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성장의 실마리 (3)
2학년 위주로 선발될 예정이었던 학교 대표.
우수한 이계 공략 실적과 연구 성과, 외부 활동 경력을 쌓아 온 2학년.
그들을 제치고 교칙상 아직 이계 공략의 공격대로 참가하는 게 불가능한 데다, 광림을 개화한 지 반년도 안 된 1학년이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의외의 전개에 회의실 전체가 술렁였다.
“아…… 주수혁하고 안다인, 두 사람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어. 계속 공동 수석 하고 있다는 1학년 1반, 2반 반장이지?”
“입학식 때 단상에 섰던 애들이잖아.”
“조의신?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음.”
“걔잖아. 그 13조에서 살아남은 무명의 초신성.”
“아! 체스 대회에서 우승한 그 수상하다는 부반장.”
대회의실에 재석한 모든 학생의 시선이 1학년 중에서 학교 대표 후보로 선정된 셋을 향해 쏟아졌다.
“축하해! 어쩐지 의신이는 뽑힐 것 같았어.”
김유리가 밝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고마워.”
낯이 간지러웠다.
내 잘난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이 학교 대표로 선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과 나란히 내 이름이 나온다는 건 뭔가 어색했다.
‘냉정하게 학교에서 보인 실적이나 성적만 고려하면 내가 뽑히는 게 맞긴 한데…….’
1학년 중엔 아직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인 재능이 넘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넘쳐 난다.
그들을 제치고 내가 대표로 뽑히니 마음이 좀 그랬다.
“계속해서 2학년 후보를 발표하겠습니다. 2학년 1반…….”
장내가 조금 진정되자 유상희가 계속해서 목록을 읽어 내렸다.
2학년 중에서 후보로 선정된 건 약 스무 명.
그들 대부분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나 NPC였지만, 예상치 못한 이름도 하나 끼어 있었다.
‘계이담도 뽑혔네.’
지익회에 소속해 있고, 괴담을 좋아한다는 과묵한 2학년 계이담.
그의 실력은 미지수였지만, 예선전도 없이 선정되었다는 건 저기에 거론된 염준열이나 천동하, 곽경구와 합을 맞출 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걸 거다.
‘아직 계이담이 어떤 결론을 냈는지 듣지 못했는데.’
은광고 안에서 성국언의 조력자가 되어 달라는 제안.
거기에 계이담이 어떻게 응했을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말을 워낙 하지 않으니 어떤 성격인지 파악이 안 돼서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이상으로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마칩니다.”
생각에 잠긴 사이, 의장이자 학생회장인 도원우의 선언으로 회의가 끝났다.
“대박이다. 바로 기사 낼 거임! 주 반장님, 오늘 회의록 정리는 맡길게!”
“그래. 기사 기대하고 있을게.”
“아, 나중에 인터뷰도 해 줘!”
“사전에 대본을 보내 주면 답변을 준비해 올게.”
“응! 다인님이랑 조의신이도! 부탁할게!”
문새론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안다인을 끌고 와 주수혁 옆에 세워 놓고 나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뒤는 맡긴다는 거구나.’
그렇게 제 역할을 마친 문새론은 회의 내내 손이 근질근질했는지 바로 신문부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흔쾌히 문새론의 부탁에 응한 주수혁은 안다인이 바로 옆에 서 있자 또 입을 다물었다.
“아, 난 교실로 바로 가야 돼! 레나가 이번에 ‘권제인 머리띠’ 사고 싶다고 해서 여자애들끼리 쇼핑가기로 했어.”
권제인이 앨범 재킷에 착용하고 나오는 바람에 완판되었다는 그 레이스 헤어밴드 말인가.
권레나가 갖고 싶다고 하면 권제인이 당장 착용하고 있던 머리띠는 물론이고 협찬받은 것도 그냥 사서 다 줄 텐데.
‘권레나가 못 샀다고 하면 나중에 권제인에게 말해 볼까.’
‘의신이 너도 알아서 빠져! 알았지?’라는 의사를 눈으로 전하며 김유리가 자연스럽게 퇴장했다.
회의 중에 엎드려 잠이라도 잔 건지 그새 머리가 까치집이 된 유상훈이 불쑥 말을 걸었다.
“야, 할 거 없으면 1 on 1이나 하자. 농구공은 가져왔어.”
유상훈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빠지기 좋은 기회라 응하기로 했다.
