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성장의 실마리 (5)
“그게…… 대석이가 오늘 엄청난 머리로 등장해서…….”
“그냥 ‘좀 심한 머리다!’하고 넘어갈 수도 있긴 한데, 저 머리로 증명사진을 찍는다니까 어떻게든 해 주고 싶었어!”
민그린과 권레나가 송대석의 앞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사무용 가위로 직접 자른 듯한 일직선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송대석은 예능인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벌칙 수행용으로 할 것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머리 형태보다 더 시선을 끄는 점은 따로 있었다.
‘눈이 드러났어……!’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송대석의 눈은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앞머리 자른 게 훨씬 낫긴 한데…… 미용실에 가서 자르지.”
“앞머리만 자르면 되는데 귀찮게 거길 왜 가.”
“미용실에선 앞머리도 잘라 줘!”
“맞아. 보통 컷 가격보다 싸게 잘라 줘.”
미용실에서 그런 것도 해 주나.
남고생들은 의아해했지만, 여고생 쪽에선 전부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 숱가위는 대체 어디에서 난 거야.”
“응급처치용이야! 앞쪽 머리는 생각보다 금방 자라서 방심하면 눈을 찔러. 아침 일찍 미용실 갈 시간이 없을 때 살짝 다듬어 주는 용도로 사물함에 두고 다녀.”
권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알루미늄 꼬리빗과 틴닝 가위를 들어 보였다.
전에 맹효돈과 내 머리를 정리해 준 것도 그렇고, 권레나는 손재주도 뛰어나고 남 머리 만져 주는 것도 좋아하나 보다.
“됐으니까 빨리 잘라. 조례 시작한다.”
“응!”
송대석이 투덜거리면서 말하자 권레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담요를 꺼내 송대석 목에 둘렀다.
송대석이 눈을 드러낸 것도 신기했지만, 저렇게 얌전히 민그린 이외의 다른 아이의 말대로 있는 건 더 신기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했었지. 협회 인턴 지원용 사진일 거야.’
송대석은 은광고에서도 그럭저럭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신원도 확실하고 외부 활동 이력이 전혀 없어 보안적인 측면에서도 완벽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인턴으로 무사히 채용될 거다.
‘게다가 송대석은 협회 위성 지식에도 해박해. 협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협회에 관련한 어떤 질문이 나와도 잘 대답할 거야. 게임 속에선 민그린과의 대화에서 가끔 언급되는 정도로만 나와서 어느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턴에게 대단한 일은 맡기지는 않겠지만, 위성 마니아에게는 좋은 직장 체험이 될 거다.
“고개 조금만 위로 들어 줘. 그만! 거기서 움직이지 마!”
“그냥 대충 잘라…….”
“안 돼!”
“와, 레나 솜씨가 정말 좋네요! 새로 다듬은 부분이 굉장히 깔끔해요.”
송대석의 반항이 완벽하게 묵살당하는 훈훈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때.
처음 느낀 위화감과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넌 왜 여기 앉아 있어?”
마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는 황지호에게 물었다.
“한마디 했다가 휘말렸어.”
“뭐라고 했는데?”
“슬슬 한쪽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찔러서. 나도 잘라 버릴까 했는데 도와주겠다더군.”
왜 이놈은 불필요한 말을 해서 우리 반 아이들을 번거롭게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어쨌든 반 아이들이 즐거워 보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카락 길이는 조절 못 해?”
“우리의 신체 기능의 작동 원리는 기본적으로 인체와 비슷해. 인간처럼 내버려 두면 멋대로 머리카락이 자라. 뭐, 자의로 길게 만드는 건 가능하겠군. 이능파로 세포 분열을 촉진시키는 방법이 있겠지만 상당히 번거로워.”
황지호의 설명을 듣는 사이에 송대석의 앞머리가 전부 다듬어졌다.
한결 산뜻해진 머리를 한 송대석을 본 아이들이 감탄했다.
“훨씬 낫네.”
“그동안 머리 때문에 티는 안 났는데, 대석이는 좀…….”
“흑백 필름 시절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증명사진 찍으면 어떻게 나왔는지 보여 줘!”
한때 플레이어계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던 송만석을 복사 붙이기한 수준으로 닮은 송대석.
그는 선이 굵직굵직한 고전적인 미남형 얼굴이었다.
“잘 어울린다……! 고마워!”
“……고맙다.”
간만에 훤칠해진 송대석의 모습에 민그린이 더 기뻐했다.
