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04화 (10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4)

그렇게 대답한 후, 염준열은 만약을 대비해 홍룡을 소환할 준비를 했다.

‘강제로 데려가려 할지도 몰라.’

라운지와 일행이 있는 홀 사이의 거리.

겉으로 보이는 이 진족 여성의 역량.

자신의 힘.

염준열은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나 청룡 삼촌이 와 주실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적벽괴도 스승님과 특훈한 성과를 보여 줄 때라고 각오를 다질 때.

“후후후, 교육이 잘되어 있는 아이구나. 내 말썽꾸러기 아들과는 전혀 달라.”

진족 여성은 공격 의사가 없어 보였다.

염준열은 조금 맥이 풀렸다.

“아드님이 있으시군요.”

“그래. 그 아이가 모르는 진족을 따라 나를 찾아왔을 때는 참 곤란했단다.”

아들이 모르는 진족을 따라 어머니를 찾아와서 곤란해?

어딘가 이상한 말이었다.

“네 스승은 홍염의 제왕과 방랑벽을 가진 그 용이었지. 착한 제자를 뒀으니, 그들은 행복하겠구나.”

진족 여성이 작게 웃을 때마다 머리카락과 붉은 드레스 자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아쉽구나. 이걸 용제건에게 전해 주겠느냐.”

진족 여성이 아이템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염준열은 받지 않았다.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르잖아요. 안 돼요.”

“용족의 후예는 정말 착하게 자랐구나. 그래도 받으렴. 이 아이템 카드는 용제건을 기쁘게 할 거란다.”

진족 여성이 생긋 웃으며 다가와 염준열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일련의 동작에 위협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염준열을 해하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손이 잡힌 염준열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피할 수 없었어!’

염준열은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조용히 납치해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염준열의 손에 아이템 카드를 쥐여 준 진족 여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많은 얘기를 하지 못해 아쉽지만…… 그자의 눈을 빌린 보람이 있구나. 후후, 용족의 후예가 이리 착한 아이일 줄이야.”

“당신은 누구시죠?”

진족 여성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향수병을 꺼내 스프레이 형태의 분사구를 염준열을 향해 들었다.

“다음에 볼 때는 네 모습을 했던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자꾸나.”

“네? 잠깐만요!”

자신의 모습을 했던 그 아이.

염준열이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이는 자신의 또 다른 스승, 적벽괴도였다.

진족 여성은 염준열의 만류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족 여성이 향수병의 미스트 펌프의 헤드를 누르자, 무색무취의 무언가가 염준열을 향해 분사되었다.

파아―!

염준열의 시야가 잠깐 흐려진 직후.

진족 여성의 모습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가 버렸어…….’

염준열은 아이템 카드를 움켜쥐며 방금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봤다.

적벽괴도와 용제건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강력한 진족.

그녀가 남긴 아이템 카드.

염준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버지와 청룡 삼촌께 말씀드리면 두 분이 곤란해하실지도 몰라. 제건이 형한테 먼저 상담하는 게 좋겠다.’

염준열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을 때.

호텔 라운지 출입구에서 누군가 머뭇거리다 들어왔다.

“음, 그러니까, 준열아.”

들어온 이는 용족의 수장, 청룡.

염준열에게 ‘청룡 삼촌’이라고 불리고 싶다며 염방열과 의형제까지 맺은 진족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최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에 염준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청룡의 말이 칭찬이라 생각해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청룡 삼촌.”

그렇게 답하니, 문 근처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아, 청룡 님, 그렇게밖에 못 할 거면 바꿔욧!”

“자기가 가겠다고 빡빡 우기더니 수장이라는 게 위로도 못 하네!”

“차라리 염방열을 부르는 게 낫겠다.”

붉은 사자 팀원과 용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로해 주려고 오신 거구나.’

염준열은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환하게 웃었다.

“다들 감사해요. 전 괜찮아요.”

“준열아……!”

“저딴 위로도 받아 주다니, 역시 우리 준열이는 배포가 남달라.”

