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6화 (96/925)

26. 체스 플레이어 (2)

무대 밑으로 내려간 나와 마진승은 스테일메이트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대전할 장소로 이동했다.

용제건이 만들어 낸 거대한 체스 피스 사이, 체스 테이블들이 2열로 정렬되어 있었다.

체스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대국 시계, 체스 클락을 보니 내가 체스를 두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체스를 둔 건 중학교 3학년 가을, 세계체스연맹(FIDE)에서 주최한 세계주니어체스선수권대회의 파이널 라운드였다.

인도의 델리에서 치른 14일간의 토너먼트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가족의 부고였다.

사고 직후, 조금 의식이 있던 부모님이 유일하게 한 말은 ‘의신이한테 말하면 안 된다’였고, 델리에 나와 함께 있던 코치는 부모님이 남긴 유언을 존중해 줬다.

내가 귀국한 시점에선 장례식도 모두 끝나 있었다.

떠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봉안당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체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부모님이 왜 그런 말씀을 남기고 가신 건지, 코치가 왜 내게 말을 안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체스를 둔 것과 가족들의 죽음 사이에 큰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객관화, 합리화를 하고 자책하는 것도 그만뒀지만, 체스는 둘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시 체스보드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마진승의 큰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대사에 느낌표가 자주 붙던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는데, 실제로도 목소리가 크네.’

마진승이 나보다 선배지만, 체스는 예절과 도덕의 게임이라 체스 플레이어는 서로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게 암묵의 규칙이었다.

체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진승과 악수를 마친 후, 자리에 앉았다.

사망이 예정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다잡혔다.

‘이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이 세계에는 다양한 형태의 광림, 스킬, 에너미가 존재한다.

플레이어의 정신적 약점을 파고드는 형태의 공격도 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않으면, 정신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플레이어의 궤적’과 ‘운명력’ 같은 스킬을 가진 내가 흑막의 손에 떨어지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대응하기 어려울 거다.

‘정신적인 약점을 남겨 둘 수 없어. 극복해야 해.’

그렇게 이성이 판단하고 있는데, 감정이나 신체는 그렇지 못했다.

체스보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64칸의 정사각형이 점점 모양이 변하고 있었다.

“백과 흑, 코인을 던져 정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스태프가 참가자에게도 나눠 준 스테일메이트 배 체스대회 기념 코인을 던졌다.

코인을 던진 결과.

내가 백, 마진승이 흑을 잡게 되었다.

내가 선수(先手), 마진승이 후수(後手)다.

“대국을 시작해 주십시오.”

용제건의 목소리가 체스대회장을 울렸지만, 마진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체스 테이블 위에는 각 체스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진 제한 시간을 알려 주는 체스 클락이 놓여 있었다.

대국 개시 신호가 떨어지면 후수가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누르는 게 관례인데.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모든 체스 테이블 중, 대국 시계의 숫자가 변하지 않는 건 우리 테이블뿐이었다.

디지털 시계와 19세기 중엽까지 대국 시계로 사용됐다던 모래시계가 합쳐진 형태를 한 고전적인 디자인의 체스 클락이 방치된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작해 주십시오.”

단상에 있던 용제건이 내 뒤로 소리 없이 이동해, 마진승을 보며 말했다.

‘아차!’ 하는 표정의 마진승이 허둥지둥 체스 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는 중에도 어느 체스 클락을 눌러야 할지 헤매, 용제건이 눈짓으로 힌트를 줘야 할 정도였다.

‘마진승은 체스 초보구나.’

게임 내의 행보를 보면 마진승은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 쓰는 일을 선호했다.

그렇다고 맹효돈 같은 돌머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을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왜 마진승은 체스대회에 나온 걸까.

‘염준열 때문에 출전한 건가!’

어디선가 염준열이 체스대회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서 출전한 게 분명하다.

마진승은 체스 초보다.

아마 염준열의 기보는 연구해 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외에는 초보나 다름없을 거다.

‘그래도 정석적인 방법으로 싸우면 질 거야. 내가 중간에 움직일 수 없게 돼서 시간 초과로 지겠지.’

아직 첫수도 두지 못했는데 내 머릿속은 엉망이다.

체스보드를 눈앞에 두고, 곧 대국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흐려졌다.

진정하려 해도 눈앞의 체스보드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상태로는 오래 못 버텨.’