“그래, 가자. 그럼 다음에 보자.”
나와 유상훈이 등을 돌려 1학년 구역 운동장으로 향하자, 덩그러니 남겨진 주수혁과 안다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게 들렸다.
“저기.”
“있잖아.”
둘이 동시에 말을 뱉었다.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둘 사이.
몇 번의 양보 끝에 안다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네가 추천해 준 책에 대해서.”
“그, 럼 어디 앉아, 있다가 갈까?”
“……응!”
주수혁 저 숙맥이 절호의 데이트 찬스를 땅에 처박고 말았다.
또 둘이 학교 안에서 건전하게 독서 토론회나 하게 생겼다.
‘저 꼴을 보니 둘은 저녁도 같이 못 먹겠구나.’
안 봐도 뻔하게 예상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 회의에서 네 이름 나왔던 것 같은데. 사고 침?”
유상훈은 회의 시간에 제대로 퍼 잤는지 앞뒤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 하는데 거기 후보로 뽑힌 거야.”
“쩌네. 유상희 씨도 뽑혔냐?”
“올해 내로 개최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서 3학년은 명단에 없었어. 졸업 준비랑 진로 결정 때문에 바쁘잖아.”
“……그래.”
진로 결정이라는 단어를 들은 유상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저놈도 조금은 유상희를 걱정하고 있나 보다.
“야, 1학년.”
“원우 형, 1학년은 두 명 있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 불러 세운 건 도원우.
옆에서 한마디 거든 건 천동하였다.
2, 3학년의 두 수석이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또.”
유상훈이 징그러운 걸 보는 눈으로 도원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도원우는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유상훈을 보며 말했다.
“처남, 잘 지냈어? 처남과 얘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지금은 우리 처남을 부른 게 아니라 그 옆의 건방진 놈을…… 컥!”
유상훈의 주먹이 날아가기 전에 천동하가 손날로 도원우의 목젖을 쳤다.
번개 같은 솜씨에 감탄이 나왔다.
역시 천동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신체 능력도 우수했다.
“원우 형, 상희 누나 동생한테 볼일이 있던 게 아니잖아요. 이야기를 번거롭게 만들지 마세요. 1절만 해요. 아니, 1절도 하지 마요.”
도원우가 추하긴 하지만 선배인데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두 사람은 꽤 친한가 보다.
“……시후 건 말인데.”
도원우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침을 꿀떡 삼키고 뜸을 들이다 속사포처럼 말을 던졌다.
“별로 고맙지 않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워.”
고맙다는 건지 고맙지 않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감사 인사를 하긴 했으니 내 마음속 도원우의 추함도가 ‘매우 몹시 추함’에서 ‘몹시 추함’ 정도로 격상되었다.
“그럼 난 간다.”
천동하와 유상훈이 한심해하는 눈으로 도원우를 봤지만, 그는 꿋꿋하게 추하게 굴다 등을 돌렸다.
“그럼 저희도 가보겠습니다.”
아직 이쪽을 보고 있는 천동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우려 했지만.
“잠깐.”
“네?”
천동하도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건가.
“기말고사가 끝나면 체스 대국을 신청하려 했었어. 오늘은 안 되지?”
천동하가 유상훈이 들고 있는 싱글 볼 캐리어를 보며 말했다.
“네.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기다릴게.”
천동하는 호전적인 타입은 아니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국을 신청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체스 대국을 신청하더라도, 그냥 던지듯이 말해 보고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반응할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체스에 한해서는 적극적으로 구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나와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천동하가 사라진 후에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뭐 해, 가자.”
유상훈이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중단하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날은 해가 질 때까지 유상훈과 1 대 1로 농구를 했다.
농구부 훈련을 착실하게 받은 유상훈과 나 사이의 실력 차는 더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상훈은 어른스럽지 않게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나를 압살했다.
15점 넘게 차이가 난 스코어가 분해서 몇 번이나 재대결을 신청했지만 계속 지고 말았다.
초보를 무자비하게 이긴 게 좋은지 유상훈은 저녁 메뉴 선택권을 나한테 넘겼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내 제자 염준열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장마 전선이 북상해서 아침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밤늦게부터는 빗줄기가 거세질 것 같아요.
평소대로 날씨 얘기 이후에는 신변잡기가 이어졌다.
