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89화 (189/925)

40. 가호의 의미 (1)

은광구에 위치한 은광한빛보육원.

한이는 보육원의 이름이 은광한빛고아원이었던 시절에 이곳에 입소했다.

의식 불명인 상태로 보육원 앞에 쓰러져 있던 한이를 발견한 게 당시 보육원에 재능 기부와 봉사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공청훤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던 한이를 거둔 보육원에서는 그녀의 출신을 찾아 주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보육원 측에서 보건소의 협력을 받아 한이의 발달 상태를 살펴 그녀를 다섯 살 정도로 추정하고 호적을 만들어 정식으로 그녀를 거두었다.

과학, 이능 어느 쪽의 힘을 빌려도 그녀가 듣는다는 행위는 불가능했지만, 한이는 세상과 소통하고 배우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노력의 결과, 그녀는 전국의 천재와 수재들과의 경쟁 끝에 한국 최고 이능 명문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입성하였다.

‘오늘도 없나 보네.’

보육원 정문에 들어와 신발장을 살펴보던 한이는 실망한 표정을 숨기고 평소대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손님용, 외부 방문객용 신발장에는 실내화만 가득했다.

오늘도 자원봉사자나, 봉사자 예비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한이 언니다!”

“누나다……!”

기척을 느낀 한이가 놀이방 쪽을 봤다.

아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왔다.

한이는 아이들의 입 모양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모든 아이들과 인사를 끝냈을 때쯤,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하던 보육 교사와 원장이 나타났다.

“한이 왔니?”

“어유, 한이 얘는 괜찮다니까 또 왔네. 그리고 뭘 이렇게 사 왔어.”

아이들이 한이가 나눠 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보육 교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이는 두 사람이 착용 중인 낡은 고무장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이의 시선을 느낀 원장이 변명하듯 말했다.

“요새는 봉사 활동자가 잘 모이지 않는구나…… 방학 기간엔 봉사 활동 시간을 채우러 오는 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올해는 유난히 그렇네.”

한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요즘 보육원의 이사를 강권하며 이상한 수작을 부리는 이들이 생겼다.

근처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에서 새 동대표를 뽑았는데, 새로 뽑힌 동대표가 보육원의 존재가 집값을 떨어뜨린다며 이사를 가라고 패악을 부렸다.

동대표 본인뿐만 아니라 입주자대표회의 측에서 고용한 용역 단체가 보육원 근처를 얼쩡거리니 보육 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이 겁을 먹어 그만두고 후원금도 뚝뚝 끊겨 갔다.

하지만 보육원은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기부금도 많이 들어 왔는데 자동 청소 기계라도 사는 게 어때요?”

“그걸 어떻게 함부로 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보육 교사의 말에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한이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명재단이 보육원 개원 후 자잘하게 받은 누적 기부금의 두 배가 되는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지나치게 큰 금액에 한빛보육원의 원장은 아연실색했으나 공청훤이 나서서 저 기부금에 문제가 없다고 보증해 주어 겨우 한숨을 돌렸다.

원장은 그 막대한 기부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보육원 아이들의 장학금으로 쓰려 했었다.

“내가 좀 더 고생하면 되는 거지. 무슨 기계가 필요해.”

“그러다가 어디 아프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이가 등 뒤에서 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 너머로 한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보였다.

“선생니이임! 저 왔는데요! 청훤이 오빠는 오늘 왔어요? 왔다고 말해 주세요!”

애교가 철철 넘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한이는 그 입 모양만 읽어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탈색한 머리에 애쉬 핑크, 체리 핑크를 섞은 투톤 그라데이션 염색을 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상큼하게 웃는 소녀.

어렸을 때부터 남녀 가릴 것 없이 드잡이질을 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골목대장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패왕.

두 모습이 겹쳐져 보여 한이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쟤 보육원에 자주 와요?”

“청훤이가 있을 때만. 뭔 오디션을 가는데 듀엣으로 나가고 싶다고 계속 부탁하더구나.”

