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던져진 동전 (2)
은광고 거주 구역 1학년 기숙사 건물 17층, 공용 휴게실.
아이들과 헤어진 후에도 맹효돈은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못 했어.’
1학년 0반 학생 중 청소년 수련회에 참가한 건 총 일곱 명.
조의신은 긴급 상황 속에서도 지시를 내리고, 사월세음과 주민들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송대석은 부상을 입은 후에도 다른 반 아이들을 지켰고, 황지호가 뒤이어 그들을 구출해 냈다.
김유리의 광림은 에너미의 상당수를 제거했고, 권레나는 권제인과 함께 바다의 광기를 잠재웠다.
맹효돈은 한 게 없었다.
굳이 한 일을 꼽자면 조의신의 말을 전한 것 정도였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터진다면 난 뭘 할 수 있지?’
맹효돈은 가슴이 갑갑해졌다.
맹효돈에게는 싸우고 잘 먹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재주가 없었다.
그나마 그 싸움이라는 것도 오로지 근접 전투뿐이라, 어젯밤 같은 상황이 닥치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밀려오는 해일과 대량의 에너미, 쓰러진 김유리를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괴로운 마음으로 그날 일을 곱씹던 중, 문득 자신과 비슷한 이능의 소유자의 활약상이 떠올랐다.
‘……그래, 사이비 도인 할배!’
근접 기술밖에 없는 탁거산은 말 그대로 바다를 갈랐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에너미를 섬멸했다.
‘나한테는 근접 전투 기술밖에 없어. 그래도 그 정도의 경지가 되면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맹효돈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여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질녘.
맹효돈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부양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살아남는다.
두 목표가 사라지고 은광고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던 맹효돈.
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강해져서 나도 같이 싸운다!’
맹효돈은 습한 공기를 헤치고 1학년 구역의 전용 건물, 명예 교사 전용 교무실을 향해 뛰었다.
현재 방학 중인 데다 이번 일의 수습과 협회와의 조율을 맡은 탁거산이 언제 학교로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전에 탁거산이 맹효돈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기다릴 작정이었다.
* * *
황명호 대저택의 현관.
올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여길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올무야! 나 기다리고 있던 거야?”
왕왕!
올무가 밝은 목소리로 짖고 내 발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저번에 내 낮은 지능으로 인해 올무에게 고통을 줬는데 이렇게 환영해 주다니!
얼떨떨하긴 하지만 착하고 관대하고 귀여운 올무의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기쁨이 솟아올랐다.
“네! 신수가 의신이 형 기다리고 있었어요.”
“점심 같이 먹고 싶었는데 늦으셔서 먼저 먹었어요. 저녁은 저희랑 먹어요.”
“형, 저녁 먹으면 저희랑 놀아 주세요!”
올무에 이어 은호의 후예들까지 살갑게 대해 주니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왕! 왕왕!
“응? 왜? 이쪽에 뭐가 있어?”
올무가 갑자기 따라오라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올무가 안내한 곳은 올무의 방.
후예들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어설픈 솜씨의 알록달록한 부직포 이름표가 문에 걸려 있었다.
내가 사 준 선물이 점점 많아지자 아예 방을 만들어 준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올무의 초대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자 방 중앙에 놓인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 정체는 내용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텅텅 빈 파우치들이었다.
‘저거 녹족의 영약 파우치 아닌가?’
사슴뿔 모양 마크가 붙어 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나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 굳어 섰다.
“올무야, 이거 다 버린 거야……?”
올무가 얼마나 먹기 싫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착한 올무에게 그런 번거로운 짓까지 시켰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왕? ……왕? 왕왕!
“하, 하하하하!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하하!”
계속 기분이 저조해 보이던 황지호가 처웃기 시작했다.
올무는 뭔가 발짓을 하며 내게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만, 저하된 사고력과 충격으로 그냥 저 노친네는 그만 처웃었으면 좋겠고 올무는 귀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버린 게 아니라 먹었다.”
황지호가 처웃는 소리를 배경으로 온기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막 밖에서 돌아온 백호군이었다.
왕!
올무가 저 말이 맞다는 듯 짧고 굵게 짖었다.
올무가 내가 사 온 영약을 전부 먹었다고?
“네가 사 온 게 아니라면 먹지 않았겠지.”
백호군의 추가타가 들어오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올무야! 미안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먹느라 고생 많았어!”
왕왕!
내 품으로 달려온 올무를 안아 들었다.
올무를 안아 들고 응접실로 향하니 선객이 있었다.
