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스테일메이트 (4)
달빛 아래, 교복 차림을 한 호족의 수장이 서 있었다.
그 황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은 진갈색이었다.
‘힘조차 개방하지 않았어!’
SSR급 은신 방어구와 김신록이 밤새 준비한 파훼법으론 황호의 눈을 속이긴커녕 힘을 개방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김신록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분해하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호가 네게 그 소식을 전하는 기특한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조의신이겠군.”
황호는 김신록이 어떻게, 왜 여기에 왔는지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김신록은 모르는 척, 평정을 가장했다.
“황호 님, 술래를 하시는 솜씨가 느셨군요.”
“옛날에는 봐준 거야. 네가 청호의 도장에 낙서하고 다닐 때도, 신인의 보물고에 잠입해 귀물(貴物)을 홀로 감상하고 있을 때도, 그리고 또 백호의······ 음, 지금 백호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이건 입 다물어 주마. 하여튼 나는 다 알고 있었어.”
몇천 년 전 일을 들먹이며 황호가 웃었다.
그간 성공했다 여겼던 장난질도 전부 황호가 꿰뚫어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신록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김신록은 수치심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누르며 말했다.
“숨바꼭질이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왜?”
모르는 척 웃고 있는 황호를 보니 격한 감정이 일어나려 했다.
김신록이 교사를 한 이후, 교복을 입고 있는 대상을 때리고 싶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호를 보러 왔잖아?”
“아닙니다.”
“아니긴. 그러면 왜 내 저택에 침입했는데.”
“호승심에 그만.”
“하하하! 호승심이라니! 변명이 참으로 앳되구나. 그러니 5천 살이 넘고도 백호에게 아이 취급을 받는 거다.”
황호가 크게 웃는 걸 보니, 김신록은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이 저택이 세워진 순간부터, 나는 네게 이곳을 자유로이 오고 갈 권한을 줬는데. 왜 굳이 이런 위험한 짓을 했느냐.”
김신록은 뻔뻔하게 늘어놓던 변명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정문으로 다녀. 복 떨어진다.”
“······저를 벌하지 아니할 생각이십니까?”
김신록은 가끔 황호에게 까불다 선을 넘어 벌을 받는 청호의 제자들처럼, 크든 작든 벌을 받으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황호는 웃기만 할 뿐, 김신록을 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라와라.”
김신록은 따라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발목에 걸린 마력 족쇄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끌려가던 김신록도 곧 포기하고 제힘으로 걸어 황호의 뒤를 따랐다.
“······.”
황명호 대저택의 옥상.
이동하기 시작한 황호와 김신록을, 신수를 품에 안은 백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은광고 거주 구역.
1학년 건물과 2학년 건물 사이의 산책로.
그 사이의 천익산으로 이어지는 샛길.
인공조명 아래에 금찬솔, 왕찬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조의신 후배님!”
금찬왕찬 콤비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해 왔다.
“우선 앉으시죠, 후배님. 아직 날이 차서 벤치에 미리 담요를 깔아 뒀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후배님께서 시장하실까 봐 저희가 요깃거리를 준비해 뒀습니다!”
“후배님이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일단 커피, 녹차, 홍차, 주스. 네 종류만 준비해 왔습니다!”
“후배님, 더 드시고 싶은 건 없습니까? 바로 주문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후배님!”
두 사람이 공손하게 벤치로 안내했다.
산책로 벤치 옆엔 간이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체 이건 언제 세팅해 둔 거지?’
테이블 크로스와 냅킨까지 세팅된 간이 테이블 위에는 다과와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에어 호텔 이카로스의 로고가 찍혀 있는 롤 케이크와 다쿠아즈 선물 세트.
보온병 세 개와 주스 병 하나.
금찬솔과 왕찬솔의 절실함이 새삼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도 같이 앉죠.”
“이런 부족한 선배들도 챙겨 주다니! 조의신 후배님은 배려심이 넘치신다!”
“이런 예의 바른 0반 후배를 둬서 기쁘다!”
금찬솔과 왕찬솔의 아부가 끊이지 않았다.
태세 전환을 하다못해 이젠 아부꾼, 딸랑이가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딸랑이는 차를 따라 주고 먹여 주려 했다.
그들의 지나치게 적극적인 접대를 거절하고, 주스 병을 쥐며 말했다.
“이계 지배에 대해 듣고 싶어요. 이능파의 링크에 대해서도요.”
내 말에 딸랑이들의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어디서 그걸 아셨습니까, 후배님?”
“조의신 후배님께 독자적인 정보 루트가 있는 거 같은데. 제갈 쌤 일도 그렇고.”
“······음. 어쩌지, 금찬?”
“······어떡할까, 왕찬.”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조의신 후배님은 나쁜 일에 이걸 써먹진 않을 것 같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 특히 제갈 쌤한텐 해가 안 갈 거야. 그때도 얘가 제갈 쌤 구했잖아.”
“그래그래. 괜찮아. 우리는 절대로 제갈 쌤 잡지 초판 1쇄 때문에 생각 없이 구는 게 아니야.”
