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0)
반장의 집에서 본의 아니게 실컷 놀다가 귀가한 송대석.
그가 민그린 이외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서 노는 건 초등학생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등교를 시작하고 나서 오지랖 넓은 1학년 0반 아이들과 어쩌다 어울리게 되긴 했다.
하지만 시험 기간이라 간식을 만들어 먹으며 수다는 떨어도 이렇게 길게 놀지는 않았다.
‘아, 내가 왜 그랬지. 개 쪽팔리네.’
잘 놀긴 했지만, 후회스러웠다.
아니, 너무 잘 논 바람에 후회스럽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 짱돌 놈이 싸울 땐 그린이도 없는데 그렇게 들떠 가지고…….’
놀고 난 여운과 밀려드는 부끄러움 사이에서도 아이처럼 흥분했던 자신의 모습이 플래시백 되었다.
맹효돈과 방윤섭이 대련을 하기 전까진 누가 이기건 지건 관심도 없고 보러 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대를 보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해서 고함을 잔뜩 질러 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다 보드게임에선 또…….’
낯선 곳에서 평소 사용하던 베개가 없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맞이한 새벽.
쓰던 베개가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놈이라고 얕보이기 싫어 애써 잠든 척했지만, 어째서인가 간파당해 끌려가 보드게임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게임의 룰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민그린은 대놓고 송대석을 커버해 주는 데도 꼴찌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긴 연패를 끊고 겨우 1등을 거뒀을 땐 자기도 모르게 좋아서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안 친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
그의 자식, 손주들에게는 모두 이능이 없었다.
송대석을 제외하면.
그런 와중에 송대석은 강한 이능을 타고난 데다 외모도 송만석의 젊은 시절을 빼닮아서 주위의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싫어도 웃는 낯을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삼켰다.
그 결과 송대석에게 호감을 품은 이들이 민그린을 해했다.
‘하지만 쟤들은 내가 무쇠팔의 손주인지 관심도 없고, 내 얼굴도 신경 안 써…….’
그럼 친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싶은 걸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린이도 내가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하는 눈치인데.
그런 자기 합리화와 민그린의 소꿉친구로서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거울을 노려보니 눈을 완전히 덮은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루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사진 새로 찍어야 하는데.’
수상한 부반장이 알려 준 플레이어 협회의 인턴직.
갈지 안 갈지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일단 지원은 해 보고 생각해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보안 문제 때문에 이목구비가 또렷이 보이는 사진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류가 반려당했다.
사진 찍을 때만 잠깐 머리카락을 넘긴다 해도 얼굴을 이렇게 가리고 다니면 문제가 될 게 뻔했다.
송대석은 고민에 잠겼다.
‘……잘라야 하나?’
* * *
‘……잘라 달라고 부탁해 볼까?’
기숙사 내 방.
혼자 황지호와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고민에 빠졌다.
—지금 호족이 ‘이무기의 귀천’의 행방을 쫓고 있다.
김유리의 화제가 일단락된 후, 황지호가 그렇게 말했다.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에는 사건이 몇 개 있었어. 거기에 ‘불행한 사고’로 오른손이 잘린 홍경복의 파문된 제자가 연관되어 있더군.
그렇게 화두를 던지며 언급한 사건은 두 가지.
첫째, 국립 현대 한국화 미술관의 리모델링.
그간 홍경복과 민그린 화백전으로 입장 수익을 쏠쏠하게 챙긴 미술관이 국민의 문화 복지 향상이란 명목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감행했다 한다.
—그 과정에 관장이 시공업체의 선정과 입찰 과정에서 많이도 해 먹었더군. 뭐, 이 건은 도난 사건을 캐던 국회의원 쪽에 넘겼다.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진족으로서 한반도 국민의 대표를 부려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성국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놈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부려 먹어?
황지호를 신나게 부려 먹는 내가 할 소리가 아니긴 하지만.
—그간 자료 요청 명목으로 우리 사고뭉치를 비롯한 학교 교사들을 많이 괴롭힌 것 같기도 하고. 피차일반인 셈이야.
그 말을 듣고 은광고 교사의 업무량을 고려해 이번엔 황지호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함근형 선생님과 못 놀아 2학년 0반에게 한 수 전수받겠다는 우리 반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니 성국언이 아주 조금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성국언은 자기 할 일을 한 거니까 결국 잘못이 없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두 번째, 미술관 직원 사이에 유행했던 정신 질환.