저게 또 안 보이는 곳에서 공청훤 선생님을 귀찮게 하고 있었구나.

한이는 질색한 얼굴을 더 딱딱하게 굳혔다.

“얼마나 자주 왔어요?”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요즘은 더 뜸하긴 했는데 뭐 연습생인지 뭔지를 한다고…….”

“학교는 안 나오고 뭐 하는 짓이야.”

한이의 말에 보육 교사와 원장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아이가 학교를 안 나왔다고?”

“네. 올해 처음 봤어요.”

“아니, 지금이 7월인데 그럼…….”

원장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반인데 한 번도 못 본 거니?”

*    *    *

병문안 다음 날부터 청소년 수련회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전조 현상 없는 이계 발생.

의문의 기상 이변, 거대한 해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신 장애.

주민들이 보인 침착한 대피.

함근형과 문새론에 의해 밝혀진 청소년 수련회 지도사들의 착복과 비리.

그 중심에 서 있는 지도사들의 도주.

전부 화제가 될만한 사건들이었지만, 가장 주목을 끈 화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화제는 주수혁과 안다인의 활약상이었다.

[이계화 목전에 둔 어둠 속, 어린 천재들의 빛나는 활약]

[은광고 1학년의 두 수석, 이계 공략의 최대 공헌자 자리 차지해]

타이틀 히어로와 타이틀 히로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격대에 가담했으면서도 무사히 이계 공략에 성공했다.

주수혁은 상주산 첫 번째 이계 공략의 최대 공헌자였고, 안다인은 상주산의 두 번째 이계와 기장섬 이계 공략의 최대 공헌자가 되었다.

‘나중에 합류한 안다인이 상대적으로 체력이 더 남아 있다 보니 이렇게 된 거겠지. 수비대 역까지 합치면 둘의 활약 정도는 비슷비슷할 거야.’

주수혁과 안다인, 두 사람의 첫 활약상도 굉장하긴 했지만, 이 둘보다 주목받은 사항은 따로 있었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또 기적을 연주하다]

[조회수 1000만 돌파한 화제의 영상 속 협연자는 누구?]

문새론이 올린 영상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극적인 상황에서 선보인 연주의 힘은 강력했다.

동영상의 조회수는 시시각각 무서운 속도로 오르고 있었고, 권제인이 광림 ‘수면의 요영(謠詠)’을 사용하며 연주한 즉흥곡을 정식 음원으로 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웅족의 습격 여부는 완전히 묻혔어.’

홍규빈이 몇 번 죽는 소리를 내는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협회의 홍보실 언론 1팀의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은 보람이 있었다.

‘그거 대답이나 해 줄까.’

홍규빈은 어디서 안 건지 몰라도 신문부의 해외 취재 일정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물어봤다.

왜 그걸 묻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가 뻔히 보였다.

‘홍규빈은 제갈재걸과 휴가를 가고 싶으니 어쩌니 했었지. 우연을 가장해 같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서 그런 거구나.’

그동안 홍규빈이 일정을 물어볼 때마다 말을 돌리고 이번 사건 수습 상황에 대해서 질문했다.

홍규빈도 ‘제갈재걸의 일정을 알고 싶으면 결과를 내라.’라는 내 의도를 파악한 듯,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어필하며 죽는 소리를 낸 거다.

‘결과가 이렇게 좋으니까 당근을 던져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홍규빈 팀장님, 안녕하세요. 기사 봤어요. 고생하셨습니다.

[홍규빈] 안녕, 의신아. ^^!

[홍규빈] 그냥 내가 할 일을 한 건데 뭘. ^^!

[홍규빈] 요새 방학이니까 시간 괜찮지?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얘기도 하고 밥도 사 주고 그러고 싶은데! ^^!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직접 만나서 묻는 게 압박을 주기 좋으니까 저러는 걸 거다.

홍규빈은 신문부 일정을 캐는 데에 진심이었다.

