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출석률 50% (6)
주수혁의 경호원이자 비서, 김철.
최근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우울해 보이는 주수혁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수혁의 곁을 지켜 왔지만, 저렇게 기운이 없는 건 처음 봤다.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했나.’
김철이 가진 권한 내에서 가능한 한 은광고 탐색을 모두 해 봤지만,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큰 문제겠지.’
주수혁은 천재, 영재가 넘쳐 나는 재계의 자제들 사이에서도 가장 우수했다.
주수혁은 고작 열일곱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사리에 밝고 생각도 깊으며 예리한 사고력을 가졌다.
그러니 김철은 짐작조차 못 했다.
주수혁이 짝사랑 상대가 자신의 약혼 소문을 듣는 게 걱정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수혁이를 돕자.’
김철이 그렇게 다짐하며 남문 앞에 에어 스트레치드 리무진을 주차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주수혁이 뒷좌석에 올라타며 밝게 인사해 왔다.
“철이 형, 저 왔어요!”
주수혁은 이번 주에 본 모습 중 가장 밝아 보였다.
김철은 안도한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오셨습니까, 오늘은 일찍 끝나셨군요.”
“오후 수업이랑 부 활동 땡땡이쳤어요!”
“······땡땡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김철은 땡땡이가 모범생 주수혁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쾌한 목소리로 친구의 모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 주수혁을 보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친구랑 다음 주에 턱시도 보러 가기로 했어요. 의신이는 입학 전에 사 뒀다는데, 효돈이는 정장이 없다고 해서요.”
주수혁이 자주 언급하는 학교 친구 둘의 이름을 말했다.
“제 것도 새로 맞출 생각이에요. 다음 주 주말에는 선상 파티도 있으니까요.”
평소 복장에 관한 사항은 김철에게 맡기던 주수혁이다.
김철은 선상 파티를 앞두고 윗선에서 주수혁의 의상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김철은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그 지시가 오혜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김철은 주수혁의 의도를 읽었다.
‘역시 도련님은 빈틈이 없군.’
주수혁은 잡담을 가장해 오혜지와 엮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김철에게 알리는 거다.
“개인적인 지출이라면 도련님 개인 계좌를 사용해서 쇼핑하는 게 좋겠군요.”
김철도 자신의 의지를 밝히기로 했다.
주수혁은 평소엔 회장이 준 신용카드를 사용해 쇼핑한다.
그리고 그 카드의 이용대금 명세는 회장에게 보고될 가능성이 컸다.
‘수혁이라면 알아주겠지.’
주수혁도 알고 있겠지만, 굳이 언급해 자신이 주수혁을 지지한다는 걸 밝힌 거다.
“네, 그럴 생각이에요. 고마워요, 철이 형.”
주수혁의 대답에 김철이 미소 지었다.
* * *
이 세계에는 플레이어 특별법을 비롯해 플레이어를 위한 제도, 법이 많았지만 정작 플레이어 정치인은 드물었다.
귀한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가 정치인을 하면 이계 공략을 안 하고 편하게 먹고살려 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현역 스포츠 선수가 스포츠는 안 하고 정치인을 한다고 선언하면 욕을 먹는 것처럼, 플레이어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정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플레이어가 있었다.
국회의원 성국언.
정당도 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은광구를 지역구로 해서 당선된 신예 정치인이었다.
‘은광고를 졸업했다고 들었지만, 설마 그 15년 전 학생회장일 줄은 몰랐어.’
총선 선거운동 당시 성국언은 ‘이계 걱정 없는 안전한 세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성국언은 국회의원 총선 당시 공약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반드시 SR급 이상의 이계 공략에 나서 최대공헌자가 되겠다’라고 제시했다.
당선된 이후, 임기 중에 사망할 때까지 성국언은 이 공약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국언이 형! 담임쌤이셨다는 분은 만나고 왔어요? 또 다치신 거예요? 회복 아이템 카드는 안 써요?”
이계 공략 중에 다쳤는지 성국언은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의전을 극혐하는 성국언이 왜 운전기사, 수행비서한테 문을 열게 했나 했더니 다쳐서 그랬나 보다.
“오랜만이다, 시완아. 어제 이계 공략하다 팔에 금 가서 깁스했는데, 선생님이 이거 봐 봤자 걱정밖에 더 하시겠어. 그냥 파투 내고 왔어. 이번 주 내내 다쳤더니 주치의가 화내면서 아이템 안 써 주길래 그냥 깁스했다.”
“이거 기사론 안 나갔어요?”
그 말에 성국언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보좌진이 다친 거 이용해서 열심히 일하는 플레이어 이미지를 팔아먹자고 했는데, 가오 없게 국민께 이 부끄러운 꼴을 보여 줘야겠냐.”
하하핫!, 하고 허공을 울리는 웃음에 귀가 따가웠다.
‘이게 그 ‘국언무쌍’의 웃음소리구나.’
