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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84화 (184/925)

39. 던져진 동전 (3)

‘그 단어’를 연호하는 이들은 황지호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의신이 그 적벽괴도라니……. 정말로 용족이나 그 후예가 아니었군요.”

“적벽괴도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었어.”

“너, 조의신 군이 적벽괴도라는 걸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어. 준열이가 적벽괴도를 쫓고 있었고, 학교에는 단서가 많았으니까. 운이 좋았어.”

“용제건, 너는 적벽괴도에 대해서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여기에 있는 진족과 후예들은 ‘그 단어’가 없으면 말을 못 하나?

진족이고 뭐고 뭐라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오그라드는 손과 일그러지는 얼굴을 펴고 있느라 모든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 순간의 내 표정 관리에 내 두 번째 고교 생활이 걸려 있다.

나는 이미 무표정이었지만 더 격렬하게 무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단어’에 느끼는 감정을 알아채면 졸업할 때까지 이 망할 노친네한테 놀림당할 거다!’

기사 시절에는 체크메이트 직전까지는 포커페이스로 상대 기사를 가지고 논다는 말도 들었는데.

요새는 ‘수상하다’, ‘지능이 낮아 보인다’ 같은 소리가 대놓고 나오는 걸 감안하여 표정근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왕?

“…….”

유일한 마음의 위안은 떨리려는 손을 핥아 주는 올무와 평소대로 말이 없는 백호군뿐이었다.

“조의신? 왜 반응이 없지. 내 말 중에 틀린 게 있나?”

황지호가 다시 화살을 이쪽으로 던졌다.

이놈에게 내가 ‘그 단어’가 역린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니, 왜.”

“이상하군. 적벽괴도 건은 상당히 큰 비밀인데 왜 이렇게 태연해 보이지? 아니, 태연해 보인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참고, 모르는 척하는 것 같군.”

“무슨소리하는지잘모르겠는데.”

“……반응이 묘한데.”

얼굴 근육을 통제하며 평정을 가장했다.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을 집어넣었다.

마침 내 품 안에는 올무가 있었다.

올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목을 긁어 주니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흠, 그새 다시 지능이 낮아졌나.”

“황호, 본론부터 말해라.”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백호군이 한마디 했다.

‘혹시 내가 거북해한다는 걸 알고 화제를 바꿔 준 건가,’

역시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배려심이 남달랐다.

저 망할 노친네와 같은 공간에서 말을 하니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뭐, 굳이 이걸 이 자리에서 밝힌 이유를 설명해 볼까. 조의신, 적벽괴도가 남긴 업적은 훌륭했지만, 위험한 짓이었어. 단독으로 할 만한 짓이 아니야.”

‘그 단어’가 들려왔을 때는 올무를 쓰다듬는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 관리에는 성공했다.

황지호의 말은 계속되었다.

“네 정체는 내가 파악했고, 여기에 있는 이들이 다 알게 되었어. 그러니 앞으로 적벽괴도로서 움직일 때는 숨기지 말고 호족의 힘을 빌리도록.”

황지호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인가 보다.

저 망할 놈이 좋은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거란 걸 잘 이해했다.

그래도 ‘그 단어’를 섞어서 말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나는 화제를 바꿀 겸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날 언제부터 봤어?”

“천신의 빛이 내려온 순간부터.”

그럼 상보심금파와의 대화가 끝난 직후인가.

“그 자리에 가 보니 사월세음을 등에 업은 네가 부상을 입었고, 흉내꾼과 대치 상태였지. 바로 개입하려 할 때, 네가 천신에게 허락을 구하더군.”

……그 장면도 봤나.

백호군의 대사를 하는 장면을 들켰다는 생각에 낯이 뜨거웠지만, ‘그 단어’보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안광 스킬을 쓰는 타이밍이 호족 못지않더군. 백호와의 대련이 도움이 되었나?”

“응.”

백호군과의 대련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사실 스킬을 사용하는 타이밍은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익혔었다.

오토 기능도 없고, 조작 난이도가 지옥급인 플마고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온 썩은 물의 능력이 하루 이틀만에 증발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10년 가까이 조작해 온 백호군의 스킬 사용 타이밍이라면 눈을 감고도 잡을 수 있다.

