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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01화 (201/925)

41. 국경의 밖 (5)

현재 호텔에서 사용 중인 내 방.

아이템 창을 열어 옷을 갈아입고 까마귀 가면을 썼을 때, 발코니 유리창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2학년 0반이 빌린 플로어의 층수는 32층이다.

밤중에 32층의 창문을 두드리며 방문하는 행위는 지극히 비상식적이었지만, 이번 건은 사전에 협의가 이뤄진 사항이었다.

“열려 있어. 들어와.”

끼익.

발코니와 방 사이의 문이 열리자 황지호가 들어왔다.

아니, 황지호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10대가 아닌 예전, 권제인 내한 공연 때 호연관에서 봤던 30대 버전의 황호의 모습이었으니까.

“실례하지.”

시어서커 소재의 정장 차림의 황지호는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있었다.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황지호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다.

“준비는 끝났나?”

“그래. 바로 가자.”

황지호는 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호텔을 빠져나가기 전에 먼저 변장을 마치고 가자는 내 말에 동의해 줬다.

황지호는 청두시에 도착하자마자 부하에게 명령해 호텔 몇 곳을 빌려 둔 모양인데, 처음엔 그곳에 들러서 변장한 후 이동할 생각이었는 듯했다.

‘이카로스에서처럼 또 어떤 바보가 매달려 있을지 모르니까 사전에 대비하는 게 낫지.’

황지호가 발견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을 거다.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살피니 황지호가 내게 물었다.

“왜 그러지?”

“어젯밤 이카로스에서 창밖에 매달려 있는 그림자를 봤어.”

“우리가 묵었던 이스트 윙의 최상층에서? 언제 봤지?”

“만찬 시간 끝나고 라운지로 이동할 때. 금찬솔 선배나 왕찬솔 선배 같은데, 여기에 와서도 장난질을 할지 모르잖아. 제갈재걸 선생님한테 깜짝 선물을 준다거나 불꽃놀이를 보여 준답시고 밖에서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어.”

2학년 0반이 할 바보짓의 예를 들어 가며 말하자, 황지호가 딱딱하게 답했다.

“그 둘이 그때 밖에 있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게 2학년 0반 놈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데 황지호가 눈치채지 못했었다고?

나는 당연히 황지호가 알아챘지만, 위험이 느껴지지 않으니 방치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각, 그 자리에서 내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존재에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황지호는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은 알고 있겠지.”

내가 그림자를 발견한 건 밤이었다.

그렇다면 그림자의 정체는 쥐인가.

“놈이 따라붙기 전에 가지.”

설마 중국까지 따라왔겠는가.

아니, 황지호가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가능성은 컸다.

파아아……!

황지호가 내 옷 위로 은신의 결계를 그리는 걸 마쳤을 때, 확인차 물어봤다.

“어떻게 이동할 거야?”

“도약 스킬을 사용한다. 내가 옮겨 주랴?”

“됐어.”

그새 장난기를 회복해 웃음기를 띄며 말하는 황지호의 말을 무시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이 세계에 와서 몇 번이나 사용한 캐릭터 카드 한 장이 흘러나왔다.

카드에 새겨진 게 무엇인지 보였는지 황지호가 눈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나도 호족의 도약을 사용할 수 있는 걸 알잖아.”

호족은 공통적으로 가진 스킬이 있었다.

첫 번째가 안광.

두 번째가 포효.

세 번째가 도약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건 제약이 걸린 상태의 백호군 카드였고, 당연히 호족의 도약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하하! 그럼 잘 따라오도록.”

뭐가 좋은지 한 번 처웃은 황지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가로세로로 한 뼘 정도 되는 크기의 결계가 띄엄띄엄 허공에 떠올랐다.

황지호는 그 아슬아슬한 크기의 결계를 밟으며 야경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계의 빛은 희미했고, 도약한 거리는 매우 넓었던 탓에 황지호는 밤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롯드 하나를 들고 스킬을 발동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도약’을 사용합니다.〉

황지호의 뒤를 따라 나도 밤하늘 사이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1600만이 넘는 인구수를 자랑하는 대도시답게 청두의 야경은 화려했다.

도약할 때마다 새롭게 시야에 잡히는 마천루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점점 낮은 곳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여긴 여전하군.”

지면에 착지한 황지호가 거대한 원형의 목조 건물을 보며 혼잣말했다.

붉은 등을 수천 개를 두르고 있는 목조 건물에는 5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입구가 네 개 있었다.

그러나 이 눈에 띄는 건물을 두고도 통행인들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이 건물은 이능이 없으면 볼 수 없다. 딱히 출입을 제한하는 건 아니지만, 호기심에 들어왔다 다치는 일반인을 처리하는 것도 귀찮다는 판단이겠지.”

황지호는 검게 칠해진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야시(夜市)’는 북쪽, 현무의 입구가 연결된 공간에서 열린다. 가지.”

“야시(夜市)? 야시장을 말하는 거야?”

“그래.”

황지호가 검은 문 앞에 서자 문에 현무의 문양이 떠오르다 스르르 열렸다.

밖에서는 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황지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따라 몇 걸음 걷자 비파 뜯는 소리를 배경으로 시를 읊는 음성이 들렸다.