—정신 질환 증상을 호소하는 직원들은 전부 리모델링 기간 미술품을 관리했던 직원들이었어.
—그들의 정신을 교란시켜 일을 치른 것 같더군. 그 쓰레기가 청소 용역으로 미술관에 들어가서 정신 조작 계열 스킬의 매체를 심은 모양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 쓰레기는 이전 민그린이 갑질을 했다는 루머를 유포하며 전 미술관 직원들이 호소하는 정신 이상 문제가 갑질 후유증이라 우겼었다.
홍경복과 민그린의 그림을 훔치는 수단으로 이용한 한 수를 민그린을 까내리는 것에 다시 써먹은 셈이다.
여기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남은 손도 잘라 달라고 부탁할까.’
부탁하면 황지호가 해 줄 것 같긴 한데.
—사태를 파악한 홍경복이 미술관의 모든 미술품을 직접 감정했다. 그 결과 총 30점이 넘는 미술품이 바꿔치기 되었다고 확인됐어. 몇 개를 빼면 전부 민그린과 홍경복의 작품들이더군. 오늘 내로 이 사항도 보도가 될 거다.
포털 뉴스 사이트를 확인해 보니 1면에 홍경복의 얼굴과 도난 미술품 목록이 포함된 기사가 떠 있었다.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이들의 손상이 생각보다 심각해. 그들을 통해 단서를 잡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황지호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사건의 전말을 전부 들은 나는 심란해졌다.
‘도난 미술품 목록이 생각보다 많아. 혹시, 이건 그 시나리오와 이어진 게 아닐까.’
게임 속에선 내년쯤 혼란한 세상을 더 혼란하게 만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굵고 짧게 등장하다 사라졌다.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아끼는 썩은 고인물인 나다.
그러나 그 캐릭터는 유독 아픈, 아니, 오그라드는 손가락이었다.
‘아직 단서가 부족해. 단정 지을 수 없어!’
현실 도피를 하는 기분으로 알람을 꺼 둔 메신저를 켰다.
예상보다 메시지가 더 많이 쌓여 있었다.
특히 어느 메시지방은 쌓여 있는 메시지 수의 자릿수가 달랐다.
[금찬솔] 야
[왕찬솔] 수상한 놈아, 메시지 받아라!
[금찬솔] 야!!!
[왕찬솔] 자냐?
[금찬솔] 지금 잠이 옵니까?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졸린데.
대체 이놈들은 아침부터 왜 난리인 건가.
[금찬솔] 네가 그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첫 제자 놈 불렀지. 다 알아!
[왕찬솔] 제갈쌤이 어떻게 알고 왔냐니까 사진을 하나 보여 주던데, 그거 찍힌 위치나 각도 봤을 때 딱 수상한 후배 놈이 앉아 있는 위치였어.
고작 그걸로 알아챈 건가!
2학년 0반을 대표하는 미친 자들은 역시 비범했다.
그런데 홍규빈이 뭘 어쨌길래 그러지.
[금찬솔] 그 첫 제자 놈이 협회 일 운운하면서 밥 먹고 나니까 제갈쌤 데리고 사라졌어! 디저트도 못 먹었는데!
[왕찬솔] 은근슬쩍 밤샐 준비 다 했는데!
홍규빈이 사진을 보고 학교까지 찾아왔나 보다.
덤으로 0반과 신문부에게서 제갈재걸도 채간 것 같다.
홍규빈의 메시지방도 추가로 옆에 띄워 봤다.
[홍규빈] 의신아, 제보 고맙다. 덕분에 선생님 모시고 잘 놀다 왔어!
[홍규빈] 좋은 옷을 입었을 때는 좋은 곳에서 차 한잔, 술 한잔 해야지.
[홍규빈] 앞으로도 이런 연락은 자주 해!^^!
홍규빈이 일 핑계를 대고 제갈재걸을 끌고 놀러 간 게 확실했다.
‘그간 철저하게 철벽을 치던 제갈재걸이 대체 뭔 소리를 듣고 홍규빈과 함께 간 거지.’
이 의문은 일단 뒤로 하고 금찬왕찬의 진상 메시지를 계속 읽었다.
[금찬솔] 알고 그런 거지? 몰랐을 리가 없지. 그 첫 제자 놈이 입만 열면 제갈쌤 얘기를 할 텐데!
