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190화 (190/925)

40. 가호의 의미 (2)

방윤섭은 딱히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어영부영 살던 어느 날, 이능을 각성했다.

그날부터 방윤섭의 인생의 목표는 한국 최고 이능 교육 명문고 입학으로 정해졌다.

—친구는 은광고 입학하면 사귀면 돼.

—은광고 들어가서 놀면 되지.

교육에 열성인 방윤섭의 부모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달달 볶았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방윤섭은 한국 고교 입시 1티어 사교육 강사들의 수업을 듣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공부하여 아슬아슬하게 은광고에 합격했다.

문제는 합격한 이후에 일어났다.

인생의 목표를 이룬 방윤섭에게는 ‘그다음’이 없었다.

그저 등신 같은 중학생에서 등신 같은 명문고생이 되었을 뿐이었다.

오죽하면 중학교 졸업식 날, 친구와 사진을 찍으며 좋은 추억을 남기긴커녕 일진 놀이를 하는 중학생들에게 삥을 뜯길 뻔한 방윤섭을 보고 웬 진족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넌 진짜 등신같구나. 그런데 그 점이 매력인 거 같다.

—내 가호 받으면 저 애송이들을 한 대씩 패 줄게.

뱀 같이 웃는 진족을 보고 방윤섭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사족은 약속대로 공격적인 이능을 휘두르며 일진 놀이를 하던 중학교 애송이들을 패 주었다.

사족에게 ‘눈깔이 뱀 새끼 같네!’라고 하며 개기던 놈에게는 특별히 저주도 걸어주었다.

그렇게 구조당한 방윤섭은 사족의 가호를 받게 되었다.

—은광고 학생에게 가호를 내려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가끔 구경이나 해 볼까?

—어…… 네 그릇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큰 가호를 못 준다. 정신 공유가 잘 안 될 것 같은데. 아, 구경하고 싶었는데 망했다.

—음…… 어쩔까. 네가 진짜 수습이 안 되는 등신 짓을 할 때 한 번 정신 차리게 도와준다. 강하게 염원하면 나와 이어질 거야.

그렇게 말하고 진족은 훌쩍 떠났다.

그 이후로 방윤섭은 몇 번인가 사족을 불러 보려 했다.

그러나 염원이 부족한 건지 몰라도 아무리 도와달라고 해도 사족은 응하지 않았다.

행운이라고 생각한 그 사족의 가호는 참으로 뭣 같아서 써먹을 길이 없었다.

“윤섭아, 참외 깎아 놨다! 나와서 먹어!”

방구석에 구겨져 멍때리던 방윤섭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니 하얗게 깎은 참외와 작은 포크가 보였다.

벽면의 홀로그램엔 청소년 수련회 사건이 흐르고 있었다.

“요새 TV에는 저 얘기뿐이네. 옆집 사람들도 은광고 얘기만 하더라! 다들 우리 아들도 이계 공략에 참가했다는 걸 알고 어찌나 놀라는지!”

방윤섭의 모친은 참외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

화면에는 주수혁과 안다인의 활약상에 대해 보도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뭘 했지?’

그건 방윤섭이 가장 잘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형을 망가뜨려 반이 위기에 처할 뻔하고, 주수혁이 공격대로 가 버린 이후에도 혼자 사고를 쳐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한국 최고의 명문고에 입학하면 뭐든 될 줄 알았지만 방윤섭은 여전히 등신이었다.

중학교 생활 내내 방윤섭이 무서워하던 놈들을 흉내 내 보기도 했지만 변함이 없었다.

어설프게 은광고의 천재들에게 개긴 결과 얻게 된 건 손톱이 빠질지도 모르는 저주와 빵셔틀이라는 별명과 수도권의 빵 맛집 리스트뿐이었다.

속이 답답해졌을 때, 어떤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정말 재능이 없구먼.

탁거산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썩은 근성도 근성이라고 잘 가르치면 사람 구실은 하겠네.

그렇게 말하며 웃던 탁거산은 맹효돈에게서 1승을 따내게 해 줬다.

링에서 내려왔을 때 어깨를 도닥여 주던 탁거산이 떠올라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내가 왜, 에이씨…….”

“윤섭아?”

탁거산이 선심 쓰듯 제자로 받아 준다고 했을 때는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 손을 쳐 내며 꺼지라고 했었다.

이제 와서 강해지고 싶다 해도 무슨 낯으로 찾아갈 수 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에 미쳤을 때, 빵셔틀 칭호의 원흉 조의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머리가 식으면 다시 생각해 봐. 나중에 마음 바뀌었을 때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뵈러 가.

방윤섭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갔다 올게.”