‘……어차피 곧 야근해야 할 테니까 알려 줄까?’

그간 토족의 월궁계도 기술과 협회의 위성 기술 제휴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바로 위성 덕후 송대석.

그가 고안한 알고리즘에 두 기술을 엮을 실마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기술 제휴의 중계 역할을 맡은 호족도 반색을 표했다.

황지호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송대석은 한반도를 구한 대영웅의 손주인 데다, 가족과 홍경복 화백, 민그린을 제외하면 인간관계도 전무하지. 보안상 문제가 전혀 없다. 아주 완벽해.

하여튼 송대석이 퇴원하는 즉시 협회는 일복이 터질 예정이었다.

그 위성이 관측하고 연산하는 값이 대중에 공개되는 상황에서 비밀리에 송대석이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하니 언론 1팀이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팀장인 홍규빈이 한가롭게 휴가를 가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해외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나는 신문부 부장이 디바이스로 보내 준 ‘신문부 여름 방학 해외 취재 계획표’를 홍규빈에게 보내 줬다.

[홍규빈] 고마워, 의신아! ^^!!

[홍규빈] 그럼 난 휴가 계획 짜러 갈게.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적어서 보내! 정말 고맙다! ^^!!!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지만, ‘네, 나중에 뵐게요.’라는 답장만 남기고 화면을 꺼 버렸다.

삐이이!

마침 에어택시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창문 밖으로는 1월 1일 새벽에 왔었던 궁동 근린공원과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는 사월세음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때는 저도 모르게 비행 스킬을 쓰는지 사월세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사월세음은 떠 있는 상태로 공원 한쪽을 가리켰다.

“많이 덥죠? 안내할게요! 제가 밟은 곳만 따라서 밟고 오셔야 해요, 어?”

자신이 비행 중이란 걸 깨달은 사월세음이 허둥지둥 스킬 사용을 멈추고 땅 위에 내려와 어색하게 웃었다.

사월세음은 공원 샛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거지?’

이전에 홍룡을 타고 사월세음을 바래다줬을 때와 달리 아직 날도 밝았고 통행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로 끝났다.

파아아아…….

사월세음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희미한 이능파가 흘러나왔다.

그 미세한 이능파가 한 올 한 올 쌓일 때마다 공기가 바뀌어 갔다.

‘특수한 결계인가, 이런 타입은 처음 보는데.’

후덥지근한 7월 낮 공기에서 습기와 열기가 점점 사라지며 풍경이 변해 갔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나 꽃잎이 떨어지면서 보이는 경치가 조금씩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시야에 비추어지는 것들이 변해 갔다.

백 걸음을 넘게 걸어간 후에는 주변이 완전히 서늘해지고, 고즈넉한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른 시대에 온 것 같다.’

예로부터 백목(百木)의 왕으로 여겼다는 소나무.

마지막 왕조가 내린 송금(松禁)을 죽 지키고 있던 것인지, 사월 일가의 땅에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펼쳐져 있었다.

소나무 사이사이로는 수십 채의 기와집과 정자, 거대한 연못이 보였다.

“어르신들은 식사 시간에 뵙기로 했어요. 먼저 제 방에 가요!”

사월세음은 밝게 말하고 앞장섰다.

야트막한 흙 담장이 이어지는 토담 길을 따라 걸었을 때.

춘양목 사이로 마주 보고 서 있는 남녀가 보였다.

“앗! 숨어요!”

갑자기 사월세음이 담장 뒤로 몸을 숨겼다.

대체 왜 숨어야 하지?

의문은 들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숨자고 하니 의심하지 않고 따라 숨었다.

곧 두 사람의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혜정 씨, 오늘 일가의 은인이 방문합니다. 은인과 함께 속계(俗界)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은인이라면 믿고 당신을 맡길…….”

“싫어요. 전 세민 씨랑 같이 있을 거예요.”

의도하지 않게 사랑싸움을 목격하고 말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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