정부와 플레이어 협회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의 일이었다.
여당이 국회선진화법의 허점을 찔러 플레이어특별법을 날치기로 개정시키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성국언이 귀신같이 국회에 나타나 홀로 의사당을 점거하여 국회 공성전을 치렀다.
성국언이 백 명이 넘는 여당 의원을 막아 내는 수성전은 국회 TV로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이날 이후로 성국언은 ‘국언무쌍’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적에게는 까칠하지만 내 유권자, 내 국민에겐 따뜻한 성국언은 원래 인기가 좋았지만, 이 일로 인지도와 인기가 더 크게 상승했다.
“네가 무명의 초신성 조의신이구나. 반갑다. 성국언이다.”
굵직한 인상의 성국언은 이 세계에 와서 본 선거 포스터를 복사해서 붙인 것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상남자답게 선거 포스터도 보정 따위는 하지 않았나 보다.
“안녕하세요. 조의신입니다.”
수행비서는 내가 인사하는 사이, 말없이 성국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 깁스를 보이지 않게 가려 줬다.
하지만 성국언이 깁스를 하지 않은 팔로 내 등을 팡! 하고 두드리자 코트가 휘날려 떨어졌다.
수행비서도 플레이어인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떨어지는 코트를 받아 들었다.
수행비서의 미묘한 표정을 보니 평소 하는 고생이 눈에 보였다.
“저녁밥 먹으러 가자! 후배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많다!”
등이 좀 따끔하긴 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때린 거라 그런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 * *
성국언이 나와 성시완을 데려간 곳은 한식 코스 요리 전문점이었다.
성국언은 수행비서에게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수행비서는 업무가 남아 바쁘다며 아주 적극적으로 거절해 우리 셋만 남았다.
보료방석이 깔린 좌식 의자에 각각 자리 잡고 앉자, 성시완이 물었다.
“무영이 형은 어디 갔어요?”
“싸웠다.”
“네? 왜요?”
그 무영이 형이란 사람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거 이계 공략 중에 무영이 감싸다가 다친 거라서.”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은밀 행동계의 최강자 ‘무색인(無色人) 전무영’.
그는 성국언의 수석 보좌관으로, 경호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계 공략도 보통 같이 가는데······ 모시는 의원이자 경호 대상이 항상 저를 감싸다 다치니 열 받을 만도 하지.’
성시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성국언을 나무랐다.
“에이, 형이 잘못했네.”
“무영이는 경호원 이전에 내 후배잖아. 눈앞에서 다치게 어떻게 놔두냐?”
“그러다 무영이 형 그만두면 어쩌려고.”
“하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성국언은 태평한 얼굴로 웃었다.
결국, 전무영도 저런 성국언을 내버려 두지 못해 죽을 때까지 보좌관으로 남긴 한다.
“네 활약은 많이 들었어. 의신아, 그래도 너한테 직접 듣고 싶은데.”
성국언은 사람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걸 좋아했다.
“입학시험 사건하고 잠실야구장 사건. 자세히 들려줘. 후배의 영웅담을 듣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성국언의 눈에 희미한 이능파가 흘렀다.
‘성국언의 눈은 상위 존재의 가호를 받아 좀 특별하지.’
이건 일종의 시험일 거다.
‘성국언은 호탕하고 허술해 보여도 2선 국회의원에 교섭도, 정치에도 능해. 바쁜 데다 다치기까지 했는데 단순히 후배 얼굴이 보고 싶어서 불러내진 않았을 거야.’
나는 성국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그럼 입학시험 때 있었던 사건부터 이야기할게요.”
중간중간에 성국언과 성시완이 던지는 질문에도 답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야기가 끝난 건 백김치 밀전병에 이어 주 요리인 동충하초 오리구이가 나왔을 때였다.
“말해 줘서 고맙다, 의신아.”
성국언의 눈에 희미하게 흐르던 이능파가 사라진 상태였다.
“너는 진족이나 후예가 아니구나. 다행이야.”
“아, 국언이 형! 의신이 좋은 애라고 몇 번을 말해요!”
“좋은 애인 척 인간 사이에 숨어 사는 진족이나 후예도 있잖아? 이 ‘눈’으로도 각 잡고 정체를 숨기는 진족과 후예는 간파하기 힘들어. 말을 이 정도로 길게 하게 만들면 희미하게 이능파가 흘러나와서 그나마 감지할 수 있는데.”
“형 진짜······! 의신아, 미안해.”
“하하핫! 이계 충돌 후에 믿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성시완과 성국언이 사과해 왔다.
사촌 동생이랑 친분이 있는 무명의 초신성이 인간이 아닐까 봐 걱정한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괜찮아요, 대신 저도 성국언 선배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내 이야기? 무용담이라면 얼마든지 말해 줄게.”
