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05)
종로1가, 붉은 사자 팀 전용 초고층 빌딩.
용족의 수장 청룡과 용왕신의 무녀가 공동으로 설계한 결계가 새겨진 포털 너머, 거주 플로어.
만찬을 마치고 온 염준열은 곧바로 용제건의 방 앞으로 찾아갔다.
“들어오렴.”
염준열의 기척을 읽은 용제건이 바로 입실 허가를 내줬다.
자동문이 열리자, 세 개의 체스보드를 펴 놓고 있는 용제건이 보였다.
‘복기 중이시구나.’
오늘 치른 두 개의 준결승전과 하나의 결승전.
세 개의 대국을 재현한 체스 피스의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준결승전에서 만난 승현이와 치른 내 대국이구나. 지금 봐도 치열하네. 조금만 방심해도 졌을 거야. 저쪽은 경구랑 의신이의 대결이겠지.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건 결승전…….’
다시 패배의 기억이 떠오르려 했지만, 가족들의 위로 덕인지 그리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표정을 보니 체스를 두러 온 건 아니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염준열은 용제건의 날카로운 감에 감탄하며 차분히 답변했다.
“제건이 형, 만찬에서 어떤 진족을 만났어요.”
염준열은 만찬 때 있던 일을 간단히 전했다.
TC 그룹 소유의 에어 호텔, 스노우 앤 에어의 호텔 라운지.
홀연히 나타난 붉은 드레스의 진족 여성.
그녀가 남긴 말들, 아이템 카드.
마지막에 정체불명의 향수를 뿌리곤 사라진 그녀.
다른 진족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용족들.
염준열이 말을 마치자, 용제건이 물어 왔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녀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고?”
“네. 붉은색이었어요.”
염준열의 대답에 일순 황홀해하는 얼굴을 하던 용제건.
용제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진족 여성이 남긴 아이템 카드를 살펴보았다.
‘제건이 형은 이상한 포인트에 주목하네.’
용제건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황홀해하고 무언가에 관심을 쏟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긴 했다.
염준열은 우선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 진족은 누구죠?”
“먼 옛날에 거래했던 이야. 내가 그녀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지.”
그녀의 아들?
그 말썽꾸러기라는 아들인가 보다.
궁금하긴 하지만, 남의 가정사와 관련이 있으니 염준열은 캐묻는 걸 멈추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드디어 대가를 치를 생각인가 보구나.”
용제건은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며 말했다.
실체화된 아이템 옆에 봉투가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카드 속에 아이템 외에 다른 물질도 포함시킬 수 있는 건 제작자뿐.
저건 아이템 제작자로부터 온 메시지일 것이다.
용제건은 봉투 안의 내용물을 전부 읽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염준열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염준열은 봉투의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고맙다, 준열아.”
“아니에요. 전 그냥 아이템 카드를 전한 것밖에 없는데요.”
“하하, 아니야. 그녀는 만나기 어려운 진족이니까. 정말 큰일을 해 줬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 진족 여성의 말대로 용제건이 기뻐하니 다행이다.
염준열은 그렇게 생각하며 용제건의 방을 떠났다.
* * *
“귀엽다!”
“와, 저희 방에 놔도 되나요?”
“사진 찍어야지!”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본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기뻐했다.
오늘 준비해 온 것들은 애견하우스.
숨을 곳이 없어 매트로 파고든 우리 올무를 위해서 산 거다.
준비한 디자인들은 원목 소재의 창문이 달린 집 형태, 큐브 형태, 인디언 텐트, 과일 모양 등등.
황지호의 말대로 올무를 두고 생각하면 내 지능이 떨어지는 탓인지, 올무가 뭘 좋아할지 알 수 없어 전부 사기로 했다.
왕왕!
DIY 키트를 이용해 하나하나 완성하는 동안 올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곁을 지켰다.
똑똑한 올무는 이게 다 자기 집이라는 걸 알아보나 보다.
“올무야, 어디에서 지내고 싶어?”
백호군의 도움을 받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완성된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디어 손이 비어 올무를 쓰다듬으며 물었지만, 올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에 가 봐.”
하지만 올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만들던 중에 눈을 빛내는 걸 봤을 때, 신경 쓰이는 집이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올무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다.
또 사야지.
애견하우스 전문 업체의 웹 사이트 주소를 10개 정도 떠올리고 있을 때.
끄응…….
올무가 내 무릎을 향해 폴짝폴짝 뛰면서 안아 달라고 애교를 부려 왔다.
두뇌를 풀가동해 올무의 뜻을 파악해 봤다.
‘설마, 내 품 안이 제일 마음에 드는 건가!’
결론을 내린 나는 올무를 안아 들었다.
“그랬구나, 올무야! 빨리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왕왕!
이게 정답이었는지, 올무가 밝은 소리로 짖었다.