한 명은 용제건, 남은 한 명은 모르는 붉은 머리의 남성이었다.
“안녕, 황호 이사장 씨. 동석을 허락해 줘서 기뻐. 기쁜 김에 업무 핑계를 대면서 도망가려던 거 끌고 왔어.”
“…….”
용제건에게 끌려 왔다는 누군가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적호와 비탄의 웅녀를 절묘하게 섞은 얼굴인데…….’
특히 눈.
머리카락으로 가리지 않은 외꺼풀의 오른쪽 눈은 적호를, 가리고 있는 쌍꺼풀의 왼쪽 눈은 비탄의 웅녀를 연상시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답이 나왔다.
“김신록 선생님?”
“아, 이 얼굴은 처음 보는 거야? 이쪽이 진짜 얼굴이야. 훨씬 낫지? 신분을 계속 바꾸다 보니 얼굴도 바꾸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나처럼 드러내고 살면…….”
“그만해.”
김신록이 용제건의 옆구리를 찌르려 했지만, 용제건이 아주 가볍게 피해 버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훌륭한 몸놀림이었다.
‘저 얼굴이면 가리는 게 편하겠지.’
누가 봐도 적호와 웅녀의 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김신록, 너도 이야기를 듣고 가라.”
“……네.”
황지호의 말에 김신록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의 얼굴은 이어서 들어온 적호를 보니 더 굳었다.
“그럼 이번 일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다들 자리에 앉지.”
전원 자리를 잡아 앉는 사이 오토매틱 메이드가 차와 다과를 가져 왔다.
차는 우기인 7월에 수확한 섬머 플러시 아이스 다르질링 티.
다과는 제철인 자두를 말려 꿀과 곡물 가루를 더해 만든 자두 곡물 다식.
각각 손잡이에 황금 장식이 세공된 유리 식기와 다기에 담겨 나왔다.
“내가 경험하고 보고 받은 사항을 설명하겠다. 정보의 누락이 있다면 보충하도록.”
황지호는 이번 일의 개요와 진행 과정을 설명하였다.
적호가 수집한 정보와 내가 말한 ‘알고 있던 것’.
옥토연이 월궁계도로 관측한 ‘이계 부르기’.
흑막의 눈을 가리기 위해 했던 플레이어 협회와의 교섭.
일부 수련회 지도사의 일탈.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계 공략.
주민의 대피.
섬을 노린 에너미들과 김유리의 폭주.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황지호가 잠시 설명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김유리는 이번 폭주로 접족과의 가호를 끊어 낸 게 확실해?”
“어. 접족은 가호를 통해 상위 존재의 압력을 지워 주고 있었어. 여차할 때는 가호를 풀어서 광림을 폭주시킬 생각이었던 거야.”
“이번 일로 그 나비와 인연을 끊어서 다행이군.”
가호를 맺을 때는 상호 동의가 필요하지만 풀 때는 그렇지 않다.
내린 쪽에서 임의로 거둘 수 있는 게 가호였다.
웅족을 상대로 천신이 가호를 내렸다가 거두어 간 게 대표적인 예였다.
“그럼 계속 이야기해 볼까.”
황지호가 한 지도사의 제압과 폭탄의 제거, 이능독에 당한 이들의 구조.
김신록을 노린 웅족들과 적호, 용제건의 대치.
마지막으로는 흉내꾼과 진웅팔선 중 하나인 번민의 곰이 언급되었다.
‘변수의 존재가 거슬려.’
김신록과 사월세음을 노리고 웅족이 등장하는 사항처럼 거의 내 행보로 인한 나비효과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게임과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같은 이벤트라도 난이도가 올라간 것 같은데.’
이계 부르기로 부른 이계의 난이도도 높아졌고, 이능독도 강력해졌다.
최편득을 비롯한 지도사들이 공연히 절차와 확인을 들먹이며 대피를 방해하는 묘사가 있긴 했지만, 중앙 대피소를 폭파시키려 하는 것도 없던 일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 강한 수를 두고 있는 걸까.’
설명을 마친 황지호는 다음 화제로 전환했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적호, 흉내꾼은 어떻게 됐지?”
“수석 주술사가 결계에 가두었습니다. 지시한 대로 팔과 다리는 자르지 않고 재생할 때마다 부수는 걸 반복하고 있습니다. 뼈의 마디 하나하나 공들여 부수는 중입니다.”
저 담담한 설명을 듣다가 사레들릴 뻔했다.
저런 보고를 하고 들으며 우아하게 다과를 즐길 수 있다니.
