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5)
〈무기의 희귀도가 UR에서 UR+로 상승합니다.〉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상보심금파에서 희귀도 변화 이펙트가 흘러나왔다.
파아앗!
빛나기 시작한 상보심금파 탓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양손으로 든 백아로 갈래를 막아낸 백호군이 빛 사이로 점점 사라졌을 때.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기는 어디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은 밤이었다.
방금까지 있던 은련관 수련실의 천장도 서방칠수를 표현하기 위해 어둡긴 했지만, 벽에 박힌 조명 탓에 실내 장식의 일환이라는 느낌을 줬다.
그러나 지금 있는 곳은 전혀 달랐다.
‘저건…….’
무수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여기저기가 부서진 거대한 체스보드가 있었다.
체스보드 위에는 흑과 백의 체스 피스가 가득 놓여 있었다.
아직 몇 수 두지 않은 오프닝 국면.
국면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체스 피스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쪽. 흑의 체스 피스만 유독 상태가 안 좋아…….’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견고한 백의 체스 피스에 맞서는 흑의 체스 피스는 온통 금이 가고 너덜너덜했다.
저 흑의 체스 피스를 잡아 이대로 다음 수를 두는 게 괜찮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구치정파(九齒釘耙)를 무사히 다루어 내었구나.]
그때, 쥐고 있던 상보심금파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키모폴레이아에서 들었던 그 온전한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직도 그 돼지를 패 주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느냐?]
당연히 변하지 않았다.
저강렵은 돌아왔고 흑막도 건재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이야.”
[저강렵을 부추긴 이가 인간이 감히 대적할 만한 존재가 아닌 것도 알고 있느냐? 저강렵과 대립하면 그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그건 알고 있었다.
내 우수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힘으로도 대적하기 어려웠던 존재였으니까.
그래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내가 망설임 없이 답하자 손에 쥐고 있던 상보심금파가 웅웅거리며 이능파를 토해 냈다.
[하하하하!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런 마음이라면 나도, 노자(老子)도 너를 구치정파의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다!]
이능파가 한차례 상보심금파를 휘감은 후.
상보심금파의 자루는 흙색에서 흑단색으로, 이빨은 쇳빛에서 칠흑빛으로 바뀌었다.
검게 물든 자루와 이빨은 더 견고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내 새로운 주인이 ‘아홉 번째 갈래’를 사용할 날이 벌써 기대되는구나.]
가장 강력하다는 아홉 번째 갈래.
저강렵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그 갈래를 말하는 건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언젠가 반드시 사용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반상이라니…… 흐음…….]
“이 세계를 말하는 거야? 이 공간은 뭐지?”
[이건 네 정신을 시각적으로 구현화한 공간이다.]
여기가 내 정신세계라고?
부서져 있는 체스보드와 체스 피스를 보며 ‘그럴 리가!’라고 생각했지만, 맹공세를 펼치는 검은 체스 피스를 보면서 납득하고 말았다.
“저강렵의 정신 속 세계는 어땠어?”
[너도 보았을 텐데.]
그때 저강렵이 쥔 상보심금파에 꿰뚫렸을 때 본 그 공간 말인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 속.
그 공간에는 나와 상보심금파, 둘뿐이었다.
[제대로 보았구나.]
제대로 봤다고?
이해가 가지 않아 반문하려 했지만, 어느 생각이 번뜩하고 머리를 스쳤다.
“설마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이 저강렵의 정신을 구현화한 세계야?”
그 욕심과 욕망의 대명사 저팔계의 정신 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니.
[새 주인에게는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로구나. 여기는 어둡지만, 별이 많아.]
상보심금파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시야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빛이 멎자 백호군이 보였다.
상보심금파와 맞닿은 백아에서 피어오르는 이능파의 잔재 속,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스킬 ‘만물 사용’의 레벨이 4에서 5로 상승하였습니다.〉
만물 사용 스킬 레벨도 올랐다.
숙련도를 채워 UR급의 아이템을 UR+까지 성장시키고 그 무기의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들은 결과물일까.
“원하는 걸 얻었나 보군.”
가만히 나를 보던 백호군이 백아와 안광으로 묶였던 영호를 거두며 말했다.
백호군의 시선 끝에 검게 변해 광택을 내는 상보심금파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잘 들었나.”
“어, 고마워.”
감사 인사를 듣는 백호군의 얼굴에 온기가 감돌았다.
왕! 왕왕!
대련이 끝났다고 판단한 듯 똑똑한 우리 올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 올무를 안아 들으려 할 때, 백호군의 말에서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오늘‘은’? 아직 대련을 더 해 줄 생각인가.’
목표로 하던 상보심금파의 목소리 듣기는 성공했는데, 백호군은 앞으로도 계속 훈련을 도와줄 생각인가 보다.
