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43)
그 목소리는 상보심금파에 꿰뚫렸을 때에 비해 훨씬 희미하게 들렸다.
‘아직 숙련도가 부족한 탓일지도 몰라. 그래도…….’
상보심금파의 목소리에 이전에 느꼈던 무력감은 없었다.
“조의신!”
함근형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상대하던 괴수종 에너미 뒤로 비행종 에너미가 내 쪽으로 협공을 시도하고 있었다.
‘모처럼 말을 걸어 줬으니 그 목소리에 응해 줘야지……!’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발동한 순간.
이능파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 그려졌다.
저강렵을 상대로는 일직선으로밖에 쏠 수 없었던 갈래.
하지만 그때와 전혀 달랐다.
콰직, 콰드드득—!
쏘아진 갈래는 괴수종 에너미의 소울 스톤을 꿰뚫었다.
그리고…….
콰콰콰—!
내 의지에 따라 호선을 그리며 휘어져 비행종 에너미의 머리를 베어 냈다.
에너미 소실 이펙트와 함께 디바이스에 토벌 완료 메시지가 두 개 떠올랐다.
기록된 에너미들의 등급은 SSR---, 최대 공헌자는 당연히 ‘무명의 초신성’이었다.
“괜한 참견을 할 뻔했군.”
함근형이 갈래가 남긴 잔상을 보며 감탄했다.
UR급 무기, 상보심금파의 출력을 새삼 실감했다.
‘땅을 향해 쐈으면 산이 깎여 나갔을 거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사부님이 계신 산을 훼손할 뻔했다.
앞으로 주의해서 싸워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함근형 선생님 쪽을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활을 쥐고 있을 뿐,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으실 건가요?”
“그래.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만.”
짐작이 간다고?
“네가 맹효돈을 구출할 때 썼던 까마귀 가면과 관련이 있겠지.”
함근형 선생님은 최편득 생일빵 사건 때 협력하셨으니 까마귀 가면을 모를 리가 없겠구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력, 까마귀 가면, 상보심금파.
내가 보인 행보에 궁금하고 신경 쓰이는 게 많을 텐데 제자를 배려해 묻지 않는 게 함근형 선생님다웠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시스템음이 사고를 중단시켰다.
함근형 선생님도 기척을 느꼈는지 이계의 틈을 노려봤다.
“지금은 토벌에 집중하자.”
“네.”
그 이후, 상보심금파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갈래를 움직이는 법을 배운 데다 뒤에는 최강의 담임 선생님이 계시니 두려울 게 없었다.
* * *
멀리 떨어져 함근형과 조의신, 두 수비대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인물들이 있었다.
송대석과 민그린.
이들도 이계 공략 파티에 지원했으나, 홍경복과 함근형의 반대로 이번에는 참관만 하기로 했다.
“방금 봤어? 저거 의신이가 한 거야?”
조의신이 에너미 두 체를 동시에 격파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민그린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을 지켜본 송대석은 짜증이 치솟았다.
‘그린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 ‘멋지다, 굉장해, 그려 보고 싶다!’ 이런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필이면 저기서 활약하고 있는 게 민그린에게 AR 글래스를 준 조의신이었다.
송대석은 그 수상한 부반장에게 고마우면서도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속도 모르고 민그린은 머릿속에서 그림 하나를 구상하고 있는지 디바이스에 발상을 메모하고 작은 스케치북에 크로키까지 하고 있었다.
“나, 내일부터 학교 나갈 거야.”
송대석은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그의 의도대로 민그린은 손을 멈추고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봤다.
“진짜?”
“어. 그 0반 스터디 모임에도 나갈게.”
“진짜로?”
민그린이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웃었다.
그 수상한 놈에게서 주의를 돌리고, 민그린이 기뻐하니 송대석의 기분도 굉장히 좋아졌다.
‘그분도 도와주신다고 했으니까…….’
후드를 쓴 민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송대석은 다짐을 굳혔다.
반은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1학년 0반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가리산 무쇠말재에 발생한 SSR급 던전 공략이 종료되었다.
예상대로 부상자는 아무도 없었다.