“맞아! 재능 있고, 착한 플레이어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야! 저 초레어 한정 굿즈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잡지 초판 1쇄의 영향력은 엄청 났다.
“그래. 말해 줄게, 후배님!”
“다 말했는데 잡지 안 주면, 선배님들이 화낼 겁니다.”
“아주 많이, 겁나 화낼 거예요, 후배님.”
굿즈에 눈먼 딸랑이들이 이계 지배 과정을 설명해 줬다.
“이능파에는 각각 파동이 존재해. 그 고유한 파동 탓에 이능파는 섞이지 않아. 그런데 그 이능파의 파동이 플레이어의 감정, 생각에 따라 변한다는 논문이 발표됐어.”
삣.
남궁 그룹 산하의 비독립 민간 이능전문 연구법인, 남궁 이능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이었다.
‘플레이어의 사상, 정서에 따른 이능파의 파동 변동에 관한 연구’.
그곳에서 발표된 최신 논문을 홀로그램에 전개한 금찬솔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각자의 생각, 감정을 일치시켜 이능파의 파동을 맞추면 이능파가 섞이지 않을까, 하는 게 우리의 가설이었어.”
“금찬이랑 나는 쉽게 성공했는데, 반 아이들과 전부 맞추는 건 어려웠지.”
“그래도 제갈 쌤에게 특별한 선물을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이능파를 링크시키고, 스무 명분의 이능파를 합쳐서 이계 지배에 성공한 거야.”
논문을 읽으며 금찬왕찬의 설명을 들으니 감이 잡혔다.
이능파의 파동.
사상, 정서, 생각, 감정에 따른 파동의 변경.
그에 따른 이능파 링크.
합쳐진 이능파로 행하는 이계 지배.
‘그런 원리였구나!’
생각이 정리된 순간.
시스템 알림음이 들리고, 팝업창이 떴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스킬 레벨이 3에서 4로 상승합니다.〉
게임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개념, 현상을 발견하고 이해한 덕일까.
전용 메뉴의 레벨이 올랐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생각지도 못한 덤을 얻었다.
비닐 래핑된 잡지를 두 사람에게 내밀자 금찬왕찬이 뛸 듯이 기뻐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후배님!”
“또 제갈 쌤 잡지 뽑을 예정이면 우리 반 것도 뽑고. 알았지?”
“그래! 스승의 날 이계 지배 성공하고 우리 반 단합 쩔었는데 배틀 로열로 다 망했어!”
그 배틀 로열에서 연합 먹고 우승한 놈들이 할 소리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왜 ‘가든’을 제갈재걸 선생님께 선물하려고 하셨나요?”
내 질문에 금찬왕찬이 갑자기 격한 감정을 보였다.
“구질구질하게 구는 제갈 쌤의 ‘첫 제자’ 때문에 그렇지!”
“그래! 웬만한 선물은 그 질척거리는 첫 제자라는 놈한테 다 받아 봤대잖아. 그래서 절대로 그놈이 못 줬을 선물을 생각하다 그렇게 된 거야.”
“작년에도 우리보다 먼저 찾아와서 카네이션 달아 주고 갔어! 심지어 올해도!”
“어쨌든 우리가 ‘가든’ 선물해 드렸으니까 이겼어. 아무튼, 이김!”
그 질척거리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제갈재걸의 제자.
어쩐지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금찬왕찬과 헤어지고 내 기숙사 방.
금찬왕찬 콤비가 준 선물로 가득한 쇼핑백을 소파 아래에 내려놓았다.
‘무슨 선물을 줬을지 신경 쓰이긴 하는데, 먼저 전용 메뉴부터 확인해 보자.’
전용 메뉴에 새로 개방된 메뉴는 ‘주변 지도 열기’.
게임 속에선 한 번 이상 탐색을 마친 지역에 입장할 때, 미니맵으로 주변을 보여 주는 기능이었다.
‘계속 켜고 있기는 힘들 것 같네.’
전용 메뉴로 사용 가능한 창을 오랜 시간 열어 놓고 있으면 정신력이 떨어지고 두통이 생긴다.
미니맵을 관찰하고 있으니 머리가 조금씩 아파져 왔다.
미니맵 기능의 확인이 끝났을 때.
딩동.
제갈재걸의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옛 제자, 홍규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홍규빈] 의신아, 학교에 별일 없지?
[홍규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야근으로 바쁜 홍규빈이 갑자기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낸 걸까.
‘예지 스킬로 뭔가를 감지한 건가?’
이번 주말 일정을 고려하면 뭔가 감지할 수도 있을 법하다.
[나] 네, 연락드릴게요. 야근 힘내세요.
홍규빈의 답장을 확인하기 전, 평소대로 꿈도 안 꾸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 개인 훈련을 마치고 온 1학년 0반 교실.
오늘 가장 늦게 온 건 나였다.
아이들과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황지호가 말을 걸어왔다.
“조의신, 나한테 할 말 없냐.”
“없는데.”
황지호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어젯밤, 내 저택을 침입한 자가 있었어.”
