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5화 (95/925)

26. 체스 플레이어 (1)

“다녀오셨습니까, 수장님.”

“다녀왔어요.”

서족(鼠族)의 수장이 존댓말로 인사했다.

그 존댓말을 듣는 순간, 수장의 부하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자칭 꾀돌이, 서족의 수장은 기본적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하대하였지만, 들떠 흥분했을 때는 존댓말을 사용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부하들은 또 수장이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부하 중 하나가 대표로 서족의 수장에게 묻자 꾀돌이가 흔쾌히 답했다.

“제인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인간들을 살펴보고 왔어요.”

“그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부탁 말씀이십니까? 직접 조사하고 다니신 겁니까?”

“그래요.”

‘또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수하들은 깊이 탄복했다.

유능한 서족의 수장은 인간 사이에 섞여 유희를 즐기면서도, 서족의 운영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직접 나서 정보 수집까지 하다니, 수장의 시간 관리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인간이 신경 쓰이는 배경을 갖고 있었어요.”

“수장님께서 조사를 요청받은 인간은 둘이었죠. 은광고 1학년 0반의 두 남녀······ 그들 중 하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여학생 쪽도 흥미로웠지만, 남학생 쪽이 더 신경 쓰였어요.”

“웅족의 권속으로부터 살아남은 무명의 초신성, 조의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서족의 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나이대의 플레이어치곤 우수한 편이지만······ 은광고에는 더 화려한 실적을 가진 학생도 있습니다. 수장님께서는 어떤 점이 신경 쓰이셨습니까?”

“플레이어가 되기 전의 이력요.”

서족의 수장은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최근 3년간 있었던 국내 체스대회 수상자 명단이 나와 있었다.

모든 명단의 최상단에는 ‘조의신’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그 학생은 체스 기사였군요.”

“네. 작년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출전하지 않게 되었지만요. 그 점이 마음에 걸려요.”

“얼마 안 있어 17세가 되어 정식 플레이어가 되니 그런 것 아닙니까?”

정식 플레이어는 세계체스연맹(FIDE)에서 관리하는 Elo 레이팅을 기반으로 한 체스 랭킹에 들어갈 수도 없고, 마스터 칭호도 받을 수 없었다.

취미로 체스를 두다, 정식 플레이어가 되기 직전에 관두었다는 설이 이상하진 않았다.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어요.”

서족의 수장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이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말했다.

“첫째, 기록상 남아 있는 조의신의 대전자가 조의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조의신의 대전자는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다양했지만 조의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체스 기사들의 지적 능력은 우수한 편이에요. 그런데 전원 조의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만한 수상 이력을 남긴 체스 기사의 인상이 그만큼 흐리다는 건 이상해요.”

영상, 사진, 문자.

조의신의 기록은 완벽했다.

하지만, 대전자들이나 체스협회 관계자들은 조의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하나같이 ‘그러고 보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대규모의 정보 조작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둘째, 작년에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반년 이상 체스와 연을 끊고 살았던 조의신이, 은광고 교내 체스대회에 참가한 것.”

가족을 잃은 쇼크로 체스를 그만뒀다가, 반년 쉬고 다시 시작한 게 그렇게 신경 쓰일 일인가?

서족의 수장의 말을 듣던 부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셋째, 제가 가호를 내린 인간 플레이어의 태도가 미묘했던 것.”

“미묘하다니요?”

“여학생의 정보는 순순히 내줬는데, 조의신의 정보는 어쩐지 이것저것 지워 내고 줬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족의 수장은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전, 이런 거 아주 좋아해요.”

대체 뭐가 좋은 건지 부하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른 아침.

훈련을 마치고 디바이스를 확인해 보니 눈에 띄는 메시지는 없었다.

