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6)
교실에서 조례 시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안녕.”
간결한 인사와 함께 명예 교사로 부임한 권제인이 등장했다.
반 아이들은 놀라면서 허둥지둥 인사했다.
권제인은 엷게 미소지으며 인사에 하나하나 화답했다.
“저기, 선배님, 아니, 선생님이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아직 함근형 선생님은 안 오셨는데…….”
“줄 게 있어서.”
그녀의 말에 아이들 몇몇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권제인이 그간 했던 지나친 선물의 강도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남았어. 줄게.”
권제인은 들고 있는 쇼핑백에서 곱게 포장된 아홉 개의 상자를 꺼냈다.
어디를 봐도 그냥 남아서 주는 게 아니라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나눠 주는 걸로 보였다.
“내용물은 똑같아. 아무거나 골라.”
“저, 실례가 안 되면 어떤 선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번 앨범 재킷에 내가 하고 나온 머리띠.”
그 ‘권제인 머리띠’를 말하는 건가.
권레나와 그녀의 친구들이 그 헤어밴드 구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흘렸더니, 선물을 하러 온 것 같다.
“……저, 정말 받아도 될까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사 올게.”
방금 우연히 남아서 준 거라고 하지 않았나.
굳이 5천 살이 넘은 호족의 수장을 비롯한 남고생의 몫까지 구해 온 것도 그렇고 이상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권제인 선배님은 원래 이렇지…….’하고 넘어가려는 분위기였다.
“아.”
뒤늦게 권제인이 이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함근형 선생님 몫을 준비하는 걸 깜빡했어.”
……여전히 권제인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함근형 선생님께 레이스 헤어밴드를 선물해 봤자 처리에 곤란해하실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아이들의 인사를 받자 권제인은 뿌듯해했다.
특히 반 아이들 중 가장 기뻐하는 권레나를 보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녀는 조언을 해 준 나를 보면서 고마워하는 눈치였지만, 이번 기행으로 0반 내 평가가 ‘권제인 선배님이 특이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괴짜다.’로 바뀐 걸 탐탁하게 여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폭풍처럼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왔다 간 후.
“이호한테 선물할까.”
“이걸 대체 어디에다 써.”
“머리 흘러내릴 때 쓰면 좋지 않을까요?”
“이 학교엔 머리에 나사가 빠진 선배랑 선생밖에 없냐?”
미묘한 분위기의 남고생과 달리 여고생들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어, 어떡해! 이거 그냥 레플리카도 아니고, 권제인 선배님이 하신 거랑 똑같은 거야!”
“잘 됐다! 그때 서울에 있는 매장 다 돌았는데도 못 샀잖아.”
“우리 지금 써 보자.”
“빗 가져올게!”
거울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서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훈훈한 광경이 이어졌을 때.
“……나도 써 볼까.”
후드를 덮어쓰고 있던 민그린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당연하지.”
“그린아, 앉아 봐!”
권레나와 김유리가 하던 걸 멈추고 바로 민그린을 의자에 앉혔다.
반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후드를 벗었다.
후드에 눌린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지만, 권레나와 김유리가 빗과 머리핀을 들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니 금방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쇄골까지 내려온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머리에 머리띠를 착용하니 상당히 인상이 달라 보였다.
“잘 어울려!”
“그린이는 키가 작은 편이지만, 얼굴도 작아서…… 헤어 액세서리를 하니까 분위기가 확 산다.”
다른 아이들의 평가대로 굉장히 잘 어울렸다.
‘이제 AR 글래스를 벗을 날도 멀지 않았구나.’
민그린이 잠깐이나마 후드를 벗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민그린은 어색해하면서도 다시 후드를 쓰려 하지는 않았다.
“그린아, 잘 어울려.”
“어…….”
송대석이 몸을 낮춰 민그린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제스처인 것 같았다.
그 말을 코앞에서 들은 민그린은 민망해하며 우물쭈물하다가 송대석 손에 들린 머리띠를 잡아 그의 머리에 씌웠다.
“대석이도 잘 어울려.”
민망함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리액션이었겠지만 밖에서 볼 땐 그냥 애정행각으로 보였다.
“그래, 고마워.”
어설프게 씌워진 머리띠를 보고도 송대석이 부드럽게 대응한 탓에 두 사람은 더더욱 둘만의 세계로 빠지고 말았다.
조례를 하기 위해 들어온 함근형 선생님이 송대석이 착용한 머리띠를 보고 일순 굳었지만, 후드를 벗고 같은 머리띠를 한 민그린을 보고 납득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저 새끼는 저거 계속 차고 다닐 생각인가.”