거기에 똑똑한 우리 올무는 내가 체스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아는지, 평소 보여 주지 않았던 타입의 재롱도 보여 줬다.
은이호가 전에 말해 준 그 승리 기념 재롱인가 보다.
체스대회에서 우승한 보람이 느껴졌다.
“조의신, 네 지능 하락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구나.”
황지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올무의 뜻을 정확히 파악했으니, 지능이 떨어진 건 아니다.
시간 사정상, 올무와 체스를 두기는 어려울 것 같아 유아용 체스는 올무 전용 캐비닛에 넣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응접실에 있는 건 나, 올무, 황지호, 백호군.
오토매틱 메이드가 차와 다과를 내려놓고 응접실 문 밖으로 사라지자, 황지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적호가 깨어났다.”
“적호는 괜찮아?”
“그래. 아직 회복이 끝나지 않아서 다시 잠들었지만.”
무사히 회복 중인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 적호를 데리고 선상 파티에 가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깨어난 적호로부터 조사 자료를 정리한 홀로그램 칩을 건네받았다. 여기엔 적호가 당하는 순간도 녹화되어 있더군.”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며 붉은 진사 도자기 잔에 담긴 흑두감초차를 들이켰다.
검은콩과 감초를 배합한 흑두감초차.
울화를 가라앉히는 작용이 있는 전통차라고 들었는데, 적호 때문에 고른 선택인가 보다.
“저강렵은 당시 ‘그분’이라는 존재로부터 선상 파티를 노리라는 명을 받던 중이었어. 적호는 당시, 내가 축복을 내린 장비로 강화한 적연(赤煙) 스킬로 몸을 숨기고 있었지.”
황지호가 홀로그램 영상을 전개했다.
영상 안에는 로브로 몸을 숨긴 자와 몸집이 큰 자가 비치고 있었다.
‘저게 저강렵이구나,’
저강렵으로 추측되는 진족이 쇠스랑 형태의 무기, 상보심금파(上寶沁金耙)를 쥐고 있었다.
해저의 깊이를 재기 위해 만들어진 제천대성의 여의봉과 달리 처음부터 무기로서 만들어진 상보심금파.
경우에 따라선 여의봉보다 높게 쳐주기도 하는 보물이었다.
“내가 강화한 상태인 적호의 적연을…… ‘그분’이라는 자가 꿰뚫어 본 것 같더군.”
화면 속에서 음성변조기를 사용한 듯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강렵,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사용해라, 당장.]
[네? 아이고, 상보심금파의 갈래는 하루 아홉 번…… 아니, 여덟 번밖에 사용을 못 하는뎁쇼!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요!]
[어서! 네 뒤다.]
지금 이 영상을 촬영한 자, 적호는 저강렵의 뒤에 서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적호가 몸을 피하려 한 듯했으나, 그 전에 쇠스랑이 화면을 향해 날아왔다.
화면이 흔들리다가 이내 점멸했다.
“적호는 상보심금파의 갈래에 몸이 꿰뚫렸어. 하지만 적연을 풀지 않고 여기까지 도망 왔지. 상대는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걸 알아도 그게 적호인지 확신은 못 할 거다.”
‘그분’이라는 자는 어느 정도 적연을 꿰뚫어 보는 모양이다.
그것도 황지호가 강화한 버전을.
황지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황지호의 손짓에 홀로그램이 전환되며, 저강렵의 사진과 프로필이 떠올랐다.
“저강렵은 이계 충돌 이후, 정단사자에서 해임되었다고 하더군. 타락했다는 게 그 이유라는데, 자세한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어. 어쨌든 저강렵의 타락에 분노한 상위 존재도 꽤 있는 모양이야.”
황지호가 진사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빛냈다.
“그 탓에 저강렵은 현재 능력치가 상당히 떨어진 상태다. ‘상당히’라고는 해도 천봉원수였던 역량을 생각하면 망할 달토끼들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황지호, 네 만전의 상태와 비교하면 어때?”
“상보심금파는 성가시겠지만, 그래도 문제없다.”
황지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압승할 자신이 있나 보다.
“삼청 중 하나, 도덕천존 태상노군이 돼지의 행보에 크게 분노해서 상보심금파를 거두려 한 모양이더군. 상보심금파도 이에 응했고.”
상보심금파가 태상노군의 뜻에 응해?
삼청이 팔괘로에서 손수 만든 무기쯤 되면 어느 정도 의지를 갖나 보다.
“하지만 태상노군은 상위 존재라 이 세계에 간섭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진족이나 인간을 통해야 하는데…… 그의 눈에 차는 이가 없어서 미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황지호의 말이 끝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게임 속에 있던 선상 파티와 유사한 이벤트.
주오, TC 그룹 차기 총수의 암살 계획.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긴 꼬리.
