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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31화 (13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31)

잠든 민그린.

꿈속의 그녀는 처음 홍경복 화백의 자택에 방문한 날로 돌아가 있었다.

먹과 아교 냄새로 가득한 화실.

여러 개의 벼루 위에 곱게 갈린 채묵.

벽 곳곳에 걸려 있는 화폭(畫幅).

홍경복의 붓끝이 그리는 새로운 세계.

민그린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빛나 보였다.

들뜬 그녀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져도 홍경복은 웃으며 전부 답해 줬다.

—화백 할아버지, 저기 있는 그림은 뭐예요? 왜 족자에도, 액자에도 안 들어가 있어요?

민그린이 화실 한구석에 있는 화판을 가리키며 묻자 홍경복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

—…….

—화백 할아버지?

—저 그림은 미완성이란다.

—왜요?

—더 그릴 수가 없으니까.

—왜요?

—저 그림을 그려 달라 부탁한 분이 이제 안 계시니까.

—왜요?

—…….

민그린이 계속 ‘왜요?’를 반복해도 홍경복은 더는 답변해 주지 않았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한 번 본 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답은 듣지 못했지만 민그린은 홍경복의 붓놀림에 정신을 뺏기는 바람에 이유를 물을 기회를 잃었다.

그녀는 홍경복의 말을 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 그림을 이어서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아들었다.

‘그럼 내가 몰래 그려서 완성하면, 기뻐해 주실지도 몰라!’

민그린은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붓을 들었다.

“그린아, 다 왔어.”

그녀는 송대석의 목소리로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어……!”

민그린이 눈을 뜨니 송대석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단단하게 잡혀 있는 탓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송대석의 양팔에 안겨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대석아?”

민그린이 놀라서 입을 뻐끔거릴 때.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웨어러블 디바이스에서 뒤늦게 알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면 중에는 자동으로 알람이 꺼지도록 설정을 해 둔 탓이었다.

디바이스와 연동된 AR 글래스 위에 떠오른 발신자 이력의 반 이상이 송대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그린이 조금 붉어졌던 얼굴을 새하얗게 바꾸고 사과했다.

“대석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나도 모르게 잠들어서…….”

“괜찮아.”

“진짜 미안! 무거웠지? 내려 줘. 걸어갈게.”

민그린이 버둥거리자 담요 사이로 양말을 신은 발이 빠져나왔다.

그녀가 외출할 때 항상 신고 다니는, 은광고 입학 당시에 학교에서 받은 플레이어 슈즈가 보이지 않았다.

송대석이 그녀의 신발을 김유리의 집에 그대로 두고 온 것 같았다.

“신발…….”

“깜빡했다. 미안. 집 안까지 데려다줄게.”

“집 안까지 이렇게 간다고?”

송대석은 대답 대신 민그린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줬다.

딩동.

그때, 이어링 타입 디바이스에 진동과 함께 전화 알림 메시지가 떴다.

[발신자: 홍경복 사부님]

“전화 온 거야?”

“응.”

그녀의 표정을 본 그가 발신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화백님이셔?”

“응…….”

민그린이 등교 거부자가 된 계기가 된 괴롭힘.

그 주체는 학교만이 아니라 홍경복의 화실에도 있었다.

홍경복은 그 괴롭힘에 동참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한 제자들을 모두 공개적으로 파문해 버렸다.

그는 단순히 제자들을 내친 것에 그친 게 아니었다.

그는 전 제자들과의 공동 작품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들이 선물한 화구를 사용한 작품들을 전부 불태울 정도로 분노했었다.

‘그때는 화백님이 취한 그 후속 조치가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지 못했는데.’

그 전 제자들이 미술계에서 어떻게 매장되고,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본 지금이라면 안다.

‘보는 내 눈에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고 속이 시원했지만, 화백님은 혼자가 되셨어. 그렇게 칼같이 인연을 다 잘라 내는 건 쉽지 않았을 거야.’

유일하게 남은 제자인 민그린의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그녀가 화실에 나오지 않게 되어 사실상 제자를 전부 잃은 홍경복 화백.

그는 송대석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송대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봐. 내가 너 찾을 때 연락드려서 걱정하고 계실 거야.”

민그린은 사건이 터진 직후엔 자신의 일에 벅차 홍경복 화백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지금은 죄송스러운 마음에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지만, 송대석의 말과 온기에 용기를 받아 통화 응답 버튼을 눌렀다.

*    *    *

민그린이 화가의 길로 이끈 홍경복화백의 미완성 그림, ‘이무기의 귀천’.

그리고 홍경복과 전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은 어둠의 시대를 지낸 동시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친분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유지와 단서…….’

화면 속 전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은 이게 무엇의 단서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진족’과 ‘단서’ 두 단어를 말하는 걸 보니 짐작이 갔다.

‘한반도에서 어느 진족들이 만든 동결형 이계의 위치와 수에 대한 단서겠지. 혼을 묶는 계약 때문에 저 정도밖에 말할 수 없는 거야.’

그가 단서를 남겼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은광고에서 떠도는 괴담 중 하나 속에 숨겨 놨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림이 어떻게 단서가 되는 거지. 홍경복이 뭔가 알아냈다면 손 놓고 있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이무기의 귀천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화 중 하나다.

현재 그 그림은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에 곱게 전시된 상태로, 제대로 관람하려면 미술관 안에서도 줄을 서야 할 정도다.

‘관람객 중에는 인간은 물론이고, 진족도 있었을 거야. 아무도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한 건 조금 이상해.’