신화계 호족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도와준다면 당연히 환영할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올무와 백호군, 둘이서 훈련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품 안에서 좀 더 쓰다듬어 달라며 애교를 부리는 올무에게 물었다.
“황지호한테 들었는데 너도 훈련한다면서. 보여 줄 수 있어?”
……끄응.
올무가 고개를 돌려 품 안에서 몸을 말았다.
기운 없는 소리를 내는 것도 그렇고 내가 실수한 것 같았다.
“올무야, 피곤해? 미안해, 부담 주려는 게 아니었어! 나랑 놀자!”
……왕왕!
사과하길 잘했다.
올무가 바로 기운을 내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누가 왔군. 여기에 있어라.”
나와 올무를 지켜보던 백호군이 몸을 틀어 밖으로 나갔다.
은련관에 호족이 찾아 왔나?
아니면 어떤 용자가 벽사의 결계를 깨려 하고 있는 걸까.
짧은 고민은 금방 풀렸다.
“조의신,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아, 또 그 훈련인가.”
나타난 건 황지호였다.
덤으로 황지호의 손에는 뭔가 희끄무레한 게 매달려 있었다.
‘저건, 혹시…….’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눈에 이능파가 쏠리는 것과 동시에 황지호가 들고 있는 게 확실히 보였다.
그 정체는 예전보다 훨씬 명확하게 실체를 갖게 된 산령.
산령이 황지호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나를 보자 산령이 도와달라며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크르르…….
그러나 지옥에서 올라온 짐승이 낼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자 산령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이 소리는 대체 어디서 난 거지?’
백호군이나 올무가 저런 소리를 냈을 리가 없으니 범인은 황지호나 산령, 혹은 건물의 결함에서 나오는 잡음 내지 내 환청일 것이다.
“여긴 왜 왔어?”
“산령의 정신 개조를 백호에게 부탁하러 왔다.”
황지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에 쥐고 있는 산령을 휙휙 흔들었다.
산령이 놔 달라며 두 손 모아 싹싹 빌었지만, 황지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산령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이놈이 은호의 후예들에게 이상한 놀이를 가르쳤다.”
이어진 황지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귀가해 휴식하고 있던 황지호.
그는 갑자기 저택 안에서 은호의 후예 셋의 기척이 사라진 걸 알고 당황해 그들을 찾았다.
그들을 찾은 건 미로정원 한복판.
은호의 후예들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발견한 직후 그 녀석들에게 생기라곤 전혀 없었지. 그런데…….”
황지호가 정신없이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자, 갑자기 까르르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난 그들이 말하길.
—황호 님! 깜짝 놀라셨죠?’
—기척 차단하는 법을 배워서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사진 찍었는데, 의신이 형한테 보내도 돼요?
염료를 이용해 만든 가짜 피를 묻히고 시체놀이를 하던 후예들.
그들의 꼴을 보고도 황지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한순간이라고 하나 호족의 수장을 속이다니, 대견하군. 셋 중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 거지?
주동자를 잡아내 잘 타이르고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황지호였다.
그러자 그들은 미로정원 한구석에서 빙글빙글 돌며 서프라이즈 대성공을 자축하는 산령을 가리켰다고 한다.
—산령이 알려 줬어요. 산령이 재미있는 장난을 많이 안대요.
—맞아요! 은광고 3학년 0반 분들이랑 자주 놀아서 장난치는 법을 잘 아나 봐요.
—황호 님과 의신이 오빠도 0반이죠? 저희도 내년엔 0반에 가고 싶어요! 미리 0반에 들어갈 준비 겸 연습을 해 둘래요.
—형이랑 누나는 좋겠다……. 나도 은광고 가면 0반에 가야지.
그 말을 하는 황지호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 망할 산령이 이상한 바람을 우리 후예들에게 넣어서…….”
친자식과 다름없는 후예들의 꿈이 0반에 들어가는 거라니!
은광고 이사장이자 0반 선배로서 골이 아플 거다.
“하여튼 그렇게 됐다. 따끔한 맛을 보여 줘라, 백호.”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거꾸로 붙들고 있던 산령을 백호군 앞으로 훽 던졌다.
산령은 기겁해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 전에 백호군의 안광에 붙잡히고 말았다.
“한반도 최고(最古)의 전사인 신화계 호족이 모인 신역, 영산(靈山) 천익산에 깃든 산령이라면 전투 소양이 필요하다. 태세를 갖춰라.”
스르릉—!
백호군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백아를 뽑아 들어 산령을 겨누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난타전이 이어졌다.
“하하하! 백호가 오늘 기운이 넘치는군. 잘 끌고 왔어!”
황지호는 속이 풀리는 듯 신나게 처웃었고 나는 귀여운 올무의 어리광을 받아 주며 관전했다.