민그린을 보며 희미하게 웃던 송대석도 권레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두 소꿉친구가 사이좋게 머리카락투성이가 된 담요를 털러 간 사이, 권레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음은 지호 차례야!”
“하하하! 맡겨 볼까.”
권레나의 솜씨를 가만히 지켜보던 황지호가 처웃으며 거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르마를 6 대 4 정도로 타서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머리 형태를 한 황지호.
조금 긴 쪽의 머리카락이 황지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음…….”
권레나가 황지호의 앞머리를 정중하게 빗질하며 말했다.
“지호는 이마도 반듯하고 눈썹도 굉장히 깔끔해서 넘기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녀가 빗으로 황지호의 머리카락을 전부 넘겼을 때.
권레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황지호를 바라봤다.
“지호야, 혹시…… 이전에 권제인 선배님이 호연관에서 공연할 때 친척이 오지 않았어? 굉장히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은데.”
30대 버전의 황호를 말하는 건가.
그날 그 버전의 황호는 머리를 전부 뒤로 넘긴 상태였으니 눈썰미가 좋은 권레나가 뭔가 알아챈 모양이다.
황지호는 동요라곤 전혀 하지 않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날 학교에 내 친척은 한 명도 없었어.”
“……그래?”
황지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분신도 결국 본인이니까 친척은 아니었다.
“반쪽 머리카락은 기분 내킬 때 뒤로 넘겨 볼까. 그래도 전부 넘기는 건 싫어.”
“응! 그럼 긴 쪽만 살짝 다듬을게.”
“부탁한다.”
분신 별로 헤어스타일을 바꿔서 다른 인상을 주려는 걸까.
권레나처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좀 곤란해지긴 할 거다.
황지호의 머리카락 정리가 끝날 때쯤, 밖에 나갔던 송대석과 민그린이 돌아와 화제가 바뀌었다.
“곧 여름방학이죠. 다들 어떻게 지내실 예정이세요?”
“어디 다 같이 놀러 가고 싶어!”
“여름이니까 바다 어때?”
그 말에 김유리가 흠칫 굳는 게 보였다.
“공문도 안 봤냐? 좀 있으면 다 같이 바다 가잖아.”
“네?”
“오늘 아침에 올라온 공지인데.”
송대석이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1학년 대상 청소년 수련회 안내’.
공문을 읽던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대박! 난 갈래!”
“가고 싶다.”
“전 갈 거예요!”
하지만 공문을 다 읽고 풀이 죽은 아이도 있었다.
“사람 많아서 난 못 가겠다…….”
“다음 주부터 도와주시던 자원봉사자분이 그만두실 예정이라 보육원에 일손이 부족해. 방학 동안에는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어. 나도 못 가.”
민그린과 한이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송대석도 민그린이 못 간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자기도 안 가겠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 전에 민그린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나는 못 가니까 대석이가 다녀와서 감상 많이 말해 줘. 사진도 많이 찍어 와야 해. 알았지?”
“…………어.”
민그린이 부탁하는 데다 반 아이들을 상대로도 태도가 다소 유해진 송대석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둘이 못 가서 아쉽다. 유리는 갈 거지?”
화제가 바뀐 이후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김유리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그러니까, 나는…….”
“가자.”
망설이는 김유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런 주요 행사에 반장이 빠질 수는 없잖아.”
“맞아요! 유리도 꼭 와요!”
“아, 수련회에서 입을 옷 쇼핑하러 가자. 난 못 가지만 쇼핑은 같이 가고 싶어.”
반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김유리가 제대로 말을 끊지 못했다.
김유리가 아이들 뒤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한마디 덧붙였다.
“괜찮을 거야. 가자.”
확신에 찬 나를 보고 김유리가 주저하며 물었다.
“정말로 괜찮을까……?”
“응.”
김유리는 들떠 있는 아이들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과 후.
디바이스에 의외의 인물이 메시지를 보낸 게 눈에 띄었다.
[김신록] 안녕하십니까, 조의신 군.
이 사고뭉치 후예가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걸까.
사고뭉치라는 과거 전력과 매번 서두에 붙이는 정중한 인사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상당했다.
[김신록] 오늘 유희계의 용이 대화 중에 갑자기 불길하게 웃으며 뛰쳐나갔습니다.
[김신록] 사라지기 전, ‘네 은인이랑 이야기하고 올게’라고 하더군요.
[김신록] 그 용이 조의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습니까?
용제건은 내 쪽으로 오기 전 김신록과 있었나 보다.
뒤에서는 나를 김신록의 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나.
