 건 아닐까.’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잠실야구장 사건 때 활약을 전혀 못 한 장남욱은 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도시후가 매스게임 지휘를 떠넘긴 건 그런 의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뭐든 성공해 낸 경험은 자신감을 찾아 준다.

도시후는 그저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서 오세요. 그때 1학년 0반 학생들과 같이 온 분이죠?”

“네, 안녕하세요.”

내 차례가 되어 계산대 앞에 섰다.

전에 본 파티시에 복장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황지호가 ‘진족의 가호를 강하게 받았다’라고 말한 그 유명 플레이어다.

‘그날 온 걸 기억하고 있는 건가. 오늘은 교복도 안 입었는데 알아보다니.’

플레이어답게 기억력이 좋나 보다.

내가 고른 건 여섯 가지의 맛이 담긴 크렘 브륄레 세트.

제철인 망고와 딸기, 앵두로 만든 소르베 아이스크림 케이크.

이 두 가지였다.

“선물하시는 건가요?”

“네, 포장 부탁드려요.”

파티시에 플레이어가 웃으며 포장까지 마쳤다.

인사를 마치고 드라이아이스가 들어 있는 선물 상자를 들고 빵집 밖으로 나오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시에가 계산에 선물 포장까지 하나?’

그것도 주말 아침에.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    *    *

은광구에 있는 황명호의 대저택.

황금 담장과 미로 정원을 지나 도착한 이곳.

눈을 반짝이는 황지호가 제일 먼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 조의신. 늦었구나.”

아직 오전 9시도 안 지났다.

오히려 이 이른 시각에 남의 집에 방문하는 건 실례다.

그런데도 황지호는 굳이 ‘늦었다’라고 표현했다.

얄밉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의신이 오빠, 안녕하세요! 늦으셨네요!”

“의신이 형이다! 어제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의신 형, 안녕하세요.”

섭섭함 반, 반가움 반이 담겨 있는 삼 남매의 인사말이었다.

“미안해.”

이럴 때 변명하면 아이들 마음만 상할 테니 그냥 사과만 했다.

끄응…….

사과를 해야 하는 대상은 삼 남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올무는 내 얼굴은 안 보고 그냥 발치에 와서 고개를 숙인 상태로 머리를 비벼 댔다.

와서 반갑긴 한데, 어제 안 온 게 서운하다는 의사 표현인 것 같다.

“미안해, 올무야.”

몸을 낮춰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손을 밀어내지는 않으니 올무가 용서해 줄 때까지 쓰다듬어야겠다.

한참을 쓰다듬기를 반복하고.

황지호가 하, 하고 혀를 한 번 차는 소리가 들렸을 때쯤.

왕.

올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작게 짖었다.

올무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용서해 주는 것 같다!

감격에 차 올무를 안아 들었다.

“고맙다······. 역시 착하구나, 우리 올무!”

왕왕!

올무가 평소처럼 또렷한 소리로 내 말에 응했다.

기쁘기 그지없다.

“조의신, 너는 신수를 앞에 두면 지능이 급격히 떨어지는구나.”

나와 올무가 화해하는 감동의 순간에 황지호가 헛소리를 했다.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백호군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는 올무와 은호의 후예 삼 남매에 모두 투자하기로 했다.

내가 사전에 후예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은 VR 게임기와 소프트웨어였다.

전부 똑같은 것으로 세 개씩 준비해 줬다.

‘세 개 있어야 싸우지도 않고, 멀티플레이도 같이 하겠지.’

삼 남매는 처음엔 사용법에 익숙해지지 못해 헤맸지만, 금방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건 ‘VR 테마파크’였다.

‘정말 유원지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셋이서 놀이기구를 하나 타고 나면, 바로 VR 기어를 벗곤 열심히 감상을 말해 줬다.

그걸 보던 황지호가 한마디 하는 게 들렸다.

“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인수를 끝내야겠군.”

조만간 서울시에 있는 남궁물산 테마파크의 소유주가 황명 그룹으로 바뀔 것 같다.

“VR 기어 더 없나요? 황호 님이랑 의신이 형이랑도 같이 타고 싶은데······.”

“신수는 VR 기어 못 끼죠? 같이 타고 싶다······.”

“진짜 놀이공원도 가고 싶어요!”

아쉬워하는 삼 남매를 보니 황지호의 심정이 바로 공감이 갔다.

똑똑한 우리 올무도 무슨 이야기 중인지 이해하고 내 품에서 애교를 부려 댔다.

왕왕!

올무 선물로는 산책 갈 때 기분에 따라 고르라는 뜻에서 다양한 디자인과 색의 리드들, 찬 바닥에 앉지 말라고 전용 매트 등을 준비했다.