산령이 섭섭해하는 눈으로 절절하게 나를 본 것 같지만, 그때마다 올무가 작은 혀로 손바닥을 간질여서 금방 아무래도 좋아졌다.
* * *
기말고사는 지난주에 끝났지만, 아직 시험의 여파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격변하는 현대 이계 이론을 다루는 최전선에 있는 은광고에선 시험 문제 정답을 두고 이의 제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은광고에서는 사전에 정한 채점 기준으로 처음 성적을 발표하고 일주일간 이의신청 심사와 성적 정정 기간을 뒀다.
‘이번엔 2학년 쪽에서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화두에 오른 건 이계에서 출몰하는 랜덤 아이템 박스의 활용 가능성에 관련한 논술형 문제.
희귀도 R급 이하의 박스는 분해를 택하는 게 낫다는 서술을 포함했다는 이유로 감점을 받은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승자는 학생 측.
무려 그 토론을 주도한 건 내 제자 염준열이었다.
염준열은 저 문제 외에도 몇몇 문제에 이의를 제기해 오답처리된 문항을 정답으로 인정받거나, 원래 정답으로 인정받은 문항에서도 추가점을 받았다고 한다.
‘염준열이 성적 얘기를 안 꺼낸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염준열은 수석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이의제기로 막판 뒤집기를 노린 것이다.
정정된 후의 등수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기말고사 후 화제가 된 건 하나 더 있었다.
‘무사히 기회를 잡았구나.’
예전에 부정 입학 사건에 휘말린 선의의 피해자.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연막용으로 특별 전형으로 부정 입학 되었던 학생.
그 학생이 이번 기말고사에서 상위 50% 안에 자력으로 들어가 학교에 재학할 것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여전히 그 학생을 퇴학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학생은 은광고에 남을 것을 택했고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으니 은광고 잔류가 확정되었다.
그렇게 훈훈한 뉴스를 종합 게시판을 통해 확인하며 등교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야, 부반장.”
송대석이었다.
시원시원하게 얼굴을 드러낸 그를 흘끔흘끔 보는 등교생이 몇 명 보이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인턴 서류 붙었다.”
아침부터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송대석이 서류에 붙은 것도 기쁜 일이었고, 나한테 합격 사실을 알려 준 것 자체도 좋은 일이었다.
“축하해. 민그린한테는 말했어?”
“……아니, 아직. 내가 면접 떨어지면 울지도 모르니까 안 돼.”
송대석이 민그린을 배려하는 마음은 역시 남달랐다.
“뭐,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말한 송대석은 더 말을 하지 않고 교실을 향해 걸었다.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걸었지만, 별로 침묵이 무겁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 * *
20대 정도로 보이는 청년.
그 청년의 허리께쯤 오는 아이.
둘은 각자 준비한 캐리어를 교환했다.
아이가 내민 캐리어에서는 괴상한 색의 액체가 담긴 파우치가, 청년이 내민 캐리어에서는 5만 원권 지폐가 가득했다.
“돈은 확인했어! 이용해 줘서 고마워, 황호!”
캐리어 한가득 담긴 현금을 보며 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곱상한 눈매로 지폐 더미를 만지며 기뻐하는 아이를 내려보던 황호가 물었다.
“의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말해 봐. 돈만 주면 해 볼게.”
황호는 그간 녹족을 상대로 몇 번의 시험과 떠보기를 거쳤다.
이들을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
수천 년 동안 거래 관계를 맺어 온 녹족에 대한 신뢰는 컸지만, 그래도 확신이 필요했다.
몇 번의 의뢰와 거래 끝에 황호는 녹족을 조금은 믿어 보기로 했다.
“이능을 가진 신체를 침식하는 독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그렇게 말하는 황호의 눈은 차분히 녹족의 수장을 관찰했다.
아이의 모습을 한 녹족의 수장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독이 있어? 방금 지어낸 거야? 상상 속의 독이지? 난 모르는데?”
“최근 인수한 테마파크의 호수 쪽에서 우연히 발견했어. 가칭으로 이능독이라고 부르고 있지.”
동결형 이계에 가득한 이능독.
협회와 호족의 기술력만으로는 해독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조의신이 직접 해독하거나 상당히 높은 희귀도의 아이템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돼. 해독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황호는 녹족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녹족의 배신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자, 봐라.”
황호의 손에서 황금의 이능파에 휩싸인 독무가 흘러나왔다.
이능독의 독기를 본 녹족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 찼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반쯤 수화해서 뿔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저 모양을 보니 배신자는 아닌 게 더 확실해졌다.
“연구하고 싶어! 할래! 하게 해 줘!”
황호는 독무를 향해 손을 내미는 녹족의 수장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얼마 전에 정식으로 석촌 호수 테마파크 인수가 끝났다. 그쪽에 이능독의 잔재가 있으니 독을 연구하러 올 준비가 되면 우리에게 연락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