“그냥 모르는 척해라. 저 꼴로 다니는 걸 보는 것도 재밌으니까.”
맹효돈과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안 들리는지, 민그린과 송대석은 하루 종일 커플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 * *
“……졌습니다.”
내 반대편에 앉은 박승현이 킹을 쓰러뜨리며 말했다.
“너 저번보다 잘 두는 것 같은데. 스타일도 조금 바뀐 것 같고.”
“그래?”
“좋게 말하면 여유가 생긴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수상한 수가 늘어났어.”
박승현의 말대로였다.
두통이나 손이 식는 증상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밀려드는 체스 대국을 받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 덕에 빨리 끝내기 위해 과감한 수를 두는 경우가 줄고, 멀리 내다보고 두는 수가 늘어났다.
얼마 동안 복기하며 의견을 나누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으러 가자.”
“그래. 오늘 저녁 메뉴는 한식은 돌솥 육회 비빔밥이고 양식은 양송이 햄버그 스테이크 나온대.”
평소엔 스테일메이트의 부실을 이용해 대국했지만, 오늘은 지익회관 레크리에이션 룸을 이용했다.
우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지익회관 기숙사 식당으로 이동했다.
‘지금 스테일메이트 대국실 쪽에선 염준열과 천동하가 두고 있겠지.’
역대 은광고에서 치른 시험 중 가장 많은 이의 제기 심판이 있었던 올해.
그리고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최종 석차 발표가 나기 전, 유명 플레이어이기도 한 수석 천동하와 스타 플레이어인 차석 염준열이 체스로 격돌한다는 말에 스테일메이트 대국실이 참관 문의로 폭발해 버렸다.
체육관 대관 얘기까지 나왔지만, 두 사람이 거부해 대국 관전자의 수는 사전 예약을 받아 제한하는 대신 대국 장면은 학교 커뮤니티를 통해 생중계하기로 결정되었다.
나도 사실 두 사람의 대국을 직접 보고 싶은 건 굴뚝같지만, 그간 바빠서 박승현과의 대국을 계속 미뤘기 때문에 나중에 기보만 확인하기로 했다.
“그럼 0반은 1, 2반이랑 청소년 수련회 같이 가는 거야? 어디로 가?”
“석모도.”
“우리 반이랑 날짜는 같아도 장소는 다르네. 플레이어 수용시설 단체 예약이 빡세긴 하구나.”
1학년 7반인 박승현과는 청소년 수련회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 수련회 말고도 저녁 메뉴, 방금 뒀던 대국, 성적 정정으로 변경될 기말고사 예상 석차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기숙사 방에 도착하자마자 한 건 천동하와 염준열의 대국 결과 확인이었다.
나와 박승현의 대국과 거의 동시에 시작한 둘의 대국 시간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우리가 저녁 먹고 있을 때도 계속 대국한 건가. 결과는…… 천동하가 이겼구나.’
승부가 쉽게 나지 않아 흑백 기물이 각각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치열하게 두던 그들.
아슬아슬한 차이로 천동하가 체크메이트를 부르는 데에 성공했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대국이었어.’
둘이 둔 기보를 보며 감탄하던 중.
딩동.
디바이스 메신저의 알람이 울렸다.
메시지 발신자는 황지호였다.
[황지호] 기숙사지? 잠깐 내 저택에 들려라.
이 시각에?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좀 넘어 있었다.
많이 늦은 건 아니었지만, 나가기 미묘한 시각이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연락하라고 답변하려 했을 때.
[황지호] 신수의 영약이 도착했는데.
[나] 갈게.
나는 두말없이 바로 나갈 채비를 하였다.
* * *
황명호 대저택의 문을 연 순간, 이능파가 쏟아졌다.
“하압!”
“얍!”
나를 해할 기세가 없어 보이는 이능파는 내 주변을 감돌다 흩어졌다.
은빛의 이능파 잔해를 보던 은호의 후예 삼 남매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패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대체 이 셋이 뭘 준비했던 건지 모르겠다.
“기습으로 의신이 오빠한테 가호를 내리려 했어요.”
“될 것 같았는데.”
“토연 누나가 의신이 형이 황호 님 가호를 거절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냥 부탁하면 의신이 형이 가호를 거절할 것 같아서…….”
마음은 기쁘지만 애초에 후예는 가호를 못 내리지 않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호를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고.
상위 존재와 진족이 내릴 수 있는 가호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가호는 대상에게 이능이나 힘이 아닌 자신의 ‘존재감’을 심고 새겨서 각인하는 거니까. 아무리 이능이 강해도 신과 진족으로 취급받을 만한 ‘존재감’이 없으면 불가능할 텐데.’