‘홍규빈이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홍규빈의 메시지창에는 평소대로 ‘별일 없니?’,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니?’, ‘야근이 힘들다ㅠㅠ’ 같은 상투적인 안부 인사와 징징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바쁠 테니 추궁하는 건 그만둘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등교 준비를 하며 은광고 웹 커뮤니티 종합 게시판을 확인해 보니, 3학년 0반 반장이 올린 글이 보였다.

[3학년 0반 최종 항복 후기]

저번에 올라온 스승의 날에 올린 글이 ‘중간 항복 후기’라서 설마 했는데, 정말로 최종 항복 후기가 올라왔다.

[소제목: 담임이 너무 강함]

제목밖에 안 읽었는데 그만 읽고 싶어졌다.

‘그만 읽고 싶은데 신경 쓰이네.’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계속 읽어 내렸다.

내용은 의외로 평범했다.

3학년 0반의 서바이벌 게임 훈련 과정을 시작으로 ‘(대충 담임이 너무 강하다는 내용)’으로 요약되는 구구절절한 내용의 수십 줄이 이어졌다.

0반이 그동안 남긴 위업에 비하면 상당히 무난한 후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댓글이 많지.’

그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해결되었다.

[가장 큰 패배 요인은 ‘우주의 기운’의 배신이었다.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우리 3학년 0반은 ‘우주의 기운’을 타도하기로 했다.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서

복수할 것이다.

후기는 이상이다.]

우주의 기운? 배신? 복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해는 안 가지만 우주의 기운과 싸울 예정인가 보다.

3학년 0반의 후기의 마지막 문단은 고작 몇 줄로 읽는 사람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댓글이 많이 달릴 만도 했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냐ㄷㄷㄷ]

[요약: 기승전우주]

[우주의 기운 어쩌고는 비밀 훈련을 위한 연막작전 아니었음? 찐이었어?ㅋㅋㅋㅋ]

[3학년 0반 반장 놈은 그나마 멀쩡했었는데 이젠 대표 미친놈임;;;;]

[↑환경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주의 기운이 잘못했네.]

[이건 우주의 기운 입장도 들어 봐야 한다.]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쨌든 3학년 0반은 담임 임연화에게는 항복했지만, 그들의 싸움은 계속될 모양이다.

2, 3학년 0반 선배들을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1학년 0반 아이들이 0반화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물론 황지호는 여러모로 늦은 것 같으니 예외로 해 둔다.

*    *    *

3학년 0반의 우주 전쟁 선포로 떠들썩했던 하루가 끝나고.

방과 후.

총동아리회관의 신문부실.

황지호와 같이 신문부실의 1학년 부실로 들어가려 하기 전, 신문부 부장이 나를 불러냈다.

“권제인 선배님께서 인터뷰를 해 주신다는데, 그쪽에서 취재할 기자를 지정해 오셨어.”

권제인은 방송 출연도 잘 하지 않고,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 음악 프로에 출연할 때도 연주만 한다는 조건으로 나간다.

영원의 호수의 얼굴은 권제인이지만, 목소리는 재러드 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권제인이 이번 앨범 활동은 적극적으로 할 생각인가. 그래도 이상한데.’

마침 오늘, 권제인의 신곡 ‘귀향(Homecoming)’의 음원이 공개되었다.

호연관에서 열린 내한 공연에서 첫 곡으로 최초 공개된, 피치카토로 시작하는 그 곡.

0시에 공개된 귀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음악 관련 동아리 소속원들이 새벽 내내 연습하여 녹음한 귀향의 다양한 커버 버전들이 온종일 수업 종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권제인은 신곡 음원 공개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신문부 부장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원의 호수 쪽에 권제인 취재 요청을 해 봤다고 한다.

“바로 답변이 와서 놀랐어! 의신이 네가 기자로 오면 인터뷰에 응해 주신다고 하셨어. 권제인 선배님과 아는 사이였니?”

“권제인 선배님이 호연관 내한 공연으로 오셨을 때, 공연 스태프로 일하면서 잠시 인사한 적이 있어요.”

“그랬구나! 의신아, 질문 내용은 같이 생각할게. 인터뷰 좀 부탁해!”