“준열아, 아까는 분위기 보느라 말 못 했는데 같이 사진 찍으면 안 돼? 정장 완전 잘 어울린다!”

“나도! 전용 카메라 가져왔음!”

염준열은 쏟아지는 사진 요청을 받으며 웃었다.

체스대회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매우 속상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용족과 팀원들 사이에 섞여 사진을 찍는 사이.

염준열은 어느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진족과 접촉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셔.’

혹시 마지막에 뿌렸던 정체불명의 향수 탓일까.

*    *    *

은광구의 한우 코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 8인실.

4인용 테이블이 두 개 있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앉게 되었다.

한쪽은 나, 맹효돈, 김유리, 권레나.

다른 쪽은 황지호, 사월세음, 한이.

“그러면, 의신이의 우승을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김유리의 활기찬 건배사를 끝으로, 아이들이 각자 잔을 들어 근처에 앉은 아이들과 부딪쳤다.

나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은 다들 탄산음료를 주문해 잔을 채웠지만, 황지호는 노친네답게 혼자 차가운 녹차였다.

“다들 응원하러 와 줘서 고마워.”

“구경하는 거 재밌었어!”

“맞아요. 체스는 잘 모르지만 둬 보고 싶어졌어요.”

“다음 주부터 스테일메이트에서 초보자를 위한 체스 강습을 한대.”

“진짜요? 같이 가실래요?”

“응, 가자. 근로 알바랑 시간도 안 겹칠 것 같아.”

얘기를 들어 보니 사월세음과 한이는 체스를 시작할 것 같다.

스테일메이트에서 화려하게 대회를 열고, 연이어 초보자 체스 강습을 준비한 건 이렇게 은광고 내 체스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였을 거다.

“안심은 언제 나오냐.”

“지금 레스팅에 들어갔을 테니까, 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레스팅?”

“익힌 직후엔 고기 안의 육즙이 팽창돼서 압력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육즙이 다시 고기 섬유질에 퍼질 때까지 실온에 두고 기다리는 게 레스팅이야.”

미식가 맹효돈은 체스보다는 곧 나올 안심과 꽃등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맹효돈은 김유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드문드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남고생 맹효돈이 김유리와 대화하는 데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육회는 처음 먹어 봐. 특이하다.”

권레나는 한우 코스 첫 요리로 나온 청어알로 식감을 살린 육회를 먹으며 놀란 얼굴을 했다.

권레나는 육회 말고도 다른 메뉴들도 전부 생소한 모양이다.

안심과 꽃등심이 나오기 전, 코스 요리로 몇 점씩 나온 메뉴는 치맛살, 부챗살, 차돌박이, 새우살, 안심추리.

권레나가 이 중 먹어 본 건 급식에 나온 것들뿐이라 했다.

300억이나 받아 놓고 그 양부모는 권레나한테 한우를 사 준 적이 없나 보다.

“뭐가 제일 맛있었어? 그걸로 더 시킬게.”

“응? 어쩌지, 전부 맛있는데.”

내 질문에 권레나가 주저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전부 맛있게 먹었다면 어쩔 수 없었다.

모든 메뉴를 전부 추가로 시키기로 했다.

“지호가 만든 파채무침 소스, 엄청 맛있네요! 왜죠?”

“……분하지만 맛있어.”

“내가 직접 조합한 건데 맛이 없을 리가. 그런데 왜 분해하는 거지?”

옆 테이블에서는 황지호가 기본 소스를 배합해 기가 막힌 파채무침 소스를 선보였다.

나이를 괜히 먹은 게 아닌가 보다.

그뿐 아니라 황지호는 귀신같이 사월세음과 한이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골라 두 사람에게 먹였다.

“배부른데 지호가 고른 메뉴가 맛있어서 자꾸 먹게 되네요.”

“……분하지만 정말 맛있어.”

“하하하! 분해하는 걸 보니까 더 먹이고 싶어지네.”

한식보다 양식을 선호하는 사월세음.

단맛을 사랑하는 한이.

