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성장의 실마리 (4)
‘대답하기 어려워도 해 줘야 할 텐데.’
침묵이 길어졌다.
침묵을 깬 건 울먹거리는 것 같은 방윤섭의 목소리였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에이씨…….”
“빵셔틀아…….”
“아, 진짜! 그 단어는 또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중요하고 진지한 순간, 분위기가 망했다.
탁거산은 친근감을 주기 위해 방윤섭의 별명으로 부른 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이름으로 불렀어야 했다.
어쩐지 탁거산은 빵셔틀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허허, 학생들이 내 임시 제자를 그렇게 부르는구먼! 나도 그렇게 불러 볼까!’라는 생각으로 썼을 것 같다.
“……할배 제자 되고 싶은 새끼들이 전국에 줄을 섰다면서. 나한테 귀찮게 굴지 말고 그 땅꼬마나 줄 섰다는 새끼들한테 꺼져.”
방윤섭은 기운 없이 마지막 대사를 던지고 특별 교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문 근처 벽에 기대 있던 나를 보고 흠칫 놀라다 쌍욕을 중얼거리고 1학년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떻게 할까…….’
방윤섭은 졸렬하고 한심한 청소년 흡연가다.
욕먹고 맞고 다녀도 싼 짓을 하고 다녔으며 맞고 나서도 쫄아 든 건 한순간, 다시 나대고 다녔다.
게임적으로 따지면 주인공의 멋짐과 정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까불다가 처맞고 퇴장당할 정도의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었다.
‘방윤섭이 강해지면 어쨌든 은광고 전력의 상승과도 이어지니까 억지로 사제 관계를 맺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약속의 불집게’로 붙잡을 수도 있고, 계약 해제를 빌미로 더 큰 족쇄를 걸어 탁거산에게 팔아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뭔가를 제안하면 허세를 부리기 위해 방윤섭은 무조건 응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은광 트레이닝 코스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억지로 밀어 넣기가 좀 그런데. 탁거산의 첫 번째 제자가 되는 건 나름 큰 의미니까.’
저놈이 죽어라 사 온 빵을 맛있게 먹던 우리 반 애들이 떠올랐다.
착한 우리 반 애들은 빵 잘 먹었다면서 내 빵셔틀을 보면 인사도 하고 가끔 간식이나 우유를 나눠 줄 정도로 친하게 대해 줬다.
‘일단 상황을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열려 있는 특별 교무실 문을 노크했다.
“안녕하세요, 탁거산 선생님.”
“……0반 부반장이구나. 들어오거라.”
교무실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박스가 널려 있었다.
탁거산이 도복과 상패를 챙겨 박스에 밀어 넣고 있었는데,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아 물었다.
“다른 교무실로 옮기시나요?”
“아니. ……이제 제자도 뭣도 없으니 물러가려고 했었다.”
“네?”
“효돈이와 약속한 것도 있고, 내가 무심하게 굴어 저 빵셔틀한테도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
탁거산은 주름 가득한 얼굴로 박스에 우겨 넣은 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등신같은 놈이 재능도 없고 근성도 없고 참을성도 없고 성품도 바닥을 기는 건 사실이다만…….”
빵셔틀이라고 부른 데에 이어 방윤섭의 디스가 쏟아졌다.
내 제자는 까도 내가 깐다는 선언대로 탁거산은 방윤섭을 어마어마하게 깠다.
전부 맞는 말이긴 했지만.
“참으로 하찮은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효돈이 제자로 받을 생각에 열심히 가르쳤지.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이라고 갈수록 그냥 밉지가 않고, 누굴 가르친다는 게 참 즐겁더구나…….”
탁거산은 방윤섭이 뛰쳐나간 문 쪽을 바라봤다.
탁거산의 실력이라면 맘만 먹으면 방윤섭이 에어보드를 타고 달아나도 한순간에 붙잡았을 거다.
그래도 상처를 줬다는 생각에 놔준 모양이다.
“……방학도 곧 오니까 학교 일정에 차질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괜찮다면 나중에 두 사람한테 미안했다고 전해 다오.”
탁거산은 방윤섭의 말에 죄책감이 들어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세요.”
“응?”
“제자를 두고 어디 가시게요.”
탁거산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맹효돈은 탁거산 선생님 제자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가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뭐라고!”
탁거산이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얼굴이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 보였던 맹효돈의 행보와 남긴 말들, 같은 반 급우로서 옆에서 지켜본 그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내린 결론이었다.