홍규빈이 입만 열면 제갈재걸 얘기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설마 여기까지 처들어와 빼갈 줄은 몰랐다.
[왕찬솔] 빡치니까 제갈쌤 새 옷이나 맞출까?
[금찬솔] ㅇㅇ 그러자. 이번 옷도 그 수석 디자이너좌가 직접 디자인한 거였지?
[왕찬솔] ㅇㅇ 그러함. 옷발 잘 받는다고 직접 만나서 수치도 다시 재고 영감도 받고 싶다는데.
[금찬솔] 느루의 탑 디자이너께서 보는 눈이 있네. 어제 못 놀아 준 거 핑계대서 끌고 가자. ㄱㄱㄱ!
[왕찬솔] 가람갑한테 눈물 연기 한 번 쏴 달라고 하자. ㅇㅇㅇ!
그날 제갈재걸이 입은 심판 복장은 느루의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 정장이었나 보다.
그 둘은 내 존재를 잊고 실컷 제갈재걸에게 입힐 파티복과 수영복 디자인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나한테 따지려고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었나?’
무시해도 괜찮을 것 같아 답변하지 않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오늘 은광구의 강수확률은 60%예요. 예년보다 조금 늦게 장마 기간에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우산 꼭 챙기세요!
염준열과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후, 매일같이 문안 인사를 받게 되었다.
인사에는 날씨에 대한 코멘트나 전날 염준열에게 있었던 일의 요약이 덧붙여져 있었다.
매일 인사하는 게 번거롭지 않냐고 했더니, 염준열이 답하길.
—아버지께서 스승께 매일 안부를 묻고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게 제자의 예의 중 하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두 번째 스승님께서는 여행을 좋아하셔서 자주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강제하시지 않았지만요.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팔불출 염방열이 엄격하게 사제 간의 예의를 따졌을 리가 없으니 뭔가 이상한 소리였다.
‘그냥 매일 아침 염준열의 인사를 받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아마 이게 정답일 것 같았다.
1분이 아쉬운 시험 기간에 시간을 빼앗는 게 미안해서 나한테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도 말해 봤다.
하지만 한참 후에 아주 고민하다가 쓴 티가 난 ‘매일 메시지를 보내 스승님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예의가 없는 거겠죠……?’라는 요지의 풀 죽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결국 염준열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고 답 인사도 짧게 보내게 되었다.
[나] 그래, 너도 우산 잘 챙겨.
[염준열] 네! 감사합니다!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이 보낸 스탬프에는 그가 광림으로 소환하는 홍룡을 데포르메한 그림이 붙어 있었다.
훈훈한 마음으로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김유리] 의신아, 내일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야!
[김유리] 자료는 다 만들어 놨어. 한 번 읽어 줘! ^▽^!
김유리는 그날 새벽에 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폭주해도 좋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김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캐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엔 자료 만드는 거 돕고 싶었는데.’
[나] 그래. 읽어 둘게.
[나] 다음 회의 자료는 같이 만들자.
생각을 캐내지는 않아도 김유리가 다음 학기에도 무사히 등교해 함께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에 참가하게 만들 거다.
* * *
월요일, 방과 후.
기말고사 결과가 발표되어 떠들썩했던 하루가 끝났다.
이번에도 3학년 수석과 차석은 도원우기환.
2학년 수석은 천동하, 차석은 염준열.
1학년 중에서는 주수혁과 안다인이 공동 수석을 차지했다.
‘염준열이 수석을 노린다고 했는데, 아쉽게 됐어.’
수석을 노린다고 내 제자가 열심히 공부했는데.
천동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우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유리와 학생회관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딩동.
문새론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문새론] 얍, 조의신!
[문새론] 지금 유리님과 같이 있음?
[나] 어, 왜?
[문새론] 정문으로 들어오지 마! 후문으로 오셈!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일단 따르기로 했다.
“그럼 후문 쪽으로 가자. 내가 안내할게!”
김유리의 안내대로 도착한 후문을 통해 학생 대표 회의용 대회의실A로 향하던 중.
문새론의 의도가 파악되었다.
“주연도, 조연도 목표 의식이 뚜렷해서 좋았어.”
“맞아. 대사 하나하나에 그게 녹아 있어서…….”
정문 쪽 통로에서 주수혁과 안다인이 또 독서 감상회를 가장한 썸을 타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