두 사람은 한우는 그다지 먹지 않을 줄 알았는데, 황지호 덕에 많이 먹게 되었다.

‘황지호는 우리 반 아이들 중에 저 둘을 가장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사월세음은 만우절에 황지호를 찾아오던 은서호를 구한 은인.

한이는 황지호의 친우였던 청호가 창시한 태호권의 계승자.

두 사람에게 가장 많이 장난질을 걸고 귀찮게 구는 황지호지만, 저렇게 먹이는 걸 보니 아끼고 있는가 보다.

“그만 처웃어.”

“지호는 너무 많이 웃어요!”

“하하하!”

정색하면서도 젓가락을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며 황지호는 계속 처웃었다.

황지호가 1학년 0반의 최고 돌아이로서의 입지가 점점 단단해지는 것 같다.

“그린이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예약 룸 따로 잡았으니까 오라고 했는데…… 안 된대. 저녁엔 약속이 있나 봐.”

식사를 마쳤을 때, 권레나와 김유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약속이라…….’

아마 민그린은 송대석의 집에 찾아갔을 거다.

아쉬워하는 두 사람을 달랠 겸, 제안을 하나 했다.

“2차로 디저트 카페 갈까.”

“가요!”

“갈래.”

“나도.”

이 말에 사월세음, 한이, 맹효돈이 거의 동시에 답해 왔다.

*    *    *

2차로 간 곳은 황명 타워에 입점한 케이크 뷔페.

황지호가 아이들을 먹이는 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케이크 고르는 것을 자처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끊임없이 먹게 되었다.

황지호의 케이크 선택은 탁월했다.

방금 내 몫으로 골라 온 오렌지 필과 글레이즈가 들어간 파운드케이크도 내 입맛에 딱 맞았다.

한이의 말대로 분하지만 맛있었다.

“저 새끼 잘 골라 오네.”

“배부른데 먹게 되네요.”

“……분해.”

“맛있어! 샐러리 롤케이크는 쳐다도 안 봤는데.”

“그치?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

내 옆에 앉은 황지호가 신나게 처웃으며 아이들의 말을 듣다가, 잠시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번에 재호를 울릴 뻔한 이후로 많이 연습했지.”

해산물을 잘 못 먹는 은재호한테 전복과 해삼을 투척한 그 사건 말하는 건가.

“그럼 또 고르러 가 볼까.”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크 바로 이동했다.

호족의 수장을 부려 먹는 셈인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응?’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저번에 본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잖아.’

전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세계 5대 명품 패션 브랜드 중 하나, ‘느루’.

그는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답게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라펠 재킷의 깃에 놓인 자수가 몹시 눈에 띄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손도 못 댈 디자인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디자이너는 벙글거리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한 번 본 걸 기억한 건가?’

반사적으로 묵례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사라졌다.

“자, 다음 케이크가 왔다! 하하하!”

“맛있어 보여.”

“이번엔 맛없을지도 몰라……!”

“일단 먹자.”

황지호의 등장으로 다시 포크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들고 온 머랭을 올린 엔젤 푸드 케이크도 매우 맛있었다.

*    *    *

케이크 뷔페 카페 영업 종료 시각까지 대화하다 해산한 후.

내 기숙사 방.

0반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방에 들어오니 몸이 무거워졌다.

체스대회에서 곽경구와 염준열을 상대하느라 생각보다 심력을 많이 소모했나 보다.

‘축하 메시지…… 답장해야 하는데.’

씻고 나오니 메시지를 확인할 기력이 없어 그대로 침대 위로 무너져 평소대로 꿈 없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오후 늦게 시작하는 선상 파티에 참석하기 전, 황명호 대저택에 들르기로 했다.

가기 전에 황지호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해 둔 작전 중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 정해야 해. 그리고 중요한 볼일도 있어.’

현관에 도착하니, 나를 본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조의신, 그 짐은 뭐냐.”

“올무 선물.”

내 양손은 올무에게 줘야 하는 선물로 가득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