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청소년 수련회 (1)
어둠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준비는?”
“응, 됐어요! 마족들이 ‘눈’으로 김신록의 승선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 용은?”
“샅샅이 확인해 봤는데 아직 은광고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요! 나온 흔적이 없어요.”
“‘눈’으로 확인한 마족들도 같은 의견이었어요.”
“용은 안 죽일 건가요?”
밝은 어조로 말하는 두 쌍둥이 소년.
그들을 화면 너머로 보는 누군가가 권태롭게 답했다.
“공간의 용도 언젠가 죽여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어? 용제건의 이름도 일단은 살생부에 올라와 있나요?”
“그래. 진명이 아닌 가짜 이름이지만, 이름은 올라와 있지.”
“당신이 직접 나서시면 금방 죽일 수 있지 않을까요? 때가 아니더라도 미리 죽이면 좋잖아요!”
“나는 할 일이 있어. 내가 직접 찾고, 없애고,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어두운 화면 너머에서 긴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기는 게 보였다.
쌍둥이들은 넘쳐흐르는 흥미를 누르지 못하고 발돋움해 화면을 노려봤다.
“이상하군.”
“뭐가요?”
“이상한 일이요?”
“내가 눈여겨본 플레이어는 전부 살생부에 이름이 떴어. 나의 감과, 살생부에 떠오르는 명단이 어긋난 일은 없었다.”
“그 은광고가 자랑하는 신예, 두 명의 천재들은 이름이 있었죠?”
“그래.”
긴 손가락이 몇 번이나 종이를 훑었다.
피로하게까지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여전히 무명의 초신성의 이름은 없군.”
* * *
청소년 수련회 출발 전날, 홍규빈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홍규빈] 토족 측에서 연락이 왔다.
[홍규빈] 전조 현상 없는 이계 발생이 예측되었다고 하는구나.
옥토윤의 지휘로 토족과 협회 간의 연계는 잘 되고 있었나 보다.
‘월궁계도로 특정하는 ‘이계 부르기’는 이 정도 기간을 두고 예측이 가능하구나.’
옥토연이 24시간 내내 월궁계도를 들여다볼 리가 없으니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는 건 어렵겠지만.
[홍규빈] 장소가 마침 의신이 네가 청소년 수련회를 가는 곳인데…… 하하하하.
[홍규빈] 위성관리팀 쪽엔 연락해 뒀어. 뭘 하면 될까?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야근을 하게 되겠지만…… ^^!
이제 홍규빈이 자진해서 야근을 준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협회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을 간략히 전달했다.
[홍규빈] ……그게 다야? 협회의 인력 지원은 필요 없어?
[나] 월궁계도로 전조 없는 이계 발생을 읽을 수 있는 게 드러나면 다음 표적은 협회나 토족이 될 거예요.
[홍규빈] 그건 알지만…….
홍규빈이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석모도는 인구 2천 명 정도의 섬.
이계가 나타난 적도 거의 없어 정부도, 협회도 그쪽에는 인력을 배치하지 않은 상태다.
‘학생이나 일반인이 다칠 가능성이 생기느니 협회가 노려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홍규빈을 완전히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홍규빈의 상사와 호족 측에서 압력을 넣었는지, 나중에는 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조심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위성으로 직접 이계를 포착하거나 구원 요청이 오기 전까지는 협회에서는 무력 개입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받은 게 어제.
지금 나는 배의 갑판 위에 서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은광고의 크루저……! 갑판이 굉장히 넓네요!”
“저번에 탔던 여객선하고 비교하면 군함 같은데. 왜 이걸 타고 수련회를 가는 건데.”
“당연히 여객선에 비하면 군함에 가깝지. 이 배는 어둠의 시대 때는 상당히 희귀했던 이계 금속으로 도배를 했잖아. 그 덕에 그 시대에 협회와 플레이어군에 징집되어서 에너미 소탕 군사 작전을 수행한 적도 있어. 그래서 이 배는 ‘크루즈’가 아닌 ‘순양함’, ‘크루저’라는 별칭으로 불러. 지금은 그냥 은광고 학생 전용 실기 전함으로 쓰고. 1학년 학생은 아직 실기 수업에서 쓸 일이 없으니까 수련회에서 이동용으로 쓰게 해 주는 걸걸.”
송대석이 거의 숨도 안 쉬고 설명을 줄줄 늘어놨다.
비행 스킬로 허공에서 배를 구경하고 돌아온 사월세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그랬나요? 대석이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죠?”
“은광고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새끼 아는 거 나왔다고 잘난 척하네.”