최대 공헌자는 성국언이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홍경복 화백이었다.
‘대체 무슨 이능을 사용 중인 걸까.’
공략 전과 다름없이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한복 차림의 홍경복 화백.
그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허허 웃고 있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옷이 찢기는 등 구른 흔적이 보이는 다른 이들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특히, 계이담은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먼지투성이였다.
“성 형의 손주들하고 은광고 후배들이 열심히 해 줬어. 최대 공헌자가 된 국언이,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화백님께서 양보해 주신 덕입니다.”
“겸손하구먼. 허허허! ”
성국언이 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정말 홍경복이 양보해 줬던 걸 거다.
“의신아, 이거 네가 다 잡은 거야? 헐.”
토벌 기록을 확인하던 성시완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았어요.”
“운으로 SSR급 에너미를 이렇게나 잡을 수 있으면 누가 고생해! 토벌 완료되었다고 기록된 시간대들의 인터벌도 그렇고…… 엄청 빠르네. 마법을 쓴 거야?”
“마법을 썼으면 캐스팅 시간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긴 어려워.”
성국언의 비서, 전무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전무영은 마법에 관심이 있었지…….’
은밀 행동에 특화된 전무영의 공격력은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법을 고려했지만, 습득에 애를 먹고 있었을 거다.
“허허…….”
“마법 말고도 물리계 공격도…….”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지던 중.
성시완이 눈치를 보다 분위기를 바꿔 줬다.
“이담아, 우리도 1학년한테 밀리지 않게 열심히 하자!”
“…….”
계이담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SSR급 던전의 공략이 완벽하게 마무리되고.
해산하기 전.
나는 성국언과 전무영, 두 사람이 있는 차에 올라탔다.
할 말이 있다 하니 사람들의 귀를 의식해 두 사람이 여기로 초대해 줬다.
‘허술해 보이는 건 겉뿐이구나.’
평범한 중저가 국산 자동차처럼 보이던 외관과 달리 내부는 이계 금속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습격이나 암살, 도청 등을 대비한 조치일 거다.
차와 주인은 닮았다는데, 성국언다운 차였다.
“대답하러 왔어? 그 대답은 천천히 듣고 싶은데.”
“다른 걸 말씀드리러 왔어요.”
“말해 봐.”
내가 여기 찾아온 이유를 예의 한반도를 노리는 그 진족에 관한 건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관계가 있긴 하지만.
“구형 시뮬레이터의 보스 룸에서 전 다른 걸 봤어요.”
“다른 것?”
성국언과 전무영이 나를 응시했다.
저 표정을 보니 저들도 내 운명력을 통해 얻은 단서의 존재는 몰랐나 보다.
나는 운명력의 존재를 제외하고 그날 본 것들을 모두 설명했다.
진족과 후예를 믿지 않았던 그가 안전을 위해 모교인 은광고에 단서를 숨긴 것.
그리고 ‘이무기의 귀천’.
“홍경복 화백님 말씀으로는 그 그림은 선배님 할아버님께서 의뢰하셨다고 해요. 제작 과정에 조건을 몇 개 넣어서요.”
홍경복 화백이 말해 줬던 그 조건들까지 모두 두 사람에게 전했다.
“……이무기의 귀천에 그런 사연이 있었나.”
“일정에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 방문을 넣을까요?”
“부탁한다.”
바로 가서 확인할 생각인가 보다.
“어떻게 그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명력에 대해서 밝히는 건 곤란했다.
성국언은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출처를 말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한 건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화백님께 얘기를 들으면 확실하겠지.”
성국언이 내 생각대로 답변해 줬다.
그에게 이 건을 얘기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성국언과 홍경복 화백 사이에 친분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였다.
그런 내 의도도 성국언이 읽어 냈겠지.
“좋은 협력자를 얻은 것 같구나. 잘 부탁한다, 후배야.”
팡!
성국언이 호쾌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친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등은 좀 아팠다.
그런데 ‘좋은 협력자’라고?
‘대답은 천천히 듣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성국언은 나를 바로 협력자로 삼을 마음이 들었나 보다.
* * *
월요일 아침.