“방윤섭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걔도 제자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대신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 뒤로 이어진 말을 들은 탁거산은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나 그의 예비 제자에게 손해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승낙했다.
“화백님 말씀대로 똘똘해 보이기는 한데 어째…….”
교무실을 나서는 내 뒤로 ‘수상하다’라는 말이 들려온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아직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등교할 시각이 되지 않아 한산한 복도.
방윤섭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전용메뉴의 ‘주변 지도 열기’ 기능도 있긴 하지만, 그쪽은 지형 재확인이나 피아 식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지도에 찍힌 점만 봐서는 방윤섭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찾아낼 방법은 있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시스템음이 들리고, 이능파로 구현된 카드가 눈앞으로 한 장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사용하는 캐릭터는 천리안 스킬을 가진 선도부 2학년, ‘안중지계(眼中之界) 천동하’.
그의 광림을 빌리면 1학년 구역 전체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을 사용합니다.〉
‘건곤(乾坤)을 품은 눈’이 발동된 순간 머릿속이 넓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수천, 수만 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켜 놓고 눈이 아니라 뇌로 직접 정보를 밀어 넣는 감각이 들었다.
‘찾았다.’
바로 광림을 중단하고 방윤섭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를 발견한 장소는 1학년 구역의 외진 돌길 저편.
자동 청소 기계가 보관된 창고로밖에 이어지지 않은 데다 길이 울퉁불퉁해 학생들이 기피하는 장소였다.
그런 길 너머 창고 벽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방윤섭의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고 궁상맞았다.
“야.”
“아이씨! 캑!”
나라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연기를 삼키던 방윤섭이 화들짝 놀라다 정신없이 기침을 해 댔다.
여전히 담배 하나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한심한 놈은 내 눈치를 보다가 별말을 안 한다 싶으니 다시 뻐끔뻐끔 피워 댔다.
“잘 피우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담배를 피워.”
“내, 내 맘인데, 캑, 웩!”
방윤섭은 또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못 삼키고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야, 탁거산 선생님은 너 기다리실 거야.”
“……그 할배가 기다리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야.”
“계기가 뭐든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 할 거 아냐.”
방윤섭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
저 멍청이도 일단은 은광고에 소속될 만한 플레이어니까 탁거산의 제자가 되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이해하고 있을 거다.
“머리가 식으면 다시 생각해 봐. 나중에 마음 바뀌었을 때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뵈러 가.”
방윤섭같이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타입은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도 고민만 하지 탁거산을 찾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놈이 자의로 두드리면 열릴 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전해 두고 싶었다.
내 말이 끝나도 방윤섭은 그냥 입을 다물고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을 바라봤다.
입에 물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만 한 게 더 피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윤섭의 흡연도 끝난 것 같아 인사말을 남기기로 했다.
“조례 시작하기 전까지 뛰어가서 빵 사 와. 서문 앞 ‘MITRON’에서 여름 제철 과일 특선 아이스 브레드, 12개짜리 한 세트로. 쿨 데니쉬가 들어간 거로 골라 와.”
“개새끼…….”
“강원도 감자빵이랑 옥수수빵이 맛있다던데…….”
“아, 진짜!”
쌍욕을 하던 방윤섭은 ‘강원도’라는 단어에 욕을 멈추고 허둥지둥 서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날도 더운데 아침부터 반 아이들에게 시원한 간식 먹일 생각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뛰어가는 방윤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의신아.”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었다.
“1학년 건물에서 갑자기 동하 기운이 느껴져서. 혹시 네가 또 그 능력을 쓴 건가 해서 구경 왔어.”
말이 들려온 건 허공이었다.
하늘에 용제건이 떠 있었다.
공중에서 공간술로 몸 주변에 공간을 전개해 몸을 감추고 비행 스킬로 따라왔었나 보다.
학교 안에서 별일 있겠나 싶어서 주변 경계를 느슨하게 했더니 허를 찔린 것 같다.
기척을 읽어 내지 못한 게 좀 분했다.
“그럼 구경 다 했으면 교실로 들어가죠.”
“하하! 아직 조례 시작 전까지는 시간이 있잖아?”
용제건이 비행 스킬 사용을 중단하고 내 바로 앞으로 착지했다.
착지하는 사이에 느슨하게 묶은 긴 머리가 허공 위에 호선을 그렸다.
용제건이 교원 계약을 맺을 당시, 아직 두발 자유화가 보편화된 시대가 아닌 탓에 그의 긴 옥색 머리카락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를 은광고에 고용하는 조건 중 하나로 옥색의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거나 짧게 자를 것,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는데 용제건은 염색을 택했다고 들었다.