권제인에게는 걸리는 점이 몇 개 있었다.

내한 공연에서 느꼈던 위화감들이 떠올랐다.

이번 인터뷰로 그 의문과 위화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료 조사도 도와주실 수 있나요?”

신문부 부장이 밝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새론이는 벌써 조사 중이야.”

신문부와 플마고 최고의 정보통의 도움을 받아 권제인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    *    *

부 활동이 끝난 후.

황지호와 헤어지기 전.

“진짜 안 궁금해?”

황지호가 말하지 않겠다는 ‘그것’을 또 물고 늘어졌다.

황지호는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니 어쩐지 묻고 싶지 않아졌다.

“어. 진짜 안 궁금해.”

황지호가 언짢아하는 얼굴을 하다 몸을 홱 돌려서 가 버렸다.

저긴 교문 방향이 아닌데 어딜 가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에도 저러면 예의상 물어봐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홀로그램 지도를 확인하고 지정된 좌표로 이동했다.

‘여기인 것 같네.’

총동아리회관 부지 내의 제3체육관.

체스대회가 열리는 장소다.

‘회의실이 아니라 체육관을 빌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오나 보네.’

제3체육관 앞.

출전하는 체스 플레이어와 관람객은 각각 다른 입구로 입장해야 했다.

스태프 명찰을 단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의 부원에게 학생증을 보여 주니, 체스 플레이어 전용 입구로 안내해 줬다.

그렇게 도착한 대기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잔뜩 보였다.

“안녕, 의신아. 오늘 열심히 하자!”

인사를 해 온 건 가끔 기숙사에서 마주치기도 했던 박승현.

그도 체스대회 출전자였다.

몸보다 머리 쓰는 일을 좋아하고, 적성도 있는 건 알았지만 체스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체스대회가 기대되는지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우절 때 봤던 얼굴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래, 잘 부탁해.”

체스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게임 속에서는 스토리상 다뤄지지 않아 체스대회의 개최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 많이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도망쳤을 텐데.’

홀로그램을 띄우고 체스 AI와 대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체스보드와 움직이는 체스 피스들을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전용 메뉴 창을 띄울 때보다 더 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곧 개회식을 시작합니다! 이동해 주세요!”

무슨 교내 체스대회에 개회식이 있나.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스태프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더 넓네.’

1층은 경기장, 복층으로 된 2층은 관람석이었다.

심판진과 스태프는 1층의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바로 1층 경기장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체스대회에 참가한 학생들도 1층의 무대 위로 섰다.

무대 위에서 경기장 쪽을 내려다보니, 넓은 체육관에 책상과 의자만 놓여 있는 게 꽤 적적해 보였다.

“개회 전, 오프닝 쇼를 시작합니다. 안전을 위해 움직이지 마세요.”

용제건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했다.

‘오프닝 쇼? 안전?’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양손을 뻗은 용제건의 손짓과 함께 허전했던 체육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용제건이 공간술로 만들어 낸 주먹 크기의 정육면체의 공간이 블록처럼 쌓여 장식품을 만들어 갔다.

와아아아―!

일변하는 풍경에 2층 관객석에서 환성이 쏟아졌다.

‘굉장하다!’

거대한 백과 흑의 체스 피스들이 체육관을 둘러쌌다.

백과 흑의 체스 피스들을 정교하게 배치해, 위에서 보면 은광고의 교표처럼 보이게 만든 배열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2층의 관객석을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처럼 재구성해 버렸다.

용제건은 작은 공간에 색을 입혀 정교하게 블록처럼 쌓아 갔다.

교원 계약 때문에 힘을 발휘하는 데에 제약이 있는 탓일까, 모든 작업을 마친 용제건의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손짓을 멈춘 용제건이 말했다.

“스테일메이트 배, 은광고등학교 체스대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관객들과 선수들의 박수 속에서 체스대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 첫 대전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마진승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