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6)
첫 번째 이벤트가 끝난 후, 휴식 시간.
사전에 섭외한 밴드부가 ‘씨름의 노래’를 편곡해 라이브로 연주하는 가운데.
“임연화 선생님, 여기 수건이요.”
“응, 잠깐만.”
대기실에 있던 임연화는 땀 범벅이 된 옷도 갈아입지 않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포스팅을 완료한 그녀가 스포츠 습식 수건과 이온 음료를 받아 들고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라 썼나 궁금해 임연화의 SNS를 확인해 봤다.
옥타곤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찍은 셀카 밑에 코멘트가 몇 줄 쓰여 있었다.
[오늘도 우리 반 애들이랑 잘 놀았당ㅋㅋㅋ
애들이 너무 울어서 근손실 올까 봐 걱정이넹.
여기서 더 약해지면 나랑 놀기도 힘들 텐데ㅠ0ㅠ;;;ㅋㅋ
방학 때 우리 반 귀요미들 보충수업 빡세게 굴려서 파워업시켜 줘야징!
#벌크업해도너희들은나한테안돼 #이번엔별로성장안한듯 #보충수업은무인도에서할까 #여름방학에는부트캠프]
3학년 0반 놈들이 보면 분노로 게거품을 물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부트 캠프는 신병 훈련소를 의미하지 않나?
임연화는 여름방학에 병사를 키울 생각인가 보다.
‘손이 떨리고 있잖아.’
음료수병을 쥐고 있는 임연화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티는 안 냈지만 은광고 만년 차석 우기환이 이끄는 우락부락한 3학년 0반 놈들을 근력만으로 제압하는 건 좀 힘들긴 했나 보다.
‘애초에 그 짓을 좀 힘들게라도 해내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내 시선을 눈치챈 임연화가 멋쩍어하며 음료수병을 내려놓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스포츠 타월로 안경알을 닦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귀여운 내 제자랑 노는 건데. 이 정도쯤이야!”
귀여워?
그런 건 올무나 1학년 0반 중에서도 황지호를 제외한 아이들에게 쓸 수 있는 형용사인데.
벌크업해서 강력한 외모를 갖게 된 3학년 0반의 용사들이 임연화에게 던져져 씨름판 위를 나뒹굴며 엉엉 우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커먼 놈들에게 귀여움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세기말 패자의 포스를 뿜고 있지만 귀여운 제자 운운하며 환하게 웃는 임연화 쪽이 훨씬 나았다.
‘잠깐, 누구를 닮은 것 같은데.’
안경을 벗고 제자 자랑을 하는 임연화.
그녀는 예전에 협회에서 본 위성 관리팀의 임지화 팀장과 닮아 있었다.
쇼핑몰 모델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한 메이크업과 오피스 룩을 선보이던 임지화.
쌩얼에 방탄유리로 만든 것 같은 안경을 끼고 주로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임연화.
차림새는 물론이고 평소 짓는 표정도 지나치게 달라 알아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닮았다.
“혹시 협회에 소속된 임지화 팀장님 아시나요?”
“어? 의신이 너 지화 언니 알아? 아, 잠실 야구장 사건 때 봤다 했었지.”
임지화 쪽이 언니였나 보다.
“쌍둥이신가요?”
“아니. 그냥 동생이야. 좀 많이 닮았지?”
“네. 안경 벗기 전까지는 몰랐지만요.”
“하하! 그럼 내 위장이 잘 먹히고 있다는 거네.”
“위장이요?”
임연화는 도수가 없는 안경을 다시 끼며 말했다.
“예전에는 언니 따라서 비슷하게 꾸미고 다녔어. 그랬더니 여리고 약하고 착한 언니를 나로 착각하고 시비를 거는 못된 것들이 많아서. 일부러 다른 인상을 주도록 꾸미고 다녀.”
플레이어 협회 팀장급이 여리고 약할 리가.
홍규빈 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그 나이에 협회의 핵심 조직인 위성 관리팀의 팀장을 맡는다는 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건데.
“임지화 팀장님 말씀하시는 것 맞죠?”
“응, 맞아. 지화 언니는 나와 달리 여리고 약해. 세상이 험하다 보니 밖에서 맞고 다니진 않을까 걱정이야.”
이해가 안 가지만 노력해서 이해했다.
임연화에 비하면 인류의 대부분이 여리고 약하니까,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면 부트 캠프 계획이나 짜 볼까! 의신아, 난 먼저 들어가 본다.”
임연화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자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 소리를 압도하는 밴드부의 메인 보컬의 샤우팅이 더 크게 들려왔다.
[청룡 만세! 백호 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씨름의 노래’를 뒤에 깔고 활기차게 걷는 그녀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역시 강한 담임은 회복 속도도 남다른 것 같았다.
* * *
밴드부의 축하 공연이 끝나고 정비도 완료했을 때.