‘나 같으면 그냥 잘랐을 것 같은데.’
헐겁게 묶은 탓도 있겠지만, 용제건의 머리카락은 묶고 나서도 허리선을 넘어 지나치게 길어 보였다.
“안 더워요?”
“익숙해지면 괜찮아. 또 물어볼 거 있어?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용제건의 가늘게 뜬 눈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말해 보라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네가 상대하는 호족의 ‘적’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그렇지?”
“……네.”
“내가 그 적을 직접 상대하면 어떨 것 같아? 이길 수 있을까?”
뜬금없는 질문이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용제건의 힘만으로는 안 될 거다.
교원 계약의 제한이 해제된 용제건으로도 어려울 것 같았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던 용제건이 다시 질문했다.
“용족 전체의 힘이 더해지면 어때?”
용제건에 이어 용족 전체의 힘.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용족 전체의 힘으로도 안 돼.’
고3이던 염준열이 사망하고 붉은 사자와 그 동맹 팀, 거기에 용족까지 봉기했을 때.
격전 끝에 용왕신의 무녀가 배신한 후, 용왕신의 가호를 잃은 염방열은 자신의 홍염에 불타 죽었고 청룡은 깊은 잠에 빠졌다.
‘용왕신이 끝까지 청룡의 손을 들어 줬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용왕신은 무녀 쪽을 택했어.’
살아남은 붉은 사자 팀원과 용족들은 마지막까지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흑막을 처리하기는커녕 염준열의 복수도 하지 못했어.’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이후, 주수혁이 2학년이 되자 유학에서 돌아오며 은광고에 등장한 염준열,
PV로 새로 공개된 염준열의 화려한 인게임 모션과 일러스트, 캐릭터성에 혹해 신규 유저들이 유입됐었다.
염준열이 사망한 후,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대부분 게임을 접었었다.
하지만 한 줌 정도 되는 팬들은 ‘우리 홍룡이 복수하는 건 봐야겠다!’, ‘존버는 승리한다!’를 외치며 버텼다.
결국 참혹한 결말에 쌍욕과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탈덕 선언서를 투척한 후 떠나게 됐지만.
‘그래도 애플리케이션 스토어 별점 1점대 위에 있던 플마고 게임 앱은 그 사건을 계기로 0점대 밑으로 떨어졌었는데.’
‘별점이 아니라 시력인 줄.’이라고 까이던 플마고의 별점은 시력은커녕 샤프심의 굵기 단위 수준으로 폭락하고 말았었다.
“안 되나 보구나.”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으신 거예요?”
“그냥, 은 아니고. 좀 걸리는 점이 있어서.”
아까부터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멋대로 내 생각을 짐작해 내던 용제건이 다시 내게 질문했다.
“의신이 너는 까마귀 가면을 애용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어?”
“왜요?”
“나랑 취향이 아주 아주 맞지 않는 까마귀 마왕이 있는데, 최근 그 관계자가 눈에 띄어서.”
“……그 마왕의 소재를 아나요?”
“아니. 흠, 네가 쓰는 그 가면은 마왕과 무슨 관계가 있긴 하구나.”
또 생각을 읽혔다.
계속 진지한 표정이었던 용제건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왕의 소재는 몰라도 그가 가호를 내린 인간이 지금 어디에서 뭘 하는지는 알아. 궁금하면 물어봐도 돼. 대가로는 내 질문에 ‘아는 대로 전부 대답하는 것’으로 할까.”
방관과 침묵의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
그의 가호를 받은 인간.
궁금하긴 했지만, 게임 속 시나리오와 지금 상황을 고려해 결론을 내렸다.
“아직 안 궁금해요. 다음에 필요할 때 물어봐도 될까요?”
용제건이 재미없어하는 얼굴을 했지만, 딱히 깊게 캘 생각은 없는지 순순히 물러나 줬다.
그의 표정에도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황지호와 다르게 뒤끝 없이 물러날 줄을 아는 마음씨 넓은 용이었다.
* * *
용제건과 대화를 마치고 들어간 교실 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 탓인지 아이들이 모두 등교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교실 풍경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너희들 뭐 해?”
교실 뒤편에 걸려 있던 거울 앞.
권레나가 손에 틴닝 가위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앞엔 미묘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송대석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또 저놈은 왜…….’
송대석 옆에는 황지호도 앉아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