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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59화 (15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59)

김유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이사했다.

고등학생이 된 현시점 기준으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제 몸집보다 큰 이삿짐 상자를 바라보던 장면이었다.

—유리는 어디가 좋아? 어디로 이사하고 싶어?

마치 그 말은 김유리를 위해 이사 간다는 뜻으로 들려 이상했지만, 매번 이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답변은 똑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

김유리의 부모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흐리고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강이 보이는 곳은 안 될까? 아니, 강도 위험할지도 몰라. 강도 하구에서 바다와 만나니까…….

—한국을 뜨는 게 어때?

—바다를 건너지 않으려면 중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중국은 입국 심사가 까다로워. 그쪽에서도 유리와 유사한 케이스가 나와서…….

—……입국 전에 자기 이력도 조회하겠구나.

어린 시절 김유리는 저 대화의 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중국어는 못하는데, 한국에 남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많으면 1년에 세 번, 적어도 한 번씩 이사를 반복하던 김유리가 정착한 곳은 현재 살고 있던 서울특별시 은광구였다.

—은광구 터가 좋은 것 같아 다행이야. 여기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도 없고, 유리의 주변 애들이 다치지도 않고…….

—유리야, 최근에는 ‘이상한 일’은 없지?

김유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TV로만 봤던 바다를 보지 못하더라도 은광구가 좋았다.

그전까지 이어지던 ‘이상한 일’은 은광구로 전학 오자 뚝 끊겼다.

그 덕분인지 부모님 얼굴도 매우 밝아진 데다가 절친한 친구가 생겼으니 더는 이사 가고 싶지 않았다.

—네! 반 친구들도 다 착하고, 다인이도 정말 좋은 애예요. 이사 안 가고 계속 여기서 살고 싶어요!

은광구에 있는 동안은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거나, 김유리에게 장난을 치던 아이들이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에 휘말리는 일도 없었다.

특히, 새로 사귄 친구 안다인 곁에 있으면 그녀의 이능파가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포기해 준 걸지도 몰라…….

—성장하면 이능이 사라지는 케이스처럼, ‘그들’도 유리에게서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김유리의 부모는 안도했다.

은광구에 정착하게 된 김유리의 가족은 단란하고 평화롭게 지냈다.

사진작가인 아버지는 좋아하는 사진을 여유롭게 찍었고, 홈 카페를 꾸미는 게 꿈이라는 어머니도 집을 예쁘게 꾸몄다.

늘 당장이라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던 탓에 살풍경한 집 인테리어도 달라져 김유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 안도와 행복이 깨지기 시작한 건, 그녀의 광림 봉인이 풀렸을 때였다.

[17세가 된 걸 축하해.]

[이제 천신 눈치 안 봐도 되니까 살 것 같네!]

[‘고귀한 녹색의 귀부인’께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기다렸단다.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억, 천상성모(天上聖母)님이 직접 오셨잖아! 그래도 양보 못 합니다!]

[……잠깐, 저거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드님이 보낸 전령 아니야?]

[그러는 ‘애지르의 인질’의 전령께서는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흥, 나는 별로 관심은 없지만 다른 놈들에게 목련을 내줄 생각은 없다.]

은광고에 합격하고 1월 1일이 된 순간.

상위 존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와 인연을 맺었다.

김유리 주변의 이능파의 압력에 압도되어 있던 그녀의 부모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김유리는 왜 자신의 주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왜 이사를 다녔어야 했는지 알게 되었다.

—유리도 서구초 사건에 대해 알고 있지?

30년 전에 한 초등학생의 광림이 폭주해 세 학급이 휘말려 청소년 광림 제한법까지 제정된 계기가 된 사건.

플레이어인 김유리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30년 전의 초등학생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건 알지 못했었다.

김유리의 직계 혈족이 유독 상위 존재와 엮이는 일이 많다는 것도.

—이능을 얻는 순간 나는 수많은 상위 존재의 가호와 광림을 받게 되었어.

—하지만 나한테는 상위 존재의 가호와 광림을 감당할 만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조금도 없었단다. 천천히 이능이 내 몸과 정신을 좀먹어 갈 때,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생겼지…….

강원도의 어느 한적한 어촌.

학교 전체에 세 학급밖에 없던 서구초등학교.

보고 놀 거리도 없고, 한정된 인간관계 속의 작고 폐쇄된 사회.