그때, 문득 황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어는 고차원적인 의사 전달 체계지만 한계가 있어.

그 말을 하며 황지호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고서를 해석해 냈었다.

어쩌면 이 단서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황지호의 해석 같은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다.

‘또 지부장은 이 그림이 ‘내가 남긴 단서 중 하나’라고 말했어. 단서는 더 있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풍경이 급변했다.

지직, 지지직…….

노이즈 사이로 지부장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우수한 학생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면…… 숨겨진 스테이지로…….

운명력의 영향이 끝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음, 노이즈 때문에 잘 안 들리네. 구형 시뮬레이터라 오류가 생겼나 보다.”

이어서 성시완의 목소리도 들렸다.

“숨겨진 스테이지에 가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한 것 같은데. 뭐가 뭔지 모르겠네.”

시뮬레이션의 보스 룸 안.

이 안에는 잡음이 섞인 영상이 반복 재생되는 영상이 하나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에너미를 일시적으로 테이밍해서 끌고 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하하하!”

게임 속에선 괴악한 형식과 난이도의 탑에서 가끔 그런 기믹이 있긴 했었다.

이전 층의 에너미를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꼬여 내 다음 층까지 끌고 가거나 특정 포인트까지 에너미를 유도하여 희생양으로 삼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도 했다.

역대 비밀 결사의 소속원 중의 누군가가 시도했을 법하다.

‘설마 괴담 속에서 비밀 결사의 산짐승을 제물로 어쩌고 하는 건 거기서 나온 거 아닌가.’

괴담이 사실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되어 탄생하는지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 이상은 단서를 찾기 힘들 것 같네.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성시완의 말에 계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력이라는 사기 스킬을 가진 나만은 숨겨진 단서를 찾아냈지만.

그런데 왜 나 혼자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걸까.

‘내가 가진 능력이나 특성 중 무언가가 저 ‘조건’을 충족시킨 거야.’

단순히 운명력 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두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시뮬레이션 포기’ 버튼을 누르기 전, 성시완에게 신경 쓰였던 것을 하나 물었다.

“성시완 선배님. 처음 영상 보실 때 놀라셨던 것 같은데 혹시 영상에 나온 분을 아시나요?”

“저 영상에 나온 분은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와 닮으셨어. 사진이나 영상으로밖에 뵌 적이 없고, 저 스크린에 낀 노이즈가 심해서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말을 듣자 어느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성시완과 성국언은 사촌지간이야. 그렇다면…….’

전 지부장은 성국언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셈이었다.

*    *    *

두 지익회 선배의 배웅을 받으며 도착한 내 기숙사 방.

혼자 남은 나는 단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무기의 귀천을 직접 보고, 또 홍경복 화백과도 이야기하고 싶은데.’

전자는 미술관에 일찍 가 줄만 서면 되겠지만, 후자가 문제다.

현재 홍경복 화백은 서울을 떠나 은거 중이고 민그린과도 거의 연이 끊긴 상태니까.

‘이 문제는 다른 문제를 해결하고 생각해 볼까. 성국언이 준 첫 번째 과제는 해결했지만, 아직 두 번째 괴담에 관해선 조사가 안 끝났어.’

천익산 귀문에 관한 괴담이 남아 있었다.

나는 3학년 0반의 상거지 반장 우기환이 연구한 천익산 자료를 살피며 조사 계획을 짜다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1학년 건물 출입구 앞.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민그린이 달리는 게 보였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소리쳤다.

“도, 도와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도와달라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민그린이 자기 힘으로 도망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잠깐, 플레이어 슈즈를 신고 있지 않잖아!’

민그린은 스킬을 쓰다가 신발이 망가진 건지, 밑창이 떨어진 너덜너덜한 일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어제 김유리 집에 플레이어 슈즈를 놓고 간 탓에 저걸 신은 건가.

‘민그린 자금 사정을 생각하면 학교에서 준 플레이어 슈즈 외에 예비 신발이 있을 리가 없지.’

왜 나는 민그린에게 예비 신발을 선물해 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내 배려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반성하고 있을 때, 큰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민그린 화백님! 자, 잠깐만 얘기를 들어 주세욧!”

“아, 님은 좀 꺼져!”

“너부터 꺼지셈.”

“저기, 저기에 화백님이 계신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학생들의 교복 옷깃에는 붓이나 팔레트, 조각도 모양의 배지가 붙어 있었다.

저걸 보니 이전에 함근형 선생님께 쫄아서 도망친 미술부와 동양화 소모임 놈들 같았다.

‘함근형 선생님이 출장으로 없는 지금을 노리고 온 건가.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아직 등교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우리 반은 나와 민그린 외에는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장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애들한테, 간식 선물하려고 일찍 왔는데. 사람들이 몰려와서……!”

낯선 사람이 몰려와 긴장한 탓인지 숨을 몰아쉬는 민그린의 손에는 종이봉투가 두 개 들려 있었다.

하나는 김유리에게 빌린 담요.

남은 하나는 아몬드가 덕지덕지 박혀 있는 쿠키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제 공부 중에 잠들어 버린 탓에 송대석을 소환해 버린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이대로 민그린을 데리고 도망칠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내일도, 모레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거야. 쓴맛을 보여 줘서 다시는 들이대지 못하게 해 주자.’

우선 민그린을 내 등 뒤에 숨기고 어떤 스킬을 쓸까 고민할 때.

내 눈으로 이능파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변하는 시야와 함께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어둠 속에서 호족의 눈을 사용했을 때의 감각과 비슷해!’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처음 보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스킬 ‘안광’을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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