[김신록] 용이 사고를 칠 것 같으면 제 쪽으로 연락주십시오.
용제건이 사고를 치려 해도 김신록이 막을 수 있는 걸까.
둘이 얼마나 친한지 알 수 없으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음 메시지도 인간이 보낸 게 아니었다.
[백호군] 오늘은 관객이 하나 있다.
[백호군] 괜찮겠나?
나도 이전에 황지호를 끌고 왔으니 상관없었다.
백호군이 이상한 놈을 끌고 올 리도 없고.
그의 교우 관계나 상황을 고려하면 황지호나 적호일 가능성이 큰데.
[나] 괜찮아.
[백호군] 알았다.
그렇게 답변을 날리고 누구인지 추리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훈련을 하기로 한 은련관에 가면 직접 마주할 테니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청랑호의 호수 안개, 벽사의 결계를 지나 도착한 은련관.
“그 관객이라는 건 누구야?”
결계 앞에서 나를 마중 나온 백호군은 혼자였다.
그를 따라 이동해 도착한 수련장에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안 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왕!
올무다!
올무가 귀엽게 짖는 소리가 수련실 저편에서 들렸다.
“올무야……! 나 보러 온 거야?”
몸을 낮춰 올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올무가 작은 발을 놀려 달려오다 깡총하고 내 품으로 점프했다.
그 과정에서 보인 놀라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또 안긴 결과 품 안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털과 온기에 다시 감탄했다.
오늘도 올무의 귀여움은 여전했다.
여전해?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성장하지 않는 것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땐 어른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솜뭉치였던 올무.
재활 훈련이 끝날 때쯤엔 무릎 위에 올려 두기 적당한 크기로 성장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올무의 성장이 멈춰 있었다.
‘신기가 점점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왜지?’
꼬리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애교를 부리는 올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백호군에게 물었다.
“올무 밥은 잘 주고 있는 거야? 왜 안 크는 거지?”
“……?”
끄응…….
백호군과 올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생각해 보니 올무는 언제나 완벽했고, 백호군이 올무를 소홀히 대할 리가 없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미안해! 올무는 언제나 귀엽고 완벽해!”
왕!
착하고 똑똑한 올무는 한순간 어리석었던 나를 금방 용서해 줬다.
“조의신, 네 지금 표정은…….”
상황을 지켜보던 백호군이 한마디 했다.
보나마나 지능이 떨어져 보인다, 멍청해졌다 이런 말이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상당히 행복해 보이는군.”
의외의 말이 나왔다.
올무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백호군은 등을 돌리며 말했다.
“10분 뒤에 대련을 시작하겠다.”
백호군의 선언대로 10분 뒤.
카앙! 카아앙!
크르르…….
올무가 관전하는 가운데, 백호군의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와 그가 소환한 권속, 영호(影虎)와의 격전이 이어졌다.
백아의 예리한 날로부터도, 영호의 이빨로부터도 시선을 뗄 수 없어 이쪽의 열세가 계속되었다.
‘안광 스킬을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무너질 거야. 상시 발동하면 부담이 크니까, 영호의 움직임을 읽고 사용 타이밍을 잡아야 해!’
그래도 그간 거듭한 대련 속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다.
버티는 법만 배운 것도 아니다.
백호군과 영호의 시선, 이능파의 흐름 따위로 나도 그들의 다음 수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의 수를 읽으면 받아쳐 내는 수도 준비할 수 있어.’
백호군과의 대련이 끝날 때마다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서 가정했던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이다!’
백호군의 검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영호가 몸을 낮춰 뒤로 물러났을 때.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아직 백호군과 대검이 맞닿지 않은 상태에서 두 영호를 묶는 데에 성공했다.
그대로 있는 힘껏 백호군을 향해 상보심금파를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갈래를 발동했다.
콰아아아—!
상보심금파의 이빨 끝에서 이능파가 터져 나온 순간.
한 손으로 무심하게 대검을 휘두르던 백호군이 두 손으로 대검을 쥐는 게 보였다.
‘두 손을 쓰게 만들었어……!’
기쁨도 잠시, 곧 상보심금파를 쥔 손을 시작으로 몸 전체에 충격이 번졌다.
카아아앙!
상보심금파와 애도의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은련관을 뒤흔들었다.
검압에 밀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여태까지는 정말 봐준 거였어!’
불타는 것처럼 저릿저릿한 손에 힘을 더했을 때였다.
삣.
이 세계에 처음 온 날 들었던 시스템 안내음이 들렸다.
〈무기의 숙련도가 100%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