“그러면 다음 화제로 넘어갈까. 이번 일의 수습에 관해서다.”

황지호는 협회와 협력해 이번 건을 은폐할 준비를 해 왔다.

이계 발생과 에너미의 습격은 숨길 수 없겠지만, 진족의 존재는 감출 예정이었다.

“‘그자’ 쪽에는 호족의 의향으로 호족과 웅족이 격돌했다는 사실을 숨긴 것으로 되겠지.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인원도 최소화했으니까. 용제건, 통신이 차단된 직후 ‘눈’의 존재를 느꼈나?”

“아니. 통신이 차단되기 전까지는 ‘눈’을 느꼈지만, 그 이후는 달라. 통신과 위성 경보를 차단하면 ‘눈’도 사용하지 못하는 리스크가 있는 것 같아.”

“좋은 정보를 얻었군. 꾀돌이에게 알리면 ‘눈’을 차단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황지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사월세음의 힘이 발동한 것도 숨길 예정이다. 주민들의 입을 막는 게 조금 까다롭긴 하겠지만, 사월세음의 힘은 ‘기록에 남아서는 안 될 말’을 전하는 데에 특화된 덕인지 주민들의 기억이 상당히 애매해져 있어서 은폐가 가능할 것 같다. 이미 호족의 정보팀이 대규모의 정보 조작에 착수했고,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웹과 연결된 대부분의 기록 기기는 셧다운 되었지만, 오프라인 모드로 가동한 기록 기기에 남은 자료들을 호족의 정보팀이 찾아내어 제거하는 중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웅족 중에서도 놓친 것은 번민의 곰과 그 수하 둘 뿐이다. 그들이 본 것이라곤 김신록과 용제건, 적호 이 셋뿐이니 문제없겠군. 내 말은 여기까지다. 질문할 게 있나?”

황지호가 모든 설명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김신록이 굳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황호 님, 그들이 부자연스럽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부자연스럽게 여겨?

황지호가 더 말해 보라며 고갯짓을 하자 김신록이 답했다.

“이 용이라면 모를까, 적호 님이 제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사전에 웅족의 습격을 알고 대비했다고 생각하겠죠.”

왜 이 말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황지호의 명령 없이 적호가 김신록을 사적으로 만나기 위해 움직였을 리가 없다. 그러니 웅족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게 김신록이 품은 의문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와 어울려서 얼마 전에 죽을 뻔한 아들을 보러 간 게 이상하다고?”

“네. 황호 님의 명령으로 제 뒤를 따랐다는 게 더 납득이 갑니다.”

김신록의 말이 끝나자 응접실의 온도가 몇 도는 떨어진 것 같았다.

“김신록…….”

황지호가 입을 열려 했지만 적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졌다.

‘적호는 김신록이 자신을 불편하게 여긴다 생각하고 있고, 김신록은 지금 말하는 걸 보니 적호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지나가면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들이 있긴 하다.

작은 앙금도 1년, 10년이 지나면 풀기 어려운데 저 부자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용족은 서로의 ‘역린’에 대해 언급하고 개입하는 걸 꺼리는 경향이 있어. 그러니 용제건은 이 건에 개입하려 들지 않겠지. 백호군은 말주변이 없어. 황지호는…… 저 말 많은 노친네가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모르겠네.’

황지호는 왜 이 부자 사이를 중재하려 들지 않는 걸까.

저놈마저 입을 다문다면 이 부자들을 중재할 만한 이가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부모님과 동생들을 사고로 잃기 전.

큰 대회를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는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출국했었다.

그리고 별로 화제도 안 된 흔하고 평범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었다.

하물며 이계 충돌이 터지고, 호족을 노리는 세력이 있는 이 세계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게임 속에서 저 둘이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고 죽어 가던 적호가 떠오르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저강렵의 갈래에 적호가 당했을 때. 김신록 선생님은 병문안을 오기 위해 이 저택에 몰래 침입하려 했습니다.”

“조의신 군!”

“뭐? 신록이가 그랬어?”

내 오지랖에 김신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평범한 교사 흉내.

웅족을 앞에 두고 보인 음산하고 비인간적인 모습.

그의 여러 면모 중에 저 시뻘게진 얼굴이 김신록의 진짜 얼굴인 것 같다.