성국언의 의도는 전부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선 내가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15년 전, 은광고의 학생회장이셨던 선배님은 기숙사감과 비리 이사 퇴출에 성공하고 지익회를 만드셨죠.”
“······그래. 시완이가 말했나?”
“15년 전에 학생회장을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게임 속에서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던 성국언의 경력을 몇 번 봤는데도, 그 이야기는 없었다.
10대 시절부터 그런 전설을 만들었다는 미담은 정치인으로서 팔아먹기 딱 좋은 소재인데도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2선 국회의원인 성국언 선배님이라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이유가 있나요?”
성국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내 부끄러운 과거 중 하나야.”
“네?”
기숙사감과 비리 이사를 학생들의 힘으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게 부끄러운 과거라니.
“나는 재학 중에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어. 학생회장 할 놈이 아니었지. 3년 내내 0반 소속이었다, 후배야.”
성국언은 그냥 은광고 선배가 아니라 0반 대선배였다······!
“그러다 식당에서 사감한테 처맞는 친구를 보고 학생회장이 되어서 어떻게든 해 보기로 했어.”
0반 출신이 학생회장도 하고, 지금은 국회의원을 한다.
거기에 성시완이 한 말에 의하면 3년 내내 수석이었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화려한 경력이다.
“학생회장 재임 중에 그 개새끼들을 감옥에 보낼 테니 나를 뽑아 달라고 했지. 재임 중에 못 보내면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처리해 줄 테니까 믿고 뽑아 달라 했어.”
저런 살벌한 소리를 해서 뽑힌 건가!
“성공은 했지만 오래 걸렸고 그사이에 몸과 마음이 다친 애들도 많아. 서명운동을 하고, 침묵시위를 하고, 영상을 만드는 동안 저들이 아무것도 안 했을 것 같아? 피해자들이 진술을 거부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도 있었어.”
성국언은 씩 웃으며 옛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그걸 자랑할 마음이 없어. 보좌진 중에 그 지익회 설립 사건을 홍보 카드로 쓰는 놈이 있으면 사지를 박살 낼 생각이야, 하하하!”
성국언이 호탕하게 웃었지만, 눈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은광고의 이사진 중에 진족이 있는 거 아니? 그 일도 있고 해서 진족과 후예와는 척을 짓진 않아도 믿지는 않아.”
황호의 긴 태만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행동 원리를 하나 만든 모양이다.
성국언이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황호 외에 다른 원인도 있는 것 같지만.
그 뒤론 성시완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바꾸고 적당히 선후배가 할 법한 대화를 하다 저녁 식사를 마쳤다.
“다음에 또 보자, 의신아.”
성국언과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후, 헤어지기 전 한마디 남겼다.
성국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다음에 또 볼 생각인 거다.
그런데 함근형이 내가 그 15년 전에 지익회 만든 놈이랑 닮았다고 했는데······ 내 어디가 성국언이랑 닮은 걸까.
* * *
기숙사 내 방.
머리도 정리할 겸 가볍게 훈련도 하고 왔더니 시간이 꽤 늦었다.
디바이스를 가동하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발신자 이력이 황지호로 꽉 찼네.’
최신 메시지만 보니 의미심장한 말이 쓰여 있었다.
[황지호] 아예 안 읽고 있나 보네.
[황지호] 후회할 거다.
갑자기 이놈이 뭐래.
읽고 씹기를 시전하고 다음 메시지를 보니 은호의 후예 삼남매한테서 온 거였다.
몇 시간 전에 온 메시지다.
[은이호] 의신이 오빠······ 오늘 안 오세요?
[은서호] 주말에 오신다고 들었는데요······.
뭐!
설마 기다리고 있던 건가.
주말에 황지호 집에 놀러 가기로 했지만, 토요일에 가서 자고 올 생각이었는데.
보통 주말은 토요일, 일요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넓게 보면 금요일도 들어가긴 한다.
야구에서 금요일 경기를 주말 3연전에 넣기도 하니까.
[은재호] ㅜㅜ
[은재호] 신수도 기다려요!
막내 은재호가 현관 근처에서 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올무의 뒷모습을 찍어 보냈다.
우리 올무가 찬 바닥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 뭘 한 건가!
황지호의 말대로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 미안하다, 지금 확인했어.
[나] 내일 갈게.
급히 은호의 후예 삼남매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장남 은서호에게서 답이 왔다.
[은서호] 이호랑 재호는 자요
[은서호] 내일 꼭 오세요, 형!
은서호가 사진을 한 장 첨부했다.
거실 쪽 소파 위에 이호와 재호, 올무가 몸을 웅크리고 자는 사진이었다.
귀엽긴 한데 왜 애들이 저렇게 자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사과의 의미를 담아 선물을 더 사야지. 선물 사고 바로 황명호의 대저택으로 간다!’
빠른 기상을 위해 신속하게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렇게 1학년 0반이 출석 50%를 달성한 스승의 날이 끝났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