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32)
이 세계에 와서도 상태창으로 몇 번 본 적이 있는 스킬인 안광.
안광 스킬은 백호군과 적호 그리고 황지호와 이사장 버전인 황명호도 가지고 있었다.
‘진짜 내가 알고 있는 그 안광 스킬이 맞나.’
SR급 장비 아이템 ‘은둔자의 어둠을 숨긴 롯드’를 꺼내 들어 미술부와 동양화 소모임 일당을 향해 겨누며 스킬 상세 설명을 확인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스킬 정보를 열람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에 두 개 떠오르고, 푸른빛의 윈도우가 눈앞에 나타났다.
[스킬명] 안광
[희귀도] SSR
[스킬 레벨] 1
[효과] 시선에 이능파를 실어 특수한 현상을 일으킨다.
[설명]
일부 진족이 보유한 희귀 스킬.
특정한 조건을 달성할 시, 극히 드물게 인간도 습득이 가능하다.
‘플마고 설정집에 나온 것과 똑같아!’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그 안광 스킬이었다.
게임에서는 설명에 나온 ‘특정한 조건’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조건 하나는 짐작이 갔다.
‘호족의 신보(神寶)가 나타나는 샘의 정수를, 녹족이 영약 의 형태로 가공한 것을 일주일간 먹어야 했던 거구나.’
거기에 이 조건을 달성해도 ‘극히 드물게’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니, 스킬 입수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야, 어떡하지. 난 에어보드도 안 가지고 다니는데!”
민그린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 상황은 사실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은 게 문제였다.
‘기왕이면 새로 습득한 스킬을 시험해 볼까.’
안광 스킬의 레벨은 현재 1 .
안광이 특수한 효과를 가지긴 했지만 레벨이 낮다.
아직 이 정도면 다른 스킬이나 광림으로도 보일 수 있으니, 공개적으로 사용해도 괜찮을 거다.
‘내가 이 눈을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수도 있어.’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눈에 이능파가 몰리는 감각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었다.
확연히 향상된 시력.
안구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이능파의 흐름.
‘이게 눈으로 잡는다는 감각이구나!’
서로를 필사적으로 방해하면서도 엎치락뒤치락 민그린을 향해 오는 미술부, 동양화 소모임 패거리.
눈에 이능파를 실어 이들을 주시했다.
우우웅—!
머리와 눈이 울리는 감각과 함께 시야에 섬광이 스쳐 갔다.
울림이 멎은 직후, 내 안광이 스쳐 지나간 이들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거나 움직임이 둔해졌다.
“어? 몸이 무거워졌어.”
“······!”
“잠깐, 아까 이능파가 느껴졌는데?”
어두울수록 힘을 발하는 호족의 눈.
여차하면 어둠 속성 마법으로 공격도 하고 주변의 조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는데.
‘밝은 곳에서 사용했는데도 이 정도인가.’
은광고 소속의 플레이어를 상대로도 이만큼 먹히다니, 효과는 상상 이상인 것 같다.
“무명의 초신성이다!”
“쟤가 스킬이나 광림 쓴 거 같은데.”
“······아, 쟤도 1학년 0반이었지.”
미술계 동아리 일당들의 눈에는 민그린 화백만 보였나 보다.
이제야 나를 인식하고 당황한 그들을 향해 롯드를 겨누며 말했다.
“돌아가 주세요.”
롯드 근처에서 뭉글거리는 마나의 흐름을 감지한 이들이 주저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입을 여는 놈들은 안광으로 완전히 붙잡지 못할 만큼 우수하고 담도 큰 데다 민그린을 향한 팬심이 거대했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얘기할게! 5분만 줘!”
“해치지 않아욧!”
“함근형 선생님한테 두 번 부탁드렸다가 거절당했는데, 무서워서 세 번째는 부탁드릴 수는 없었어!”
“그래. 모처럼 민그린 화백님이 우리 학교 학생인 걸 알았는데 한 번도 뵙지 못하고 작업 과정도 못 보다니. 말도 안 돼!”
“수줍어하시는 모습도 겸허함 그 자체야······. 이런 분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어.”
“······, ······!”
심지어 입이 굳은 놈도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찔거리며 민그린과 대화하고 싶다는 어필을 해 왔다.
개념이 없을 뿐이지 진짜 민그린 팬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낯선 사람을 여러 명 상대하는 게 불가능한 민그린과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돼요. 돌아가 주세요. 이 이상 접근하시면 응전하겠습니다.”
슬금슬금 이쪽으로 걸어오려는 3학년 학생이 보여 안광 스킬의 출력을 올렸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우우웅—!
내 안구에 가해지는 부담도 커졌지만, 저들을 누르는 압력은 몇 배 더 커진 것 같았다.