“날도 더운데 어딜 가려고 그래! 나가려면 선크림 바르고 나가!”

“아, 알았어, 알았어!”

방윤섭은 모친의 잔소리에 성의 없이 대답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바, 지금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방윤섭은 은광고까지 왔다.

땀을 비척비척 흘리며 1학년 구역에 왔을 때였다.

1학년 구역 운동장에 누가 있는 게 보였다.

“다시! 더 빨리!”

탁거산의 목소리였다.

탁거산의 앞에는 자신보다 땀을 더 뻘뻘 흘리며 수련에 매진하는 맹효돈이 보였다.

탁거산의 지시에 따라 이능파를 운용하고 날렵하게 주먹을 내지르는 맹효돈을 보고 방윤섭이 혀를 찼다.

‘아, 저 땅꼬마 새끼 제자 되기로 했나 보네!’

돌아가야 할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지만, 0반의 수상한 부반장 놈이 한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계기가 뭐든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 할 거 아냐.

탁거산 만한 플레이어는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있다 해도 방윤섭을 제자로 받아 줄 리가 없었다.

이건 방윤섭 인생에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저 할배가 나를 제자로 받아 준다고 했으니 제자가 좀 늘어난다고 두말하지 않겠지!’

방윤섭은 주먹을 꽉 쥐고 천재 사제들 앞으로 한 발 걸어 나갔다.

*    *    *

‘저분 이름이 혜정이라고?’

혜정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은광고 3학년 선도부장인 플레이어블 캐릭터 오혜지의 친언니, 오혜정.

두 자매는 모두 플레이어였지만 활발한 외부 활동을 하는 오혜지와 달리 오혜정은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는 현재 실종되어, 주오 그룹에서 조용히 수색 중인 상태였다.

‘주오의 난’ 수습의 일환으로 주수겸과의 약혼이 결정되자 약혼식장 대기실을 날붙이로 난도질해 ‘지랄 마’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으니까.

그런 배경을 가진 오혜정은 게임 속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혜정’은 흔한 이름이니까 확신하기는 어려워.’

사월세민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성도 아직 모르는 상황이니 속단할 수 없었다.

“혜정 씨…… 그런 말을 하면 보내기 어렵습니다.”

“그럼 안 보내면 되잖아요.”

“이런 갑갑한 곳에 계속 머무르실 생각입니까?”

“그 갑갑한 곳에 세민 씨가 있잖아요.”

목소리를 들을수록 언뜻 기억이 났다.

환몽 경매가 열렸던 여의도의 컨벤션 센터에서 들었던 그 경비원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봐도 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대화 내용만 들으면 ‘혜정 씨’ 쪽이 매달리는 것 같았지만, 절절한 눈을 한 사월세민을 보면 그건 아니었다.

사월세민은 정이 뚝뚝 묻어나는 소리로 오혜정에게 말을 걸었다.

“혜정 씨의 출신을 알아봤습니다.”

“사월 일가의 저택에서 체재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알아보시는 건 당연하죠. 그래서요?”

“주오 그룹의 주요 금융 계열사들의 회장직과 이사진에 혜정 씨 가족 이름이 많더군요.”

“그래서요?”

“혜정 씨는 귀한 집의 따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혜정 씨와 약혼이 예정되어 있던 주수겸 전무에 비하면 저는…….”

주오 그룹에 이어 주수겸의 이름까지 나오니 확실해졌다.

저 사람은 오혜정이 확실했다.

그때는 얼굴 쪽 부상이 심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오혜지와 얼굴도 매우 닮아 있었다.

“거기까지 알아보셨구나. 그래서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겁니다.”

“누가 어울리는데요?”

오혜정이 사월세민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사월세민은 한번 움찔했으나 뒤로 물러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오혜정을 애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일벌레 골초 주수겸한테 절 보낼 생각이세요? 그 지랄맞은 골초가 인간답게 보인 순간은 약혼식을 개박살 내고 튀던 날 도망을 도와줬을 때밖에 없었는걸요.”

“혜정 씨한테 어울릴 만한 분은 그분 외에도 있을…….”

“아니면 콩가루 집안 TC의 망나니 도 씨 놈들? 그 집안에서 결혼 안 한 애새끼 중엔 정상인은 10대 꼬맹이들밖에 없어요. 아, 혹시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황명 그룹의 황 씨 놈들 말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기어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멀쩡한 아들의 호적을 파내고 개판이 된 남궁 그룹에 시집가라는 건 아니겠죠?”

순식간에 대한민국 4대 재벌을 모두 디스한 오혜정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더욱 좁혀지고 오혜정은 사월세민의 어깨에 머리를 조용히 기댔다.

“혜정 씨…….”