한 걸음 물러서서 셋을 보던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가호는 그렇게 내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후예인 너희들은 가호를 못 줘.”
“처음으로 가호를 내리는 데에 성공한 후예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황호 님이 반대하실까 봐 몰래 살짝 하려고 했는데.”
이 후예들은 몰래와 살짝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보다.
그런데 이 착하고 얌전했던 후예들이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니 금방 짐작이 갔다.
“그 몰래 살짝 가호를 내리자는 아이디어는 산령이 낸 거야?”
“어, 의신이 형 어떻게 아셨어요?”
휘리릭!
거실 위에 떠서 현관을 지켜보던 산령이 자기주장을 하듯 신나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백호군과 황지호의 시선을 받고 안광 스킬에 걸린 것처럼 우뚝 굳었다.
“아직 단련이 부족했나 보군.”
“백호, 다음엔 더 철저하게 해라.”
그 말을 들은 산령이 오들오들 떨었지만, 내 신경은 다른 곳으로 쏠렸다.
보이지 않는 올무.
현관에 올무의 기척이 전혀 없었다.
“올무는?”
내 질문에 은호의 후예 셋은 딴청을 피웠고 황지호는 처웃을 준비를 했다.
내가 되묻기 전에 백호군이 답했다.
“네가 선물한 집에 숨어 있다.”
“왜?”
“네가 가면 나올지도 모르겠군.”
뭔지 모르겠지만 올무를 마중 가기로 했다.
넓은 거실 한구석에 있는 여러 개의 은신처 중 흰 솜뭉치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올무야?”
왕!
내가 부르자 올무가 허둥지둥 나와 내 품에 안겼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끄응…….
올무는 힘없이 끙끙거리기만 했다.
응접실로 이동할 때 황지호를 보자 올무가 눈에 띄게 굳는 게 느껴졌다.
“너 올무 괴롭혔냐?”
“하하하!”
평소라면 지능이 어쩌네 했을 황지호가 신나게 처웃었다.
‘불길한데.’
응접실에 가니 테이블 위에 트렁크가 하나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트렁크 안에는 듣도 보도 못한 기묘한 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파우치가 가득했다.
“자, 조의신. 네가 나한테 몇 차례나 부탁한 신수용 영약이다!”
이렇게나 잔뜩 만들어 주다니!
황지호가 조금은 다시 보였다.
“올무 몸에 좋은 거겠지?”
“그래, 물론이지. 신수를 언급하니 녹족의 수장이 직접 나서서 조제해 주더군. 신수의 신체와 이능은 인간과도 진족과도 다르니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지.”
“돈은 얼마나 들었어? 내가 낼게.”
“필요 없다. 호족의 은인이 호족의 신수를 위해 만들어 달라 청한 영약이다. 수장인 내가 내는 게 당연해.”
황지호가 아주 다시 보였다.
계속 슬금슬금 처웃을 준비를 하는 게 느껴져 불길하긴 했지만.
그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왕? 왕왕!
올무가 배신감, 충격 등의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걱정이 되었다.
“응? 올무야, 왜 그래?”
훽.
올무는 내 품을 벗어나 폴짝 뛰어내렸다.
내가 내려 줄 때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얼떨떨해하는 나를 두고 올무는 가 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올무를 두고 망연자실해 있었을 때.
“하하하하하!”
황지호가 처웃기 시작했다.
처웃는 소리를 배경으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수는 감각이 매우 민감하다. 후각도, 미각도.”
백호군의 말을 들으니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올무의 몸만 생각하다 올무가 겪어야 할 죽음의 맛은 고려하지 못했다……!
직접 경험해 본 내가 왜 배려를 해 주지 못한 것인가.
내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과 더불어 한마디도 충고해 주지 않은 황지호에게 억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황지호를 다시 본 게 억울해졌다.
저 노친네는 역시 망할 놈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군요.”
황지호가 숨이 넘어갈 기세로 계속 처웃고 멘탈이 붕괴된 내가 굳어 있던 와중, 적호가 등장했다.
“하하하하! 마침 잘 왔다! 조의신이 신수를 상대로…… 무슨 일이 있었나, 적호.”
황지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변했다.
“또 다치기라도 한 거냐? 그때보다 훨씬 얼굴이 안 좋군.”
그 말을 들은 나도 적호를 유심히 봤다.
황지호의 말대로 갈래에 몸이 꿰뚫렸을 때보다 적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타겟을 확인했습니다.”
“은광고 1학년 학생들 말이냐?”
“그 외에도 더 있었습니다.”
흑막이 노리는 건 제물 외에도 더 있단 말인가.
보고하는 적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작년에 죽이지 못한 지익회 고문, 1학년 1반 담임 김신록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