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던져진 동전 (7)
마법진으로 가득한 벽과 바닥 위에 놓인 병원 침대.
그 위에 환자복 차림의 김유리가 앉아 있었다.
“와 줘서 고마워! 대석이가 안 보이네, 그린이가 있으면 같이 안 왔을 리가 없는데…… 혹시 대석이도 입원한 거야?”
김유리는 우리 반 아이들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어…… 그 새끼도 이 병원에 있다.”
“진짜? 대석이는 괜찮아? 많이 다쳤어?”
“대석이는 멀쩡해요! 좋은 일도 있었고요. 그것보다 유리는 어때요?”
“나도 멀쩡해! 아직 이능압이 좀 세서 어지럽긴 한데 계속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어. 그런데 대석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
“아, 대석이가 플레이어 위성이 관측하는 지표를 분석하는 웹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는데…….”
황지호가 펼친 결계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상황이었지만, 김유리가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어 가니 금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아이들이 안심한 얼굴로 안부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 맞다.”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김유리가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화면에는 어두운 바다가 보였다.
“있잖아…… 권제인 선배님이랑 레나가 연주하는 영상 봤어!”
“네? 영상이요?”
“뭐야, 이걸 누가 찍은 거야.”
“응?”
김유리가 영상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날의 풍경이 화면 속에서 재현되었다.
권제인과 권레나의 합주가 끝나자 숨죽여 연주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멋지네요……!”
“이거 레나지? 멀리서 보이지만 레나 같은데.”
“직접 듣고 싶어…… 둘이 연주하는 장면 그려 보고 싶어…….”
저 혼란 속에서도 두 사람을 온전히 찍어 낼 만한 담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문새론이구나!’
황지호는 이걸 알고 방치한 건가.
황지호를 쳐다보니 내 뜻을 안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답하였다.
“이 영상은 곧 기사화되겠지. 처음 명예 교사로 부임한 권제인이 공연차 방문한 수련회장에서, 그 연주로 기적을 불러 바다의 분노를 가라앉히다니. 거기에 권제인을 응원하며 합주를 이어 간 1학년 학생까지. 멋진 기삿거리다.”
황지호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꼴을 보니 영상이 올라간 걸 알고도 막지 않았나 보다.
말하는 걸 보니 황지호의 노림수가 보였다.
‘이 사건에서는 덮어야 할 사항이 많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겠지…….’
권제인이 이번 사건의 바람잡이를 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문제는 권레나다.
그녀가 대중의 주목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 영상이 퍼지는 걸 막고 싶었다.
문새론이 배려를 한 건지 권레나의 얼굴은 영상에 한 컷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분란의 싹수는 미리 제거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직 저 1학년 학생이 권레나라는 건 드러나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영상을 내리고 권제인의 존재만을 부각해서 잘 감추면…….’
그러나 내 사고는 권레나의 목소리로 중단되었다.
“이거, 누가 올린 거야……?”
말없이 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던 권레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응? 레나는 모르는 일이었어? 어…… 혹시 이거 레나 허락 없이 올라간 거야?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김유리가 홀로그램을 급히 끄고 사과했지만, 그 말은 권레나의 말에 의해 다시 끊겼다.
“어떡해! 이 영상들 원본은 없을까? 중간에 카메라 시점이 바뀌는데 여러 기기로 동시에 찍은 거 같아. 다른 영상도 전부 보고 싶은데! 이거 누가 찍은 거지?”
“……응?”
권레나는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디바이스를 켜 웹에 접속해 방금 김유리가 재생하던 영상을 찾았다.
영상을 다시 재생하는 권레나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쳐 났다.
“나, 사실 그때 그럴 정신이 없어서 영상을 찍을 생각을 못 했었어! 평소 같았으면 바로 디바이스 녹화 기능을 사용했을 텐데…… 아, 권제인 선배님은 광림을 사용하실 때는 주로 즉흥곡을 연주하셔! 그때 연주한 것도 즉흥곡이었는데, 이건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거라서…… 누가 찍어 놔서 다행이다! 여기다 댓글 남기면 원본 영상을 구할 수 있을까?”
“이건 문새론이 찍은 걸 거다. 그녀에게 부탁하는 게 빠르겠지.”
“새론이한테 연락해 봐야겠다!”
황지호의 답변을 들은 권레나가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지금 화제의 영상에 자신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권레나가 신경 쓰고 있는 건 오로지 권제인의 연주뿐이었다.