아침 훈련을 마치고 등교하는 길.
장남욱, 유상훈이 있는 메시지방을 확인해 봤다.
[유상훈] ??
유상훈이 ‘?’를 두 개나 쓰다니!
평소보다 메시지를 두 배로 길게 쓰는 걸 보니 저놈도 장남욱을 걱정했나 보다.
하지만 여전히 장남욱은 말이 없었다.
심지어 보낸 메시지가 기독 표시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장남욱의 상황을 캐기 위한 수를 생각할 때.
“홍천에서 바쁘게 지내다 온 것 같더군. 에너미를 토벌한 플레이어 명단에 ‘무명의 초신성’이 몇 줄이나 뜬 걸 봤어.”
말을 걸어온 건 황지호였다.
이쪽은 거주 구역에서 1학년 건물로 이어지는 산책로다.
정문을 통해 등교하는 놈이 여기에 온 걸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저놈이 주말에 플레이어 리스트 같은 걸 체크하고 있었나.
“할 일이 없었냐?”
“……나도 주말엔 이사장으로서 꽤 바쁘게 보냈다. 인사 문제로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건 있었어.”
인사 문제?
또 누가 잘리고 바뀌고 새로 부임한 건가.
“너도 그 대상자들을 전부 알고는 있을 거다. 그들은 모두 1학년 0반과 관련이 있으니까.”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저편을 턱짓했다.
1학년 건물로 향하는 산책로.
그 길에 한복 차림의 노인 두 명이 보였다.
“화백님은 앞으로 미술부 고문을 맡으시느라 바쁠 텐데 0반 부담임 자리는 양보해 주십쇼!”
“허허, 탁 동생이야말로 무술 관련 동아리에서 일일 사범 맡아 달라 요청이 많이 올 텐데.”
“아이고. 이미 민 화백은 화백님을 스승으로 받들고 있지 않습니까? 제 예비 제자는 아직도 저한테 연락도 주지 않고…….”
“예비 제자는 무슨. 자네 성질에 갑자기 교사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어. 그 학생이 상대도 안 해 주니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네, 화백님! 맞는 말씀이니까 제가 부담임을 맡아야 합니다!”
홍경복 화백과 탁 도인이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탁 도인은 원래 명예 교사직에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홍경복 화백까지 올 줄이야. 민그린과 송대석이 걱정돼서 교사직까지 맡게 된 건가.’
그런데 이 두 거장이 나잇값도 못 하고 고1 학급의 부담임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나.
그때, 두 노인 사이에 누군가가 나타나 말을 끊었다.
“1학년 0반 부담임은 나야.”
바람 같이 등장한 용제건.
저 두 사람보다 더 나잇값을 못 하는 유희계 용족이 부담임 자리를 채간 것 같다.
“뭐! ……이 자는, 그, 그 용 아닌가!”
“허허…….”
탁 도인과 홍경복 화백도 저 몇천 살 연상인 용족의 정체를 아는지 분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주말 사이에 있었던 인사 문제는 용제건을 1학년 0반 부담임으로 임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용제건이 나와 황지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부담임으로서 첫 출근이잖아. 빨리 오고 싶었어. 그리고 ‘우리 반’ 교실 쪽이 소란스러운 것 같으니까.”
용제건은 두 노인 앞에서 자연스럽게 ‘1학년 0반은 우리 반이다’라고 어필했다.
이 용은 나잇값은 못 하지만,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자신이 맡은 학급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 훌륭했다.
‘그런데 소란스러워? 반에 무슨 일이 있나?’
그렇게 합산 나이 1만은 가볍게 넘어가는 진족들과 노인들을 모시고 이동한 1학년 0반 교실 앞.
그 앞은 난장판이었다.
“다, 다행이다. 애들이랑 선생님 왔어요!”
홀로그램 앞에서 당황하던 사월세음이 우리를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월세음이 더 말하기 전에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야, 부반장! 경찰 불러!”
“경찰보다 학생회나 선도부가 빨리 올 거야.”
맹효돈과 한이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추레한 차림새로 버둥거리는 남자를 구속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찢긴 ‘이무기의 귀천’ 레플리카 버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