“크윽······!”
“자, 잠깐. 쟤 아직 주문도 안 외쳤잖아!”
“마법 말고도 다른 스킬을 쓰고 있는 거야?”
“설마 무언 캐스팅 중인 건 아니겠지!”
지금 몰려온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안광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할 것 같지만, 문제는 남은 반이었다.
안광으로 신체의 자유가 일부 빼앗기고도 아직 여력이 있었다.
‘전부 어둠 마법으로 덮어 버려서 교무실로 끌고 가 버릴까.’
은휘관으로 끌고 가 이사장실 앞에 던져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민그린에게 겁을 준 놈들이니, 1학년 0반을 마음에 들어 하는 호족 이사장에게 직접 털리게 만드는 건 어떨까.
어차피 난 0반이니 다소 정신이 나가 보이는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할 거다.
계획을 세우고 주문을 골라 캐스팅을 시작하려 했을 때.
딱.
팟! 파앗! 파팟!
손가락을 튀기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공간이 안광으로 묶여 있던 이들을 사로잡았다.
옥색빛을 띤 공간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안녕. 아침부터 소란스럽구나.”
용제건이 아주 상쾌한 얼굴로 웃으며 등장했다.
그는 내 뒤에 숨어 있는 민그린을 흘끗 보고 미술계 동아리 놈들을 바라봤다.
“용쌤! 저희, 민그린 화백님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좀 봐주세욧!”
“응, 안 돼.”
용제건의 성격상 어느 쪽이 더 본인에게 재미있을지 재보다가 정할 줄 알았는데.
바로 안 된다고 자를 줄은 몰랐다.
“함근형 학생부장 씨가 이 아이들을 잘 돌봐 달라고 했어. 문제가 생기면 나 0반 부담임 안 시켜 줄지도 몰라.”
1학년 0반의 부담임 자리를 노리느라 저런 건가.
학생인 내가 이능을 써서 제압하는 것보다는 교사가 개입해 마무리하는 게 깔끔하긴 할 거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처리해 준다면 믿고 맡길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떻게 할까. 준열이 얼굴이나 볼 겸 학생회에 맡겨야겠다.”
용제건은 염준열과 함께 등교했을 텐데, 일주일은 못 본 것 같은 태도로 말했다.
“그럼 조례하기 전까지는 돌아올게. 의신이 네가 잘하겠지만, 그린이 잘 챙기렴.”
용제건은 공간으로 학생들을 묶고 학생회관으로 날아가 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내 뒤에서 불안해하던 민그린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응······. 도와줘서 고마워.”
그녀는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함과 분함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게 실감이 나 그러는 걸 거다.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열심히 등교하고 변화하려는 모습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냐. 별거 안 했는데.”
“굉장한 이능파였어. 입학 전부터 이명을 받은 애는 다르구나. 특히, 이능파가 마나의 흐름을 타고 변화해서 롯드 위에 모이던 장면······! 그려 보고 싶을 정도로 멋졌어.”
민그린은 감사 인사를 하고 그녀가 자신이 목격한 장면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버려 두면 칭찬을 계속할 것 같아서 못 들은 척 대충 웃고 화제를 바꿨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직접 만든 거야? 애들이 좋아하겠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저기, 대석이가 어제 와서 화내거나 무섭게 굴지 않았어?”
그 귀신 같은 형상은 겉보기에는 좀 무서울 수도 있었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소꿉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져 훈훈해 보였다.
“아니. 안 그랬어.”
“진짜?”
“착해 보였어.”
“······진짜로?”
민그린은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한결같이 송대석이 착하고 다정해 보였다 말했다.
실제로 송대석은 좋은 놈이니 나는 맞는 말을 한 거다.
나는 놀랐을 민그린을 달랠 겸 계속 말을 걸며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사부님과 통화했어.”
잡담이 이어지던 중, 교실 안에 도착하자 그녀가 불쑥 화제를 바꿨다.
“······사부님 보고 싶다.”
민그린이 죽기 직전.
그녀는 그 사건 이후로 홍경복 화백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걸 가장 크게 후회했다.
무서운 경험을 했더니 사부가 생각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보러 가자.”
“어? 그래도······ 어······.”
민그린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홍경복이 번거로운 일을 겪고 제자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차마 발이 움직이지 않나 보다.
하지만 그녀는 변하기 위해 노력 중이고, 우리 반 아이들도 돕는 중이니 곧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가고 싶을 때 말해. 무인 에어버스나 에어택시를 전세로 빌릴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나는 대중교통은 못 이용하니까, 빌릴 수 있으면, 어······.”
“대신 홍경복 화백님께 같은 반 친구 데려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봐 줘.”
“응?”