“……이 영상 조회수 엄청 높은데, 사람들이 많이 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내가 묻고 싶은 걸 민그린이 대신 물어 줬다.
합주 영상을 저장하던 권레나가 쑥스러워하다가 답했다.
“권제인 선배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어. 권제인 선배님 옆에서 이런 연주를 한 게 부끄럽긴 하지만!”
권레나의 출생의 비밀을 생각하면 대중 앞에 드러나는 게 꺼려지긴 했지만, 그녀가 권제인의 유일한 제자인 데다 은광고의 플레이어라면 언젠가 사람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가 조금 당겨져 버린 것 같지만, 지금 영상을 갑자기 막아 버리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캐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잠재우는 이 해일은 뭐야? 뉴스에서 단신으로 떴던 기상 이변 현상이 이거였나…….”
“사실 저도 그게 신경 쓰였어요!”
“어, 그게, 그러니까.”
한이와 사월세음이 운을 띄우자 맹효돈이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맹효돈의 말솜씨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맹효돈이 말을 더듬으니 미심쩍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나서서 수습하려 할 때였다.
“그게 내 광림이야.”
김유리는 권레나가 띄운 홀로그램 속, 배경 저편에 보이는 바다의 벽을 가리켰다.
“내 광림은 여러 상위 존재들과 이어져 있어. 내가 계속 피하던 바람에 중요한 순간에 폭주하고 말았어. 그 여파가 남아서 여기에 있는 거고……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었어, 미안해.”
“유리…….”
김유리가 고개를 떨구고 먼저 이 화제를 꺼낸 한이가 표정을 굳혔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수련회 당시, 나비령이 김유리의 광림을 이용해 섬의 절반을 해일로 삼켜 버렸다.
그 결과, 에너미는 일소했지만, 수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학교와 협회가 김유리가 져야 할 책임을 다 짊어지고 그녀를 보호했지만, 그녀는 양심의 가책 탓에 등교를 거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네 광림은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김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네 광림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에너미를 상대하기 어려웠을 거야.”
“의신이 말이 맞아!”
“그래요, 다친 사람이라곤 다른 자리에 있던 분들뿐인걸요. 부서진 건물도 하나도 없고……!”
김유리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내 힘이 무섭거나 그러지 않아? 또 폭주할지도 모르는데…….”
김유리의 대답에 아이들이 하나하나 대답했다.
“별로. 일부러 유도하지 않는 이상 그때와 같은 출력은 나오지 않을 테니.”
황지호가 객관적인 사실을 늘어놓았다.
“세상에는 그것보다 무서운 것들이 많아.”
“맞아! 유리의 힘은 물이 없으면 발동을 안 하잖아. 힘으로만 따지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3학년 0반 담임 선생님이 더 무서워!”
한이와 권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유리를 무서워해야 해……?”
민그린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말투였다.
“만약 그런 일이 터져도 저는 날아서 도망칠 수 있어요! 또 저…… 의신이가 어떻게든 해 줄 거예요!”
“그런 힘에 안 밀릴 정도로 강해질 거다.”
하마터면 ‘그 단어’를 말할 뻔한 사월세음과 맹효돈도 힘차게 답했다.
애들을 둘러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김유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있잖아…….”
김유리는 다시 입을 몇 번 다물었다가 열기를 반복했다.
“저기, 그러니까…… 내가 이 광림에 익숙해지면, 어디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김유리가 등교 거부자가 될 미래가 사라졌다고.
나는 반 아이들을 대표해 대답했다.
“익숙해지지 않더라도 놀러 가자. 어디부터 갈까?”
“……응!”
그 뒤로 우리는 방학 때 뭐 하면서 놀지 계획을 짰다.
김유리의 퇴원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사전에 놀러 갈 장소를 물색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몇 시간 후.
송대석 옆에 남기로 한 민그린과 김유리의 병실의 결계를 강화하기 위해 남은 황지호를 제외하고 전원 병원 밖으로 나왔다.
한이는 보육원의 일을 도우러, 권레나는 서울로 돌아온 권제인을 만나러 이동했다.
짐을 가지러 황명호 대저택으로 향하려고 할 때, 맹효돈이 나를 붙잡았다.
“야, 부반장.”
“왜?”
맹효돈은 나를 아주 수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너 그날 무슨 일이 터질지 알고 있던 거 아냐?”