옥타곤 스테이지 위에 모래알이 남아 있지 않은가 꼼꼼하게 확인한 부장이 이쪽을 보며 말했다.
“의신이랑 지호랑 새론이는 반 친구가 나오지? 그만 들어가 봐. 반별로 응원 준비해 왔잖아”
“그래. 효돈이랑 빵셔틀 대련 때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감사합니다.”
“아, 전 여기에 남을게요. 이쪽이 더 취재하기 편해서.”
취재욕을 불태우고 있는 문새론은 남기로 했다.
나는 부장의 배려를 기꺼이 받아들여 황지호와 관객석으로 향했다.
“어, 의신이 왔다.”
“자리 비워 뒀어요! 여기 응원 수건이요.”
“홀로그램 세팅은 우리가 다 해 놨어!”
대전자로 출전하는 맹효돈과 방윤섭.
두 사람이 소속한 1학년 0반과 2반은 무대 가까운 곳에 단체석을 마련해 뒀었다.
1학년 0반 전용 단체석에 자리 잡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들뜬 얼굴이었다.
“1학년 2반 쪽에서도 응원을 준비해 온 것 같아.”
“머릿수는 저쪽이 많아 보이긴 한데 의욕이 없어 보이네요…….”
“소수 정예가 이래서 좋네.”
그건 소수, 다수의 문제가 아니라 방윤섭의 평소 행실의 결과물이다.
1학년 2반 아이들도 일단은 이 자리에 오긴 했지만, 방윤섭이 아닌 주수혁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방윤섭은 평소에도 저보다 잘난 놈에게 매일같이 시비를 걸고 있으니까…….’
은광고에서 방윤섭보다 못난 놈은 몇 없다.
내 빵셔틀은 은광고 전체에 시비를 걸고 산 거나 마찬가지다.
매일 처참하게 깨지거나 주수혁이 말리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 저놈한테는 친구도 없었다.
‘주수혁이 방윤섭을 응원하자고 나서지 않았으면 몇 놈 오지도 않았겠지.’
방윤섭이 깨지는 걸 구경하러 오긴 해도 응원석에 앉으려 들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1학년 2반 아이들이 줄을 맞춰 다 앉아 있는 걸 보니,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의 인망을 새삼 느낄 수 있어 뿌듯해졌다.
“제갈재걸 선생님 나오셨다!”
“어? 타이가 바뀐 것 같은데.”
“무늬가 달라.”
역시 우리 반 아이들은 눈썰미가 남달랐다.
사실 심판용 복장은 두 벌 맞추려 했으나, 제갈재걸의 반대로 타이만 교체하게 된 거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벤트를 재개하겠습니다.”
제갈재걸이 마이크를 잡고 대본을 읽어 내렸다.
먼저 소개하는 건 맹효돈.
그의 긴 수상 이력에 주변에서 ‘오오.’, ‘아, 중학교 때 본 거 같은데.’, ‘우리 학교 왔었네.’라고 떠드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숨은 강자, 맹효돈을 소개합니다!”
와아아아—!
환호 속에서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더 켜졌다.
우리 반 응원석 바로 앞, 맹효돈이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시큰둥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이트 클럽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와서 그런가.’
무심한 눈으로 관절을 꺾으며 준비 운동을 하는 맹효돈.
그 뒤로 우리 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효돈아, 파이팅!”
“잘하고 와요!”
“이기고 와서 밥 사줘!”
그 목소리를 들은 맹효돈이 이쪽을 봤다.
아이들이 더 소리를 크게 지르니 맹효돈이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관중과 방윤섭 상대로는 긴장을 안 해도 자신을 응원하는 아이들을 보니 떨리나 보다.
움직임을 멈춘 맹효돈의 등을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두드렸다.
“어, 근형 쌤이다!”
“저쪽엔 탁거산 선생님이 계시니까 이쪽에는 함근형 선생님이 가신 거구나.”
함근형 선생님이 뭐라 말을 걸자 맹효돈이 심호흡을 한 후 진정하고 다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함근형 선생님께 부탁하길 잘했네.’
근육 테이프도 들려 있는 게 이번에 맹효돈의 링 코치를 제대로 맡을 작정이신가 보다.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바람을 찢고 바다를 가른다는 전설의 무도가 그레이트 탁.”
한편, 방윤섭 쪽 소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방윤섭이 아니라 탁 도인 소개 같은데.’
방윤섭에게 쓸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다 보니 결국 탁거산의 이력을 줄줄 쓰게 된 모양이다.
이번에 스크립트를 작성한 문새론의 고충이 느껴졌다.
“탁거산, ……도인의 임시 제자이자 1학년 0반의 부반장, 무명의 초신성. 그의 빵, 아니, 심부름꾼. 방윤섭을 소개합니다!”
도인까지는 말했지만, 차마 빵셔틀이라는 단어는 말하지 못하고 바로 순화한 제갈재걸이 스테이지 반대편을 가리켰다.