뭐, 누가 겁도 없이 호족 수장의 저택에 침입했나.
설마 12지의 배신자 중 하나의 소행인가.
“적호의 사고뭉치 후예더군.”
······김신록이구나!
적호가 중상을 입었다는 내 메시지에는 응답하지 않더니, 몰래 병문안하러 갈 정도로 걱정했나 보다.
“하하하! 아주 오랜만에 그 아이와 하는 숨바꼭질은 즐거웠어. 너무 놀았더니 좀 토라진 것 같지만.”
“침입했다고 내쫓진 않았지?”
“그럴 리가. 그 아이는 잠든 적호를 몇 시간 지켜보다 조용히 돌아갔어.”
황지호도 백호군처럼 김신록을 아이 취급하는구나.
황지호가 숨바꼭질이나 김신록이 토라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이 갔다.
“조의신, 네가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으니 나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하지.”
황지호는 눈을 반짝거리며 아리송한 말을 했다.
계속 눈을 반짝이는 게, 내가 뭔가 반응하길 바라는 눈치다.
무시하기로 했다.
홀로그램으로 전자 교과서를 펴고 있으니, 황지호가 먼저 꺾였다.
“······안 궁금해?”
“어, 안 궁금해.”
황지호가 아주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계속 무시했다.
정말로 궁금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 * *
방과 후.
2학년 0반과 있던 태그 매치 대결 영상, 아니 황지호의 폭주 영상 관람회를 가진 신문부 활동을 마치고.
주수혁과 맹효돈, 두 사람과 함께 선상 파티에서 입을 옷을 보러 가기로 했다.
“여기 예약이 밀려 있다고 들었는데, 의신이 덕에 여기서 옷 맞추겠다. 언제 예약해 둔 거야?”
우리가 온 곳은 한국의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 ‘느루’의 VIP 매장이었다.
왕찬솔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기업의 산하 브랜드 중 하나로, 세계 5대 명품 브랜드로 꼽히는 ‘느루’.
방한한 유명 외국인을 상대로 ‘두 유 노 느루?’를 시전하는 기자들이 넘쳐 날 정도로 인지도 높은 명품 브랜드였다.
왕찬솔이 준 선물 중엔 이곳 느루의 VIP 매장 예약 우선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제 왕찬솔 선배님한테 예약 우선권을 선물 받아서. 예약 우선권에 나온 연락처로 전화하니까 여기를 소개해 줬어.”
“아, 여긴 아마 예약 없이 방문할 VIP를 위해 항상 비워 두는 곳일 거야.”
“별게 다 있네.”
느루의 VIP 매장에는 셔츠부터 넥타이핀, 구두, 의상에 어울리는 향수까지 갖춰져 있었다.
매장 직원들은 고등학생인 우리를 상대로도 정중하게 안내했다.
재벌가 자제다운 포스를 뿜는 주수혁이 있고, 예약 우선권을 사용한 덕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다 그게 그거인 거 같은데. 대충 고르면 안 되냐.”
“응, 안 돼.”
“어차피 여기 시간 정해져 있어서 오래는 못 있어. 둘러보자.”
정해진 시간 동안 이 매장을 이용하는 건 우리뿐이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마음껏 매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선상 파티에 대해 간략히 전달하니 매장 직원이 턱시도 카탈로그와 실물을 보여 줬다.
주수혁은 매장 직원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 가며 신중하게 의상을 고르고, 맹효돈은 추천해 주는 턱시도 중 제일 첫 번째 것을 생각 없이 골랐다.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둘과 겹치지 않는 디자인의 턱시도를 선택했다.
“어, 저분은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 같은데. 왜 여기 계시지?”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
주수혁의 말에 유리벽으로 된 스태프 에리어를 보니, 이쪽을 보다 고개를 돌리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게임 속에서 나온 인물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전용 메뉴를 열었지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인물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비중이 적은 엑스트라였거나,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야, 넌 입학 전에 정장 샀다고 하지 않았냐.”
가장 먼저 계산을 마친 맹효돈이 물어 왔다.
그렇긴 하지만, 선상 파티에선 한 벌 더 필요했다.
“예비로 하나 더 사려고.”
“더럽게 비싼데 두 벌이나 있어야 하냐.”
맹효돈이 투덜거렸지만, 어차피 맹효돈은 먹는 것 외엔 돈도 안 쓰는 놈이니 더럽게 비싼 옷을 파는 곳으로 왔다.
허접한 의상으로 맹효돈이 얕보이는 걸 보긴 싫었다.
“스카이라운지 가자! 레스토랑 예약은 내가 해 뒀어. 여기는 리코타치즈 샐러드랑 립아이 스테이크가 맛있어.”
계산을 끝낸 주수혁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한 옷은 수선을 마치고 우리가 원하는 시각에 배달해 준다는 설명을 들은 후, 백화점 최상층으로 향했다.
한강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밤이 깊었다.
늦은 시각을 핑계로, 오늘도 체스보드를 외면하고 잠들었다.
결국, 한 번도 체스 피스를 쥐어 보지도 않은 상태로 체스대회 날을 맞이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