시험 삼아 앉아 보라고 매트 위에 올무를 잠깐 내려놨는데, 끙끙거리며 바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은 내 품에 있고 싶었던 거다.

왕······!

머리를 기대 오는 올무를 보니 황지호의 돈지랄이 별거 없게 느껴졌다.

있는 놈이 쓴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래, 아무 문제 없다.

“빨리 사라.”

“그래.”

황지호가 하루라도 빨리 테마파크를 사서, 다 같이 놀러 갔으면 좋겠다.

*    *    *

시간은 금방 흘러, 밤.

미로 정원에 나가 달을 보며 티타임을 가진 후,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의신이 형이랑 같이 자면 안 돼요?”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얘기할 거 많이 남았는데······.”

셋은 파자마 차림에 베개를 품 안에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귀엽지만 안 된다.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할 때, 황지호가 선수 쳤다.

“안 돼.”

황지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후예가 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주는 쉬운 진족이지만,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조의신은 열일곱이고 이호, 넌 열여섯이다. 그런데 같이 잔다고? 허락할 수 없다.”

황지호가 오래간만에 이 나라의 국교가 유교인 시절을 겪은 놈다운 소리를 했다.

“그럼 이호 누나는 딴 데서 자. 대신 나랑 서호 형은 의신이 형이랑 같이 자야지!”

“아, 너희만 치사하게! 안 돼!”

“자라. 일찍 자고 일어나서 조의신과 얘기하면 되잖아.”

결국, 은호의 후예 삼 남매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한테는 조른 적이 없는데.”

황지호가 쓸쓸하게 들리는 코멘트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손님방에 남았다.

물론 혼자 남은 건 아니다.

왕왕!

“그래, 올무야. 팔베개해 줄게!”

우리 똑똑한 올무는 내 말을 바로 알아듣고 내 팔을 꼭 끌어안았다가 머리를 기대 왔다.

올무의 따뜻한 체온에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올무가 내 볼을 핥고 있었다.

끄응······.

“올무야? 왜?”

왕!

내가 눈을 뜨자 올무가 안심한 표정으로 짖었다.

왜 그러는 거지?

“그래그래, 알았어. 자자.”

다시 올무를 고쳐 안고 잠에 빠지려 할 때.

올무가 다시 나를 깨웠다.

왕, 왕왕······!

올무는 매우 불안해했다.

올무가 왜 이러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잠들려 하면 올무가 깨우고, 졸다가 깨어나는 걸 몇 번 반복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백호군이었다.

희미하게 밝힌 복도 조명 덕에 백호군의 실루엣은 확실히 보였지만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보나 마나 무표정이겠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위압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왜?”

계속 자다 깬 탓에 조금 쉰 목소리로 물었다.

백호군이 나와 올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왕왕······! 왕!

올무가 백호군을 보고 작게 짖었다.

백호군은 올무가 짖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백호군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백호군이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있었나.

나도 시간을 들여 고민해 봤지만, 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답은 하기로 했다.

“괜찮아.”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있어도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내 말에도 백호군은 답이 없었다.

백호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끄응······.

그때, 올무가 기운 없는 소리로 끙끙거렸다.

‘아, 올무 잠버릇이 안 좋아서 사과하는 건가.’

은호의 후예들이 올무는 백호의 침소에서 머문다는 말을 했었다.

백호군이 올무를 손님인 나에게 맡겨 버린 모양새가 됐으니, 사과할 법했다.

우리 올무가 나한테 어떤 투정을 부려도 괜찮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려 할 때.

“누군가 왔다.”

백호군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호군보다 조금 늦게 올무도 귀를 쫑긋 세우며 백호군과 같은 곳을 바라봤다.

“가자.”

나는 올무를 안아 들고 슬리퍼를 신었다.

황지호가 있는 저택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너희도 왔군.”

현관.

황지호가 서 있었다.

황지호 뒤에 보이는 건 적호였다.

인사도 하기 전, 적호가 입을 열었다.

“돈족이 움직였습니다.”

드디어 돼지가 움직인 건가.

그거 때문에 돈족을 감시하던 적호가 급히 여기로 온 모양이다.

그런데 적호가 어딘지 이상하다.

인상이 흐릿하다.

“적호? 왜 내 앞에서 적연을 쓰고 있는 거냐.”

적호가 적연을 쓰고 있어?

지금 나는 감지할 수 없었지만, 같은 호족인 황지호는 느꼈나 보다.

“황호, 그 아이한테는 알리면 안 됩니다.”

그 아이?

털썩.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적호가 쓰러졌다.

한순간 붉은 연기가 적호를 감싸다 사라졌을 때.

적호가 입은 재킷이, 그가 쓰러진 현관 바닥이 피로 붉게 젖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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