그렇다 해도 내가 둘 수 있는 최선의 수,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을 생각해야 했다.

지금 내 몸 상태.

체스 초보 마진승의 성정.

내가 잡은 백.

생각이 정리되었다.

‘반은 도박이긴 한데.’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며 첫수를 두었다.

e2의 폰을 e4로 옮기고, 체스 클락의 버튼은 눌렀다.

삑.

작은 기계음과 함께 내 시계가 멈추고 마진승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

체스 오프닝은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초보자가 흔히 듣는 조언은 두 가지.

첫째, 중앙을 장악할 것.

둘째, 체스 피스들을 전진 배치할 것.

벼락치기로 체스를 공부한 마진승이라면 이 원칙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 원칙대로 마진승은 c7의 폰을 c5로 옮겼다.

삑.

마진승이 체스 피스를 움직인 손으로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주저 없이 f1의 비숍을 c4로 이동시키고 체스 클락의 버튼을 눌렀다.

삑.

첫수에 그렇게나 시간을 잡아먹었던 놈이, 이렇게 빨리 둬?

그렇게 생각하는 마진승의 표정이 훤히 읽혔다.

그 표정을 보면서 웃는 시늉이라도 내고 싶었는데,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마진승은 다시 정석대로 중앙에 나이트를 보내기로 한 모양이다.

b8의 나이트가 c6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승부수다.’

나는 바로 d1의 퀸을 h5로 옮겼다.

삑.

체스 클락을 누르고 턴을 마치니 마진승이 눈에 띄게 당황한 게 보였다.

갑자기 퀸이 움직이면, 초보로선 당황할 법도 할 거다.

마진승은 고민 끝에 h5의 퀸과 e4의 폰을 노리고 g8의 나이트를 f6로 이동시켰다.

나이트를 봉쇄하지 않는 한, 다음 턴에 폰이나 퀸이 잡히는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중앙을 내주거나 체스 피스 중 가장 활용도가 높은 퀸이 잡혀 버린다.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구나.’

하지만 오늘 체스보드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h4의 퀸으로 f7의 폰을 잡으며 말했다.

“체크.”

체스 플레이어가 대국 중 발언이 허락되는 건 네 가지 경우뿐.

첫째, 기권할 때.

둘째, 무승부를 제안할 때.

셋째, 룰 위반에 대해 항의할 때.

넷째, 외통수, 체크메이트를 상대에게 알릴 때.

내 목소리를 들은 마진승이 아리송한 얼굴을 하다 퀸의 위치를 보고 굳었다.

‘이제 보였나.’

백의 퀸이 적진에 파고들어 가 흑의 킹을 직접 노리고 있었다.

현재 국면에서 f7에 자리 잡은 백의 퀸을 잡을 수 있는 건 흑의 킹뿐.

하지만 백의 퀸은 백의 비숍에 의해 보호를 받는 중이다.

흑의 킹이 백의 퀸을 잡더라도, 다음 턴에서 백의 비숍에게 잡힌다.

즉, 어떤 수를 두더라도 흑의 킹은 죽는다.

덜컥.

마진승이 체스보드 위로 직접 흑의 킹을 쓰러뜨렸다.

그는 고작 4수 만에 당한 게 분한 건지 한숨을 푹 쉬면서도, 패배를 시인하고 악수를 청해 왔다.

마진승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너······ 손 왜 이렇게 차가워졌어.”

대국 바로 직전에 악수했던 마진승이 눈치챘나 보다.

그냥 적당히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대기실로 향했다.

*    *    *

오늘 시합은 두 번 있다.

첫 경기에서 살아남은 승자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해 다른 승자와 연이어 대국할 예정이었다.

‘운 좋게 4수 만에 끝냈어. 하지만 다음은 그렇게 안 될 거야.’

적어도 1차전을 통과할 만한 체스 플레이어가 상대다.

낙관적인 기대는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의 대국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대기실 문을 열고 박승현이 등장했다.

박승현도 빠르게 체크메이트를 한 모양이다.

“의신아, 거의 시작하자마자 나가지 않았어? 혹시 풀스 메이트나 스콜라 메이트를 쓴 거야?”

체스에는 상대를 순삭시키는 신기가 몇 가지 있다.

그중 유명한 게 2수 만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풀스 메이트.

풀스 메이트는 백을 잡은 체스 플레이어가 폰을 아무 생각 없이 전진시킨 경우에만 가능한 수단이었다.