“대석이는 위성 말고도 아는 게 많네요!”
3박 4일 청소년 수련회.
그 화려한 출발은 속칭 크루저라고 부르는 배, ‘천자(天子)’라는 이름의 거대 함선에 승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날씨도 쾌청하고 물결도 잔잔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배 이름이 천자(天子)라니…….’
배의 명명에는 여러 속설과 미신이 함께 한다.
배의 이름은 꽃, 보석, 천체 용어, 산이나 강 등 다양한 곳에서 따왔지만, 모든 시대와 선주사를 통틀어 금기시되는 이름이 존재했다.
바로 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하늘, 땅, 바다를 그 이름에 포함하는 것.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신족 ‘티탄(Titan)’에서 이름을 빌린 배와 ‘시 엠프레스(Sea Empress)’와 ‘시 프린스(Sea Prince)’가 좌초되자 이 암묵의 룰은 더 굳게 지켜졌다.
키모폴레이아도 엄밀히 말하면 신족의 이름을 빌린 거지만, 포세이돈의 딸인 그녀는 파도와 물결의 요정으로 하늘, 땅, 바다 정도에 해당하는 신격에는 미치지 못했다.
‘‘천자(天子)’는 하늘의 아들. 말 그대로 황제나 신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사람들도 이 배가 신의 분노를 사서 침몰할까 봐 크루저니 순양함이니 하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는 걸 거다.
‘누가 대체 이런 광오한 짓을 했지.’
얼마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갑판에 설치된 선베드에 누워 파라솔 아래에서 시계꽃 열매 아이스티를 들이키는 호랑이.
황지호 외에 떠오르는 범인 후보가 없었다.
“야.”
“왜 부르지? 아, 다른 음료를 주문해 줄까?”
“아니, 됐어. 그거 말고 물어볼 게 있는데 천자(天子)라는 이름은 네가 지은 거야?”
“어.”
예상대로의 답이 나왔다.
저놈은 왜 그딴 짓을 한 걸까.
“왜?”
“따분해서? 기억이 잘 안 나는군. 그 지루했던 시절의 일들은 가물가물해서.”
이 배는 어둠의 시절쯤에 건조되어 황명 그룹이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도 그때 붙였을 텐데 그 폭풍 같던 어둠의 시절이 따분하고 지루했다니.
“뭐, 따분하고 지루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유는 대충 기억하고 있어. 청호를 낚기 위해서다.”
“청호?”
“그래. 이 배의 이름은 온갖 매체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갈 예정이었으니까 한 번 정도는 볼 거라고 생각했어. 한반도에서 말하는 천자는 천신의 아들, 즉, 신인을 칭하지. 이런 고철 덩어리를 신인으로 칭하는 걸 보면 청호나 신인이 달려와 주리라 여겼어.”
파라솔 그늘 아래에 있는 얼굴이 가라앉아 있었다.
“신인은 당장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천벌을 내리겠다고 웃으며 권할 거고, 청호는 말없이 이 배랑 내 머리를 박살 내려 했겠지. 하하하하!”
황지호가 처웃었다.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신인과 청호와 매우 가까웠었나 보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니…….’
청호와 신인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걸까.
못 본 걸까, 봤지만 올 수 없는 상황인 걸까.
“아, 함근형 선생님이 갑판에 나오셨어요!”
“사진 찍자고 하자. 선생님이 사진 보내 달라고 하셨어.”
“선생님? 효돈이네 그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요?”
“……어.”
“나도 그린이한테 보낼 사진 찍어야지.”
갑판을 돌아다니던 반 아이들이 선실 입구 가까이 위치한 선베드 쪽으로 왔다.
단체 사진을 찍자는 권유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유리랑 레나는요?”
“김유리가 멀미가 심한 것 같구나. 두 사람은 도착할 때까지 선실에 있겠다고 했다.”
“아…… 그렇군요.”
바다가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는 건가.
김유리가 바다를 직접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니 그럴 법도 했다.
권레나는 김유리를 걱정해서 선실에 같이 남아 있는 거겠고.
결과적으로 남학생들끼리만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
“그 용은 왜 안 왔냐?”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다른 반 부담임 선생님은 전부 승선하신 것 같던데. 혹시 선실에 계신 걸까요?”
“용제건 선생님은 승선하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을 들은 사월세음이 의아해했다.
“그 진족 선생은 변덕이 심한 편이라고 하던데 마음이 바뀌었나.”