괜히 5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투 종족들이 아닌가 보다.
품 안에 있는 올무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심문은?”
“저나 수석 주술사는 상대도 하지 않더군요. 백호에게는 입을 연 것 같습니다만.”
“백호.”
백호군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밖에 없었다. 좀 더 심문해 보겠다.”
입은 열어도 헛소리만 했나 보다.
“번민의 곰의 수색은?”
“천자에서 대기 중이던 청호의 제자들이 추적 중입니다.”
“적당히 하고 신역으로 귀환하라고 해. 그들이 놓친 ‘제물’을 다시 노리려 들지도 모르니까.”
제물.
제물이 어떤 용도이고,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흑막이 노리는 게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1, 2반 여자아이들이야. 노리는 건 불특정 다수였지만, 특히 안다인을 집요하게 노렸었는데.’
그러나 안다인은 특이 체질로 이능독이 먹히지 않아 흑막의 계획이 무너진다.
이번에도 그걸 이용하고 그 자리에 황지호를 보내는 게 내 계획이었다.
‘게임에서는 그대로 안다인이 2반 여자애들도 모아서 함께 움직이게 되니까 큰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데.’
이번에는 2반 쪽에 안다인 대신 황지호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지호는 예상 외의 일에 발목이 묶여 늦는 바람에 송대석과 2반 아이들은 다치고, 저 흉내꾼은 사월세음을 노리고 나타났다.
변수가 얽혀 피해가 커지고 말았다.
“다음은 조의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화살이 내 쪽으로 왔다.
“너희들, 그날 내가 합류하기 전에 느낀 거 없나.”
“없습니다.”
“없습니다.”
적호와 김신록은 동시에 대답했다.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는 게 참 부자다웠다.
“아, 그 빛 말하는 거야? 꽤 거리가 있었으니 교전 중에 감지하기는 어려웠는데. 꽤 익숙한 힘이었어.”
“그렇군…….”
황지호는 ‘천신의 빛’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의신, 그날 너는 백호의 힘을 써서 흉내꾼을 격퇴했다.”
“흉내꾼은 황호 님이 처리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백호 님의 힘이라니…….”
“내가 나타났을 때는 이미 조의신이 흉내꾼을 제압한 상태였어.”
전원 김신록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황지호가 저렇게 확신을 갖고 말하고 있으니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는 백호의 힘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신화계 호족의 힘을 쓰는 그건 스킬 같은 게 아니겠지. 아주 강력한 광림일 거다. 광림에 등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광림의 희귀도를 평가하면 EX급 정도는 줘야겠지.”
황지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조의신, 네게는 다른 존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광림이 있다. 그렇지?”
입학하기 전부터 관찰을 하던 놈의 눈을 더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내가 긍정을 표하자 황지호의 눈이 아주 불길하게 반짝였다.
“이걸로 광림 외에도 은인의 비밀을 하나 더 알게 되었군.”
광림 말고도?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황지호의 말이 이어졌다.
“먼 옛날, 그래, 내가 담배를 피던 시절 이전의 일이었어. 당시에는 이름이 없던 사월가 시조의 힘을 직접 목도한 적이 있다. 마지막 왕조 시절, 우리의 세계는 이미 이 세계와 거의 분리된 상태였지만 간간이 교차할 때가 있었으니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전의 이야기라니.
한반도에 담배가 처음으로 들어온 건 1618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의 이야기라면 마지막 왕조 초반쯤일 거다.
“주민의 대피를 유도한 건 사월가에서도 시조가 가졌던 ‘왕이 가라사대’라는 힘이겠지. 그리고 그 힘의 발동 조건으로 ‘경애하는 자’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전령의 의지가 필요해.”
황지호가 사월가의 힘을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니.
“그러니 사월가의 후계자가 경애를 표현할 만한 업적을 가졌으면서도, 그와 엮인 자만이 그 힘을 쓸 수 있겠지. 사월세음의 짧은 삶에서 그럴 만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한 명이요?”
“그래. 환몽 경매가 무너진 날, 용족의 후예와 매우 유사한 힘을 사용해 사월세음을 구해 낸 자가 그러하지. 조의신, 네게는 다른 자의 힘을 사용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사월세음이 ‘왕이 가라사대’를 쓰게 만들었어.”
황지호의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짐작이 가서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당장이라도 홍룡을 소환해 저놈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조의신 네가 그 적벽괴도로군.”
저 망할 놈에게서 기어코 ‘그 단어’가 나오고 말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