사월세민이 한번 움찔거리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오혜정을 밀어야 할지 그대로 품에 안아야 할지 몰라 허공에서 손이 헤매는 게 보였다.

그는 오혜정을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굳이 재벌 가의 자제분들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혜정 씨는 저보다 더 멋진 분을 만나 자유롭게 사셨으면 합니다.”

“세민 씨보다 멋진 분이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데요? 난 세민 씨보다 멋지고 다정하고 정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신랄하던 오혜정이 사월세민에게만은 따뜻했다.

오혜정의 말을 들은 사월세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저 달달한 말을 들은 사월세음도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허공 위로 떠오르는 바람에 토담 벽 밑으로 끌어당겨야 했다.

“사월 가 어르신들께는 허락 다 받아 놨어요. 우리 쪽 허락은 받을 필요 없어요. 물어보진 않았지만 반대하면 제가 다 조져 버릴 거예요. 영감탱이들이 노망은 났어도 계산기는 잘 굴리니까 알아서 닥치겠죠. 제가 뒤질 땐 뒤지더라도 알고 있는 거 다 터뜨리고 뒤질 거란 걸 알 테니까. 그거 다 까발리면 망할 영감탱이들 노후 계획은 망하고 10년은 개고생할 거예요.”

“당신이 죽는다니 그런…….”

사월세민은 살벌한 발언 속에서 오로지 오혜정이 뒤진다는 말만 캐내어 그녀를 걱정했다.

오혜정도 그 사실을 깨달은 건지 수줍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 쪽 하객엔 동생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세민 씨만 고개 끄덕이면 되는데요.”

“무슨 말씀이시죠?”

“결혼 말이에요.”

사월세민이 ‘결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비틀거렸다.

뒤에 춘양목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굴렀을지도 몰랐다.

“겨, 결혼이라니!”

“이 집안은 다 좋은데 유교 사상이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요. 제가 세민 씨 달라고 어르신들 찾아뵈었더니 연애도 없고 바로 결혼 운운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잘 생각해 봤더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전통 혼례복도 몇 개 봐 놨는데 색도 화사하고 꽤 예쁘더라고요. 그래도 세민 씨 턱시도 차림 보고 부케도 던지고 싶으니까 1주년 때 서양식 버전으로 리마인드 웨딩 한 번 더 해요.”

“혜정 씨! 농담이 지나칩니다!”

“제가 농담으로 결혼할 사람으로 보여요? 농담은 답 없는 골초 새끼랑 할 뻔한 약혼식 따위를 말할 때 쓰는 거죠.”

오혜정이 사월세민의 뺨에 손을 올려 자신 쪽으로 조금 당겼다.

사월세민은 별 저항 없이 끌려 왔다.

“고민되고 걱정되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나 믿어 줘요.”

“혜정 씨…….”

오혜정이 사월세민을 당기는 손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지금도 실례를 저지르고 있지만 이 앞을 계속 보면 더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사월세음을 데리고 물러나려고 했지만.

쾅!

“으악!”

넋을 놓고 있던 사월세음이 토담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내가 붙잡아 바닥에 엎어지는 사태는 막았지만, 두 사람이 이쪽을 알아채고 말았다.

“우리 도련님 왔어? 옆에 말한 건 그 친구야?”

“수, 숙모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혜정은 당당하게 말하며 사월세민의 팔짱을 끼며 나란히 섰다.

사월세민은 우리가 이 상황을 지켜봤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 듯 얼굴색이 퍼렇게 질리다 붉게 달아올랐다.

“도, 도련님이라니, 숙모라니……!”

“세음이는 세민 씨의 조카니까 이름을 부르거나 서방을 붙여서 부르는 게 화법에 맞긴 하지만, 세음이는 세민 씨를 형처럼 따르고 있잖아요? 그래서 호칭 정리할 때 도련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계촌법이나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죠?”

사월세민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눈치를 보던 사월세음이 분위기를 바꿀 겸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삼촌! 선물 사 왔어요. 저번에 말씀해 주신 매장에 가서 숙모님 드릴 화장품 세트 골라 왔는…….”

“세음아! 왜 그걸 여기서 말해!”

“세민 씨, 도련님께 저한테 줄 선물 사 오게 한 거예요?”

역효과였다.

분위기는 망했고, 사월세민은 사월세음을 붙잡고 뭐라 뭐라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대충 ‘혜정 씨를 숙모로 부르지 말렴!’이라는 내용이었다.

“네가 그때 염준열 흉내 내던 애 맞지? 말해 둘 게 있었어.”

사월세음과 사월세민이 조금 멀어진 사이, 오혜정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세음이가 받은 가호에 관해서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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