“네? 그건 그렇지만 이번 수련회는 엄청 기대하고 계시던데…… 전에 뵈었을 때는 크루저의 안내도를 보고 계셨고, 배의 이동 속도에 맞춰 비행 스킬을 컨트롤 하는 법을 알려 주겠다고 하셨는걸요.”
용제건은 그렇게까지 이 짧은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나!
유희계 용답게 전력으로 즐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용제건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사진 많이 찍자.”
“네!”
적어도 사진을 찍어 대리 만족으로 시켜 줘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대화 화제는 수련회로 바뀌었다.
“선생님, 저희 장기 자랑 준비해야 하죠? 다른 선배들은 뭐 하셨어요?”
“준비한 춤이나 노래, 공연이 있으면 첫날 입소할 때 신고를 하면 된다. 강제가 아니야.”
“원래 이런 거 반별로 억지로 하나씩 시켜야 하지 않나요?”
“……작년까지는 그랬지만, 안전 문제로 그렇게 됐다.”
안전 문제?
고등학생 청소년 수련회 장기 자랑에서 안전 문제가 나올 게 있나?
아이들이 다 이상하게 여기자 함근형이 비화를 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3학년 0반이 1학년이었을 때, 재작년.
춤도, 노래도, 콩트도 하기 싫었던 당시 1학년이었던 3학년 0반.
그들은 장기 자랑을 하는 걸 거부했지만 군기를 잡는답시고 기합을 1시간 넘게 주자 억지로 장기 자랑을 했다.
“그 녀석들이 장기 자랑으로 한 건 차력 쇼였다.”
“차력 쇼요?”
“그래. 이능도 없이 수련회장 무대를 손가락으로 부숴 버렸어.”
나란히 서서 딱밤으로 무대 장비를 전부 부순 우기환 일당은 쿨하게 수리비를 물어 주고 무대를 내려갔다고 한다.
무대가 완파된 바람에 장기 자랑은 중지되었고, 그들의 완력에 겁을 먹은 수련회 지도사들은 더는 기합 줄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 현재 2학년 0반이 1학년 0반이었던 시절.
한국 최고의 명문고 학생을 굴리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한 수련회 지도사들은 여전히 억지로 장기 자랑을 시켰다.
‘장기 자랑 구경이 재밌긴 하지만 0반 놈들에게 꼭 그걸 시켜야 했나…….’
제갈재걸이 급한 일로 함께 오지 못해 몹시 기분이 더러웠다던 2학년 0반 놈들.
그들은 처음에는 안 하겠다고 강하게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기합을 몇 차례 받자 이들은 적당히 타협하기로 한 건지 장기 자랑을 하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강사님들이 장기 자랑 준비 도와주시면 할게요.
—아, 절대로 아픈 일은 아니에요. 차력 쇼도 안 해요. 저희를 그 무식한 선배 0반 놈들이랑 비교하지 마세욧!
—우리 반은 담임쌤도 안 오셨으니까 도와주셔야 해요!
그 말을 순진하게 믿고 명문고 플레이어를 굴릴 생각에 신나 있던 수련회 지도사들.
그들은 2학년 0반 놈들 손에 이끌려 장기 자랑 무대 위 의자에 앉게 되었다.
—우리 반이 준비한 건 최면술 쇼입니다!
—친절하신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에서 사 온 마늘 10박스를 가져왔다.
—이능이 아닌, 민간요법을 응용한 최면술로 신경의 완화를 통한 미각의 개변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그럴싸한 개소리를 늘어놓은 금찬솔과 왕찬솔은 실에 매단 동전을 움직이며 말했다.
—자, 이제 이 마늘에서 가나슈 마카롱 맛이 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늘 맛이었다.
보조진행요원으로 올라온 연가람이 상냥하고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최면술은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있고, 최면술이 잘 안 받는 체질도 있으니까요. 한 번 더 해 보죠. 도와주실 거죠?
금찬왕찬 콤비의 입발린 소리와 연가람의 연기에 넘어간 지도사들은 금찬왕찬이 지정하는 맛이 난다고 거짓 자백을 할 때까지 마늘을 반접은 먹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기 자랑은 자발적인 참여만 받기로 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쉽다. 차력 쇼, 최면술 쇼 다 재미있게 들려요!”
“이 학교 0반 놈들이 미쳐있다는 건 잘 알겠다.”
“이 새끼야, 너도 0반이야.”
훈훈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목적지인 석모도에 도착했다.
천자(天子)가 정박할 만한 항구가 없어 보트로 이동할 때, 드디어 김유리가 바다와 제대로 마주했다.
권레나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그녀의 반대쪽 팔을 지지하며 가까이 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고 한 거, 잊지 마.”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