맹효돈 때보다 기세가 한풀 꺾인 환성이 터져 나왔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춘 건 탁거산과 방윤섭.
두 사람의 얼굴은 매우 차분해 보였다.
‘방윤섭 분위기가 달라졌어. 탁거산이 제대로 교육했나 보네.’
3학년 0반처럼 무식하게 벌크업을 한 것도 아닌데, 방윤섭의 기운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종목을 공개하겠습니다.”
[대결 종목: 삼판양승제 정면 대결]
홀로그램에 떠오른 문자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사전에 지급한 대련용 무기 외에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금지입니다. 대신, 이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결 종목과 룰은 탁거산이 제안하고 제갈재걸과의 협의를 거쳐 수정한 결과물이었다.
‘맹효돈의 스킬은 둘째치고 광림까지 허용할 줄은 몰랐는데.’
제갈재걸은 이능 센서가 붙은 쌍절곤과 보호대를 각각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사전에 두 학생에게 입게 한 방어구는 센서가 붙은 무기가 주는 데미지를 계산합니다. 전투 불능이 될 수준의 데미지를 먼저 누적시키는 쪽이 승리합니다.”
이는 제갈재걸이 제안한 룰로, 심하게 다쳤는데도 허세를 부려 버틸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재생 시술까지 받아야 하는 사태가 생기면 시술, 회복 기간 때문에 방학이 날아가 버리니까.
“이 팔각형 형태의 옥타곤 밖의 바닥에 신체의 일부가 접촉하게 되면 장외로 반칙패. 심판 재량으로 경기 중단을 선언한 후 상대를 공격한 경우도 반칙패로 처리하겠습니다.”
제갈재걸이 룰 설명을 마치자 맹효돈과 방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 측의 요구 조건을 확인하겠습니다. 맹효돈 학생이 승리할 시, 탁거산 도인은 사이비를 전파하는 걸 그만…… 제자 권유를 그만둘 것.”
저 조건은 맹효돈이 직접 작성한 걸 텐데 저런 말을 썼나…….
함근형 선생님이 옆에서 뭐라고 타이르자 맹효돈이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방윤섭 학생이 승리할 시, 맹효돈 학생은 탁거산 선생님의 제자가 되며, 조의신 학생은 방윤섭 학생 사이에 건 ‘약속의 불집게’의 효과를 해제한다. 맞습니까?”
탁거산과 방윤섭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탁거산은 그렇다 쳐도 방윤섭은 뭐 저리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나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건가.
“그럼 정확히 3분 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3분을 카운트다운하는 홀로그램이 체육관에 떠올랐다.
밴드부가 라이브로 ‘Fight Night Champion’의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The Beast’를 연주해 긴장감이 더 고조되었다.
‘이 틈에 사진이나 찍을까.’
맹효돈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괜히 긴장할 것 같아 사진이나 찍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입을 다물고 응원 수건을 열심히 흔들기만 했다.
대본을 점검하며 문새론에게 ‘이 소개글은 지나친 것 같구나.’라고 타이르는 제갈재걸, 그의 사진은 홍규빈에게.
몸을 풀며 함근형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맹효돈의 사진은 탄래중의 수학 교사에게.
전송을 완료하자 밴드부의 연주가 멎고, 카운트다운이 완료되었다.
“1라운드 스타트!”
홀로그램이 0을 찍자, 제갈재걸의 신호와 동시에 두 사람이 격돌했다.
격전 끝에 첫 라운드는 맹효돈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시바. 해볼 만하네. 다음은 내가 이길 거 같은데!”
2라운드가 시작하기 전, 회복 아이템을 사용하는 방윤섭은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며 맹효돈을 도발했다.
그리고 그 말은 허세도 뭣도 아닌 사실이었다.
* * *
황명 타워 최상층.
30대 초반 정도 외양을 한 청년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결재를 마무리한 그의 앞에 가면 같은 얼굴을 한 비서가 나타났다.
“황호 님.”
이제 일을 마쳤는데, 또 일인가.
황호는 말은 됐으니까 서류나 내놓으라는 의미를 담아 책상 위를 가리켰지만, 비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찾고 계시던 그림의 행방,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이무기의 귀천이군.
황호는 계속 말해 보라며 턱짓했다.
“황호 님께서 직접 손 하나를 자르고, 수석 주술사가 정신을 교란시킨 그 쓰레기,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국선 변호사를 가장해 우리 쪽 사람을 그 쓰레기 옆에 붙여 뒀습니다만, 성과가 있었습니다. 환술이 풀리고 약 효과가 가시고 나니 입을 열더군요.”
비서는 녹취록 파일이 담긴 칩과 인쇄한 종이 더미를 내밀며 말했다.
“그 쓰레기가 도난 사건에 관여한 게 확실합니다. 형량을 줄일 카드가 있다며 ‘이무기의 귀천’을 언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