사제의 상봉을 돕고 ‘이무기의 귀천’에 숨겨진 단서도 찾을 수 있으면 일거양득이 아닐까.
“한국화에도 관심이 있어서 홍경복 화백님은 한번 뵙고 싶었어. 화백님이 안 된다고 하셔도 바래다줄게. 여행하는 셈 치지 뭐.”
홍경복의 행보를 고려하면 하나 남은 제자의 반 친구를 보고 싶어 할 거다.
아마 민그린과 반 친구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직접 오시거나 개인 소유 에어 리무진을 빌려주실 것 같은데.
“······알았어.”
민그린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교실 자동문이 열렸다.
쉬익—.
“안녕.”
“안녕하세요!”
문이 열리고 등장한 건 한이와 사월세음이었다.
기숙사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쳐 그대로 함께 등교했나 보다.
나도 인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그럼 난 음료수랑 신발 사러 매점 다녀올게.”
“네? 신발이요? 어, 그린이 운동화가 망가졌네요.”
“네 친구가 공주님 안기 해서 데려갈 때 플레이어 슈즈를 놓고 갔었지.”
‘공주님 안기’라는 단어에 민그린이 얼굴색을 바꿨다.
“어, 어! 혹시 대석이가 나 데려갈 때 그거······ 반 애들이 다 본 거야?”
“응. 다 봤어.”
“어······.”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였어요! 대석이도 우리 반이죠?”
사월세음과 한이가 자연스레 민그린과 대화하는 걸 보고 교실 문을 닫았다.
사실 민그린이 준비해 온 아몬드 쿠키와 함께 마실 음료수와 갈아 신을 신발은 바로 사러 가고 싶었다.
그녀가 불안해할까 봐 혼자 둘 수 없어 누군가 등교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매점에 슬리퍼 파는 건 봤는데 플레이어 슈즈는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1학년 구역의 매점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매점에는 슬리퍼밖에 팔지 않았지만, 음료는 다양하게 팔고 있어 아침 다과회에서 아이들 취향에 맞춰 캔 음료와 우유를 준비할 수 있었다.
곧 평소 등교하던 아이들은 모두 도착해서 아침 다과회를 시작할 때.
예상치 못한 존재가 하나 끼어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애들 사이에 앉아 있잖아.’
용제건이 내 옆에서 웃는 얼굴로 녹차 파우더와 피스타치오 칩이 토핑된 아몬드 쿠키를 먹고 있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1학년 0반 아이들 상대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리 반 아이들은 착하고 좋은 아이들이니까 친해지고 싶은 건 당연하겠지만.
“오늘 아침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시 담임이니까 반 아이를 돕는 건 당연해. 아, 고마우면 함근형 학생부장 씨에게 꼭 한마디 전해 주렴. 내가 부담임했으면 좋겠다고.”
“······네?”
용제건이 미소 지으며 당황하는 민그린을 바라봤다.
그의 ‘1학년 0반의 부담임이 되겠다.’라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의신아, 무슨 일 있으면 부르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돕지 못해 아쉬웠단다.”
“용쌤! 의신이랑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의신이가 체스 대회에 나간 걸 계기로 알게 된 게 아닐까요?”
갑자기 화제가 이쪽으로 바뀌어 당황했다.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쯤 되면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다 깐죽거릴 때가 됐는데.’
황지호 쪽을 보니,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도 말없이 솔잎 맛 캔 음료를 들이켜고 있었다.
노친네 입맛에 맞춰 주려고 한 캔 사 왔더니 아주 잘 처마시고 있었다.
‘평소와는 반응이 다른데.’
시선을 느낀 황지호가 목소리를 낮추다 말했다.
“지금 진족의 수장 중 하나와 접촉 중이다.”
······이걸 용제건 앞에서 말해도 되나.
역시나, 인간보다 몇 배는 우수한 청력을 가진 용제건이 이 말을 듣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구?”
“꾀돌이.”
지금 호족의 수장과 서족의 수장이 어딘가에서 만나고 있는 것 같다.
* * *
1학년 0반에서 아침 다과회가 일어나는 같은 시각.
은광구의 유일한 마천루, 황명 타워.
30대의 모습을 한 황호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서족의 수장.”
“당신이 태만하게 구는 동안에는 외부 교류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참 뵙기 어려웠죠.”
다짜고짜 존댓말을 쓰는 꾀돌이를 보고 황호가 얼굴을 구겼다.
“아, 그리고 꾀돌이라고 불러 주세요. 황호.”
살살 웃는 얼굴이 더해지자 황호가 얼굴을 더더욱 구겼다.
예전부터 저 거슬리는 진족이 저런 모습을 보이면 항상 불길한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은광구를 지켜보는 ‘눈’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