그곳에서 이능압에 눌려 말도 어눌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김유리의 아버지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이들 사이의 장난, 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 점점 심각해지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상위 존재들의 분노는 나날이 커졌다.

그가 4층 높이의 초등학교 옥상에서 ‘이능이 있으면 날아 봐!’라며 밀쳐진 순간, 결국 광림이 멋대로 발동해 폭주하고 말았다.

—신의 분노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단다. 제가 아끼는 신전 기둥에 흠집이 났다는 이유로 한 도시를 수몰시키고 전쟁을 일으키는 건 예삿일이야.

폭주한 광림이 부른 거대한 해일과 폭풍은 서구초등학교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졌다.

생존자는 김유리의 아버지와 그와 어울렸다는 이유로 같이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 둘.

또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며 그를 보호하던 늙은 수위, 정년퇴직이 임박한 교사와 갓 학교에 온 교생까지 셋.

오직 그들만이 부드러운 파도에 밀려 안전지대까지 옮겨져 있었다.

—난 그 사건 이후 몇 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능도, 상위 존재도 사라졌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너에게 물려주고 말았어.

두 사람을 힘들게 하는 원인은 김유리인데, 오히려 그녀의 부모는 울면서 그녀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김유리는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고 의연하게 말했다.

“강한 광림이라도 제가 잘 다뤄 볼게요! 한국 최고 명문 플레이어 고등학교인 은광고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잖아요. 다인이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강한 편이에요.”

김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내밀고 따뜻한 차를 타 오며 부모님을 달랬다.

사실 그녀는 정신이 멍해져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소중한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태연한 척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일단 광림 봉인술식을 받아 둘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김유리가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도 계속 불안해하던 그녀의 부모님은 봉인술식이라는 말에 안도한 얼굴을 했다.

김유리가 성장할 때까지 그녀를 지켜 주던 봉인술식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광림은 협회의 봉인술식으로도 억누르기 힘들었고, 봉인술 연장 불가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쓰러졌다.

‘광림이 발동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김유리의 머릿속에서 서구초등학교 사건 영상이 반복되어 재생되었다.

땅과 건물을 종잇장처럼 우겨버리던 해일과 폭풍의 존재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힘을 제어할 자신이 조금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단다.]

[언제든지 우리를 부르렴.]

[이교(異敎)의 신과 협력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네가 부탁하면 생각은 해 보겠다.]

신의 속삭임에 김유리는 꿈속에서도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저 소리를 자신의 두려움이 부른 단순한 악몽이자 환상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들리지? 이제 들리는 거 다 아는데.]

그 말에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났다.

허둥지둥 소매를 걷어 시계를 풀어 봤을 때, 김유리는 그녀를 지켜 주던 최후의 보루가 완전히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

김유리는 반사적으로 방안에서 뛰쳐나왔다.

무서운 꿈을 꾼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부모님의 품을 찾는 것처럼, 그녀는 휘청휘청 1층 안방으로 향했다.

‘아빠가 나 때문에 쓰러지시고, 엄마는 간병 중이신데……!’

그 생각이 든 건 그녀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였다.

온몸에 힘이 사라지는 감각이 들어 그대로 주저앉으려 할 때.

거실 소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조의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김유리는 자신이 지금 집에 혼자 있지 않다는 게 떠올랐다.

*    *    *

“심상치 않군. 이능파의 파장이 미묘해. 진족에 상위 존재도 섞여 있어.”

김유리를 본 황지호가 안색을 바꿨다.

광림 봉인술식이 사라진 김유리를 보는 건 처음인 황지호.

그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상위 존재가 두 자리 수는 엮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일단 앉자.”

황지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김유리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비틀거리다 테이블 건너편 1인용 소파에 앉았고, 황지호는 경계하는 눈을 하고 계속 서 있었다.

“너도 좀 앉아.”

“……알고 있었던 거냐.”

침착하게 구는 나를 보고 황지호가 노골적으로 의심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시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노려 보던 황지호는 김유리와 나 사이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 그러니까…… 사실……. 지호가 말한 대로…….”

김유리는 떨면서 자신이 수많은 상위 존재와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제어할 자신이 없다는 것도.

“어떡하지. 학교를 그만두고 어디에 갇혀 있는 게 나을까? 이능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지 마.”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 반도 서구초등학교처럼 될지도 몰라…….”

“괜찮아.”

“괜찮지 않아!”