그날, 나는 맹효돈을 붙잡고 김유리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맹효돈을 붙잡고 그런 말을 했으니 의심하는 건 당연할 거다.
그래도 나는 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나를 보고 맹효돈이 내 팔을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다음엔 좀 자세히 말해라. 망할 새끼야.”
그렇게만 말한 맹효돈은 등을 돌리고 먼저 학교를 향했다.
머리는 돌이지만 어떤 노친네와 달리 속 깊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대응을 보니 훈훈해졌다.
“저기, 의신아. 할 말이 있는데…….”
맹효돈이 멀리 사라진 걸 확인한 사월세음이 다가왔다.
“사실은 저…… 세민 삼촌이 제가 광림을 쓴 걸 아셔서요.”
사월세민이 알아차렸다고?
그의 이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통찰계 계열인가 보다.
“바로 그 광림의 대상자가 적벽괴도 님이라는 걸 아셔서요. 적벽괴도 님을 꼭 사월 일가의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어 하시는데, 적벽괴도 님만 괜찮으면…….”
“갈게.”
‘그 단어’의 연호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즉시 답했다.
* * *
어둠 속, 이능파를 띈 나비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나비들은 빛나는 편린 조각을 뿌리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모셔 왔습니다.”
나비령의 달콤한 목소리가 울리자, 나비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시들시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다 ‘퍽’하고 전부 터져 버렸다.
그 빛의 잔해를 밟고 나비령과 진족들이 어둠 사이로 걸어왔다.
“거기까지.”
나른한 음성이 울리자, 모든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음성의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장의 오른팔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긴 손가락이 나비령 바로 뒤에 서 있는 웅족을 가리켰다.
지목당한 웅족이 답했다.
“지금이라도 구출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분명 그 범들의 본거지 어딘가에 잡혀 고문당하는 중일 겁니다! 죽였을 리가 없죠.”
긴 손가락은 다음 웅족을 지목했다.
“번민의 곰과 그놈의 수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오른팔을 제외하면 전멸했는데, 말이 안 됩니다. 경위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놈이 괴뢰술로 뭔가 한 게 분명합니다! 번민의 곰을 벌해 주십시오!”
긴 손가락이 가리켜질 때마다 웅족들이 저마다 발언했다.
발언의 내용은 앞서 말한 두 웅족이 말한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모든 웅족을 가리킨 후, 다시 권태감이 묻어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 숫자의 에너미를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네?”
발언이 허락되지 않은 웅족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뒤늦게 결례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긴장한 웅족을 두고 가면의 사내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격에 맞지 않은 숫자의 에너미를, 한 존재의 권속으로 붙여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제물을 데려오기 위해 공을 들였어. 과분한 힘을 줘서라도 성공하게 하고 싶었다.”
웅족들은 사내의 발언의 취지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이는 쉽지 않았다.
고개를 살며시 숙인 나비령만이 사내의 의도를 깨닫고 어둠을 틈타 진한 미소를 띄웠다.
“윗사람의 영광이 아랫사람에게도 이어지듯, 잘못도 마찬가지다.”
우우우웅—!
긴 손가락이 공중 위를 가볍게 긋자 손가락 너머에 있던 웅족들이 무너져 내렸다.
“커헉, 이, 이게 무슨!”
“수, 숨이!”
긴 손가락이 정아(精雅)하게 움직이며 진(陳)을 그려 갔다.
한 획, 한 획이 더해질 때마다 웅족들을 짓누른 이능압은 그들의 숨도, 이능도 앗아 갔다.
“나는 칠석이 되기 전까지 정순한 혼을 가진 제물을 구해 오라 명하였다. 너희들은 나의 명령보다 그 오른팔을 위에 두는구나.”
웅족이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꺽꺽하고 공기를 찾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장기말은 필요 없다. 내가 눈여겨본 제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내 의지의 반석이 되어라.”
진(陳)이 모두 완성되어 그 자리에 있는 웅족을 삼킨 후.
단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비령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절하였다.
“용서하시옵소서.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저들이 적합하지 않다는 걸 미리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개를 들도록.”
나비령은 애달프고 구슬픈 얼굴로 가면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목련의 화신을 이용해 그의 계획을 짓밟은 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정녕 이번 일에 네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면, 만회할 기회를 주마.”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가면의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며 말했다.
“무녀에 관한 일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