상보심금파와 저강렵.
적호.
“제안할 게 있는데.”
“또 수상하게 웃고 있군. 말해 봐.”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또 수상하게 웃었나 보다.
조금 표정 관리를 하며 내가 생각한 계획을 설명했다.
설명 초반부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황지호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난 반대다.”
“왜.”
“마음에 들지 않아.”
상석에 앉은 황지호 말고도, 내 맞은편에 앉은 백호군도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제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호족이 돈족의 배신을 눈치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잖아. 네가 앞에 나서면 안 돼.”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
“적호가 아홉 갈래로 찢기면서 버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이 말에 황지호가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납득한 모양이다.
“아직 긴 꼬리에 대한 단서는 거의 없는 상태잖아. 네가 직접 나선 게 드러나면 긴 꼬리가 몸을 더 사릴 거야.”
“그건 그렇지만.”
황지호가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아직 김이 펄펄 나는 흑두감초차를 빠르게 삼켰다.
차를 전부 마시고 난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거의’? 조의신 너는 뭔가 눈치챈 게 있나.”
눈치채고 말고를 떠나, 게임 속에서 흑막 측이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행동을 한 진족이 있다.
기회를 봐서 호족에 알리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절대 배신자가 아닐 진족은 알아. 용족은 배신자가 아니야.”
게임 속에서 용제건은 학생들을 지키다 죽었다.
거기에 염준열이 사망한 이후, 수장인 청룡을 중심으로 용족이 봉기했었으니까.
“증거는?”
“지금은 없는데 하여튼 아니야.”
“……그래.”
나를 빤히 보던 황지호가 갑자기 눈을 조금 반짝거렸다.
“딱히 숨기려고 한 건 아니지만, 호족은 배신자가 아닌 긴 꼬리를 하나 파악하고 있어. 이쪽은 ‘증거’도 있다.”
뭐, 그런 게 있었나.
“금방 눈치챌 줄 알았는데 정말로 지능이 떨어진 거냐, 조의신. 그 ‘증거’는 네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접했는데.”
황명호 대저택에 올 때마다 접한 것?
여태까지 대저택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긴 꼬리와 연관된 것…….’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올무가 내 품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견족(犬族)이구나.”
“하하하! 이제 깨달은 거냐!”
끄응…….
똑똑한 우리 올무가 대화의 주제를 알고 있는지 불안해하는 얼굴로 올려다봤다.
“견족과 우리 호족은 은밀히 동맹을 맺었어. 맹우인 달토끼보다 가까운 사이야. 각각의 신수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서로의 신기를 일부 공유했었지.”
돈족이 멧돼지를 이용해 올무를 직접 죽이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나.
게임 속 솜뭉치는 돈족이 아닌 부정 입학자의 손에 죽었었다.
“신수의 진정한 모습은 범에 가까워. 호족의 신역에 남은 신기를 잃어 생존을 위해 동맹 관계인 견족의 신기를 빌려 이 모습이 된 거지.”
솜뭉치 같은 우리 올무가 끙끙거리며 애교를 부려 왔다.
어딘지 의기소침한 게 이 대화가 많이 신경 쓰이나 보다.
올무의 진짜 모습이 뭐든 상관없는데.
“괜찮아, 올무야. 네가 호랑이라도 멋있고 똑똑하고 귀여울 거야.”
……왕왕!
내 말을 알아들은 우리 똑똑한 올무가 기운을 차렸다.
전력으로 안겨 와 나도 마주 안아 줬다.
한편, 황지호는 재미없어하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저놈이 우리 올무랑 안 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럼 나중에 보자.”
황지호와 이야기를 마치고, 저택을 나설 때.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조르르 다가왔다.
“어! 자고 가는 거 아니셨어요?”
“의신이 오빠랑 같이하려고 새 VR 게임 소프트랑 기어도 사 놨는데!”
“사진 많이 찍어서 보여 드리려고 했었는데요…….”
아쉽지만 오늘 자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미안해, 다음에 올게. 대신 올무랑 많이 놀아 줘.”
“네…….”
마음이 아프다.
삼 남매를 두고 가는 것도 슬프고, 우리 올무와 귀갓길 산책을 즐기지 못하는 것도 슬펐다.
현관에 남은 아이들과 올무를 뒤로하고, 미로정원 이동용 에어 셔틀에 올라타려 할 때.
“네가 실패할 것 같으면 바로 개입할 거다.”
황지호가 퉁명스레 말했다.
올무 얘기를 장난스럽게 하길래 크게 걱정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조심해라, 조의신.”
죽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호군도 한마디 했다.
나는 두 호족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셔틀에 올라탔다.
‘반은 도박이지만, 성공하면 흑막의 전력을 깎을 수 있어.’
각오를 굳히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재확인하고, 출항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