[염준열] 장마가 시작되면 외출할 때마다 붙는 경호원이 두 배로 늘어서 답답한 기분이 들어요. 등하교할 때도 제건이 형이랑 같이 해야 하고…….
비가 안 오더라도 용제건은 염준열과 붙어 다니지 않나?
경호원이 늘어나는 건 둘째치고 후자는 그냥 비 핑계를 대는 것 같은데.
[염준열] 제가 비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강해지면 비 오는 날에 혼자서 외출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죠?
[염준열] 얼른 스승님의 다음 수업을 받아 강해지고 싶어요!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이 보낸 스탬프에는 데포르메한 홍룡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는 홍룡의 표정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디자이너가 물에 약한 홍룡의 성질을 반영해 이렇게 그렸나 보다.
‘비가 그치면 다음 수업을 할까.’
약해진 염준열을 상대로 이능 삼키기 같은 리스크가 큰 훈련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비는 언젠가 염준열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성적 얘기가 없었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내 제자가 언급하기 싫으면 모르는 척해 줘야지.’
다음에 염준열을 만날 때는 말을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머릿속으로 수업 계획을 구상하며 아침 훈련을 일찍 마치고 1학년 건물에 들어섰을 때.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선가 말싸움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1층에 위치한 특별 교무실 쪽.
다용도실을 명예 교사 전용으로 개조한 교무실이었다.
‘1학년을 맡는 명예 교사는 다 주요 인물인데.’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려 접근하니, 바로 큰 소리가 들렸다.
“할배도 봤잖아, 나한테 재능이고 뭐고 없는 거! 광림도 가호도 등신 같아서 써먹지도 못 해!”
“고얀 놈! 할배라고 부르지 말라 했거늘!”
“지금 그게 중요해?!”
방윤섭과 탁거산의 목소리였다.
“안 해! 시바! 어차피 도인 할배도 그 땅꼬마 새끼 제자로 맞이하려고 나 이용해 먹은 거잖아! 선심 쓰듯 선생질하려 들지 마!”
그 말에 탁거산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 * *
아침 일찍 출근한 김신록.
홀로 1학년 건물 최상층에 있는 교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장소 확보가 많이 힘들었어.’
종이로 인쇄한 1학년 청소년 수련회 장소를 확인하던 김신록이 생각에 잠겼다.
몇 년 전, 국회의원 성국언이 발의한 건축법 개정 법안이 통과됐다.
법안의 주요 개정 내용은 플레이어 수용 시설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능을 고려하면 한계 하중과 강도를 높게 잡았어야 했었어. 오히려 법 개정이 늦었던 편이야.’
덕분에 플레이어 관련 안전사고는 많이 줄었지만, 그만큼 할 일이 늘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을까…….’
김신록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교사를 하던 시절.
온갖 장난질로 학교를 뒤집던 어린 성국언이 떠올라 웃었다.
진족과 후예를 꺼려 하기로 소문난 성국언이라 멀리하려고 했었는데, 성국언은 끝까지 제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을 잘 따랐었다.
가짜 신분을 사장하기 위해 조용히 장례식을 치렀을 때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성국언이 찾아와 조문하고 가기도 했었는데…….
“신록아.”
용제건의 목소리로 회상이 중단되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용제건이 출근했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용족의 후예와 함께 등교하느라 그랬겠지.’
기말고사도 끝나고 비도 오는데 용족의 후예는 왜 이렇게 일찍 등교한 걸까.
차석 자리로는 성이 차지 않은 걸까.
미묘한 후예인 자신과 사랑받는 용족의 후예는 처지도, 마음가짐도 다른 걸까.
“은광구 밖으로 나가게 되는구나. 아직 ‘눈’ 문제는 해결이 안 됐는데.”
용제건이 김신록의 어깨너머로 서류를 보다 긴 손가락으로 ‘석모도’라는 지명을 툭 쳤다.
불안정한 입장인 김신록이 신역 밖으로 나가는 걸 원치 않나 보다.
“너도 이제 부담임이니까 동행할 거 아니야. 0반, 1반, 2반은 같이 움직이니까. ……황호 님과 네가 가는데 별일 있겠어?”
“사실 ‘눈’ 문제 말고도 걸리는 게 있어서.”
용제건의 옥색 눈이 가만히 김신록을 비췄다.
“얼마 전에 은광구에서 ‘까마귀 마왕’이 아끼는 인간을 봤어. 여전히 그 마왕 놈은 나와 취향이 안 맞더군.”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