“잠입은 실패했고, 황지호한테 걸렸었죠. 그래도 몇 시간 동안 잠든 적호를 지켜보다 돌아갔다고 들었어요.”

“그만, 그만 하세요! 읍…….”

김신록이 나를 제지하듯 반사적으로 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더 빨리 움직인 진족이 있었다.

용제건은 김신록의 입을 막으며 나한테 한쪽 눈을 깜빡였다.

그만하지 말고 더 하라는 뜻인 것 같다.

유희계 용이 친구의 흑역사 공개 장면에 매우 신났나 보다.

적호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신록 선생님이 준비하신 라면을 은호의 후예들이 끓인 적이 있는데, 결과물은 썩 좋지 않았어요. 그래도 적호는 한 젓가락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죠.”

“그, 그건 후예들이 끓인 거니까…… 읍!”

용제건의 팔을 잠시 뿌리친 김신록이 말을 이었지만, 다시 입이 막혔다.

완력에는 이길 수 없는지 김신록이 버둥거리다 황지호와 백호군을 번갈아 봤다.

김신록이 도움을 요청한 것 같지만 두 호족이 응할 리가 없었다.

“적호가 저강렵에게 당해 다친 직후에는 김신록 선생님이 걱정하실까 봐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건 황지호에게 한 말이니까, 제가 무시하고 김신록 선생님께 알렸지만요.”

용제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던 김신록이 저항할 힘을 잃었는지 움직임이 잦아졌다.

“김신록 선생님이 ‘그자’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정보를 잡은 후에는 상보심금파의 갈래로 몸이 꿰뚫린 것보다 더 힘들어하셨어요. 황지호가 선생님의 경호를 권했지만, 불편해하실까 봐 학교 밖으로 나갈 때만 경호하게 된 거예요.”

김신록의 저항이 완전히 멈췄다.

용제건이 손을 풀어 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호는 김신록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으면, 평생 검은 옷만 입으실 분이에요.”

내 말이 끝나자 다시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김신록은 적호를 보며 벌건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적호는 그런 아들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둘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군.”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눈짓했다.

“전달할 사항은 전부 전했으니 이만 밖으로 나갈까. 아, 둘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응접실 밖으로 나오지 말도록.”

*    *    *

응접실 밖으로 나온 진족들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하하하! 오늘 만찬에는 좋은 술을 곁들여야겠군.”

“잘했어, 의신아.”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둘 사이의 앙금이 오늘 나눈 대화로 말끔하게 해소되는 건 어려울 거다.

오늘은 그 출발선을 억지로 끊은 셈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기뻐하는 두 진족을 보니 의문이 생겼다.

“왜 여태까지 저 둘을 내버려 둔 거야?”

먼저 대답한 건 용제건이었다.

“한 번 끼어들려고 한 적이 있는데, 신록이가 나와 연을 끊으려 했어. 역린을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니까 용서해 주더라.”

그런 일도 있었나.

이번 일로 김신록에게 찍히는 건 확정일 것 같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나는 김신록이 고문으로 있는 기숙사 소속 학생인데.

앞으로는 더 주의 깊게 기숙사 생활을 해야겠다.

“너는?”

황지호에게 묻자 그가 머뭇거리다 답했다.

“……적호와 ‘계약’을 했으니까 나는 저 둘 사이에 개입할 수 없다.”

계약?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적호가 쓰러질 때, 황지호에게 ‘계약’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황지호와 적호 사이에는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딩동.

그때, 응접실 밖으로 나오며 알람을 켠 디바이스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민그린이었다.

이력을 보니 신규 메시지 말고도 시간을 두고 띄엄띄엄 도착한 메시지들이 많았다.

다른 아이들로부터 이번 사건을 전해 들었는지, 석모도 사건에 관한 내용도 쓰여 있었다.

문제는 최신 메시지였다.

[민그린] 야.

[민그린] 큰일 난 거 같아.

[민그린] 빨리 대석이랑 이야기해야 할 거 같은데. 연락이 안 돼. 어떡하지? 대석이는 검사 아직 안 끝났어?

‘송대석이 얼마나 다쳤는지는 잘 모르나 보네.’

그뿐만이 아니라 민그린은 송대석과 이야기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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