김유리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나 이 광림을 제어할 자신이 없어!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지 않아, 잘할 자신이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해…… 그러니까, 나는…….”

“그게 괜찮다는 게 아니야.”

이 말에 김유리가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이능이 폭주해도 상관없어. 마음대로 광림을 써도 괜찮다는 뜻이었어.”

그녀가 품은 의아함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반도 아빠 학교 사람들처럼 죽거나 실종될지도 몰라!”

“괜찮을 거야. 함근형 선생님이나 우리 반 아이들이 쉽게 당할 것 같아?”

은광고에서는 서구초 사건의 사상자처럼 김유리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설령 휘말려도 쉽게 죽을 놈이 드물었다.

“안 그렇냐?”

내가 황지호에게 묻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깟 광림에는 안 당해.”

마치 ‘오늘 저녁으로는 피자나 직접 구워 볼까’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깟, 광림…….”

“상위 존재가 많이 엮인 게 성가시긴 하군. 네 정신과 수명이 소모될 정도로 광림이 폭주한다고 가정해 볼까. ……그래도 전력을 다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여긴 가장 강력한 지력을 품은 한반도고, 지력을 활용할 수 있는 존재는 정해져 있으니까.”

황지호의 말은 아마 허세가 아닐 거다.

상위 존재가 신이라고 하나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한도가 있으니까.

그가 ‘전력을 다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막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지금 중요한 건 네 쪽이다. 상위 존재를 계속 거부하면 이능압으로 몸이 상할 수도 있어.”

“지호야…….”

우리 반 최고의 돌아이가 진지하게 조언을 하는 게 놀라운 듯, 김유리가 놀란 얼굴을 했다.

나도 한마디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주변 걱정은 그만해. 네 광림이 폭주하는 것보다 네가 다치는 게 힘든 사람들이 많아.”

그녀의 가족, 안다인, 우리 반 아이들과 학생회 사람들…….

밝고 다른 사람을 늘 배려하는 김유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넘쳐 났다.

김유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2층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 아이들이 우리를 찾아온 것 같았다.

“어, 다들 일어나 있었네요! 방에 의신이랑 지호가 없어서 어디 갔나 했어요.”

“너넨 안 자고 뭐 했냐.”

“권제인 선배님 명예 교사 부임 기념으로 현악부에서 특집 영상을 새로 올렸어! 그거 정주행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좀 자다가 깼어.”

새벽 가까운 시간인데 다들 쌩쌩했다.

아이들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거실 공기가 바뀌는 것 같았다.

김유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야식 먹고 보드게임할래?”

“해요!”

“어, 나도 할래.”

“송대석 그 새끼 자는 척하던데 깨우고 온다.”

“아…… 대석이는 베개 바뀌면 잠 못 자. 다음엔 베개 가지고 오라 해야겠다.”

김유리의 제안에 아이들이 전원 찬성했다.

잠을 전혀 못 자 컨디션이 최악인 송대석이 모든 게임의 최고의 호구가 되었다.

해가 뜰 때쯤.

아이들 사이에 섞여 게임을 하는 김유리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    *    *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

황지호가 물었다.

“김유리의 정체는 뭐지?”

김유리는 상위 존재와 진족 사이에 연이 없었다.

그런데도 상위 존재와 엮여 그 고생을 하고 있었다.

“김유리의 태몽에 ‘목련’이 나왔어.”

“……그 목련에 넋이 나간 바다의 신 때문이었나.”

옥황상제의 딸이 북쪽의 해신을 짝사랑하다 죽어서 목련을 피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신이 점점 미쳐간 게 목련에 얽힌 전설이었다.

“이계 충돌 이후에 특정 가계에서 어떤 기운을 강하게 타고 나는 경우가 많잖아. 김유리네 집은 목련의 기운을 강하게 타고났어.”

"북쪽 해신을 미치게 한 목련이라 물과 연관된 상위 존재 중에 관심을 갖는 이가 많겠군."

“그래. 물과 연관된 상위 존재가 많으니까 그중에서 극소수만 관심을 갖는다 해도 숫자가 열은 넘어갈 거야.”

내 말을 듣던 황지호가 내뱉듯 말했다.

“꽃에는 나비가 꼬이는 법이라지만, 이건 좀 심한데.”

일종의 비유였겠지만,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꽃에는 나비가 꼬이는 법이었다.

‘황지호가 바로 곁에 있으니 나서진 못했겠지.’

지금도 꽃 주변에는 나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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