‘내가 백을 잡아 버렸으니 그걸 노리는 건 불가능했어.’

그래서 퀸과 비숍이 동시에 f7을 노리는 전법을 쓰기로 했다.

나는 마진승과의 대국에서 4수 만에 체크메이트를 하는 비기, 4수 메이트, 번개 메이트라고도 불리는 스콜라 메이트를 사용했다.

“스콜라 메이트를 썼어. 운이 좋았어.”

“나도 체스 시작했을 때 몇 번 당했는데. 파훼법을 사전에 익히지 않으면 은근히 막기 어려웠어.”

박승현은 게임 속에 등장한 시점에선 부정 입학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느라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박승현이 제 취미에 관해 얘기하는 걸 보니, 보기 좋았다.

또 박승현의 능력을 고려했을 때에도, 체스를 두는 건 바람직하였다.

‘박승현이 체스를 공부하는 건 좋은 일이야.’

박승현은 전투계 능력이 영 시원치 않다.

그렇다고 통찰계나 탐지계 스킬이 우수한 것도 아니다.

머리는 좋은 편이지만, 같은 학년에 있는 주수혁이나 안다인이 더 우수했고, 2학년에 천동하라는 괴물 같은 두뇌를 가진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있었다.

그래도 박승현은 게임 속 사기캐 중 하나였다.

‘박승현의 광림은······ 조금 제약이 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능력을 상승시켰어.’

서포트 계열 광림은 많지만, 박승현 정도로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광림은 흔치 않았다.

‘그런 박승현이 넓게 판을 보는 능력이나, 다음 수를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면 은광고의 전체 전력의 상승으로 이어질 거야.’

박승현의 체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두통도 멎고 손에 온기도 돌아왔다.

나와 박승현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기실로 돌아오는 참가자가 점점 늘어났다.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10분 후.

스테일메이트의 스태프가 들어와 다시 우리를 안내했다.

“살아남아서 싸워 보자.”

“······그래.”

밝게 말하는 박승현에게 그렇게 답변해 줬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    *    *

다음 상대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NPC도 아닌 상대였다.

2학년 0반 연가람.

2학년 0반이 응원의 의미인지 연가람의 교복에 명찰을 잔뜩 달아 둔 게 보였다.

연가람은 스무 개가량의 명찰을 매달고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세계에선 연극부의 에이스로 이름난 여학생이지만, 게임상에선 이름도 안 나온 인물이다.

‘정보가 전혀 없어.’

심리전의 대가라는 소문답게 표정도 읽기 어려웠다.

거기에 마진승과 달리 연가람은 체스보드 앞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게임 속 정보도 없고, 표정을 읽기도 어렵고, 체스에 익숙한 상대다.

스콜라 메이트 같은 꼼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대응책이 없나 고심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딪쳐서 깨지는 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체념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백과 흑, 코인을 던져 정하겠습니다.”

스테일메이트의 스태프가 코인을 던졌다.

이번에도 내가 백, 상대가 흑이었다.

“대국을 시작해 주십시오.”

대국 시작을 알리는 용제건의 목소리가 이명에 섞여 들렸다.

연가람이 체스 클락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폰을 잡아 앞으로 전진시켰다.

생각에 잠긴 연가람이 다음 수를 두고.

나도 일그러져 가는 체스판을 보며 다음 수를 두고.

그렇게 스무 수 정도를 뒀을 때.

‘세상이 흑백으로 보여······.’

점멸하는 시야 속.

모든 물체가 색을 잃기 시작했다.

눈앞의 연가람도, 내 손도 전부 흑백으로 보였다.

어떤 수를 둬야 할지, 아니 이 체스 피스의 행마법이 어땠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다.

당장 기권해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시간 초과로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버티자!’

그렇게 생각하며 완전히 형태가 변한 체스보드를 노려봤다.

흑백의 세계 속에서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내 체스 클락의 모래시계의 모래도, 남아 있는 숫자도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이대로라면 내게 주어진 제한 시간을 전부 소모하고, ‘시간패’당할 거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운명력?

지금 내 상태론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시스템음과 함께 시야가 번쩍였다.

파앗!

연가람의 위쪽으로 무언가가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2층 관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용제건의 공간술로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처럼 변한 2층이 보였다.

‘어······.’

공간술로 격리된 저편.

1학년 0반 아이들이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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