[天子呼來不上船(천자의 부름에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스스로를 술의 신선이라고 일컫노라.).]

청두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 두보의 시였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두보가 지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중, 이백을 그리는 구절이었다.

가인(歌人)이 다음 구절을 읊을 때쯤에는 눈앞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여기저기 내려진 발 뒤로 수십 개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허공에는 색을 입힌 한지로 모양을 낸 등이 떠다녔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 주마.”

“됐어.”

가인의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여기저기에서 가판을 펼쳐 두고 호객 행위 중인 장사치들이 보였다.

이들은 하나 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몸의 일부가 짐승의 모습인 이들이 많았다.

야시(夜市)의 흥을 살리기 위해 변장 중인 이도 있었지만, 개중엔 진족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그래. 여기가 아니면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 만나기로 한 건 중앙의 누각이다.”

황지호는 중앙 호수에 세워진 누각을 가리켰다.

사방이 트인 누각 안에서 가인이 노래하고 악사가 비파를 연주하는 것이 보였다.

대나무로 만든 죽량교(竹梁橋)를 건너 누각에 도착하니, 가인이 노래를 잠시 멈추고 황지호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가인의 손은 지하로 이어지는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속 노래하도록.”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니 가인은 허리를 펴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노래가 멎긴 했으나, 악사는 연주를 쉬지 않은 덕에 그리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시 이어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누각의 지하로 내려가니, 그 안은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현무가 꽤 힘을 썼군. 예전에는 복도에 돌밖에 없었는데.”

황지호가 검은 비단 벽에 수 놓인 현무의 문양을 보며 감탄했다.

벽에 새겨진 자수는 몸통은 거북에 가까웠지만, 목과 꼬리는 뱀의 모양을 한 현무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여기는 현무의 근거지야?”

“정확하게는 사수(四獸)로 추앙받던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넷을 섬기던 이들이 세운 장소다. 주작과 현무는 여기에 자주 머물며 내킬 때마다 야시(夜市)를 열곤 하지.”

이 세계에도 네 방위신(方位神) 개념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주작이나 현무는 등장하지 않아서 진족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주작과 현무는 중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었나 보다.

“다른 둘은?”

“청룡은 후예가 태어난 이후로 줄곧 자리를 비웠고, 백호는 뭐…… 한반도를 뜰 수 없는 상황이니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사수(四獸)끼리 교류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구나.

염제 신농의 플레이어와 관계가 있는 듯한 현무는 어쩌면 백호를 통해 교류를 맺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였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 보는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동시에 앞서 걸어가던 황지호가 멈춰 섰다.

“조의신, 이 힘은…….”

그러고 보니 황지호는 저번 체스 대회 때 운명력을 감지한 듯한 발언을 했는데.

‘하필 둘만 있을 때 발동하다니.’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하는 것보다, 운명력에 대처하는 게 우선이었다.

파앗!

주변을 경계하며 둘러볼 때, 무언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긴 복도 벽면을 장식한 흑비단 위의 무수한 수의 현무 자수 중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자수를 가리키며 황지호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가 느껴져?”

황지호는 눈에 황금빛의 마력을 모아 내 손가락 끝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지호가 감지할 수 있는 건 운명력이 발동되는 순간뿐인가.’

그러면 여기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이능파로 감싼 손끝으로 빛나는 현무 문양을 만졌을 때였다.

쿠구구……!

비단으로 감싸인 돌벽이 움직였다.

눈을 한 번 깜빡하니 황지호가 눈앞을 막고 있었다.

돌벽이 열리기 무섭게 내 앞으로 이동해 결계를 펼친 것 같았다.

황지호의 어깨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문이 열리지 않으면 지나치려고 했거늘. 거짓말처럼 열렸구나.”

유창한 한국어가 들렸다.

황지호의 옆쪽으로 한 걸음 걸어가니 눈을 가린 흑의 차림의 누군가가 보였다.

“현무,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나.”

“먼 길을 왔는데 시험하는 짓을 해서 미안하군. 네가 데려온 손님과 말을 나누어도 될지 고민했으니까.”

“신격이 올라서 그런가?”

“응. 백호와 청룡은 진족으로서 현세에 남기로 했지만, 나와 주작은 달라. 아직 고민 중이지. 고민 중에도 나날이 신격이 올라서 인간과 쉬이 말을 나눌 수가 없어.”

이 세계의 상위 존재는 현세에 간섭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지만, 상위 존재는 여러 방식으로 현세에 개입해 왔다.

그러나 상위 존재의 신격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는 인간도 있으니, 이들이 인간을 대할 때 눈을 가리는 게 불문율이었다.

천칭 위에 선 백곰 가죽을 쓴 상위 존재도, 운명력을 통해 만난 태상노군과 아케아도 모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오기 전에 점을 봤어. 네 손님이 이곳을 발견하면 만나고, 발견하지 못하면 염제의 이능술사만을 대면시킬 생각이었지.”

“번거롭군. 아직도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고 있나?”

“상위 존재로서의 삶도 흥미로워. 하지만 나를 따르는 거북이들도 있고, 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남아 있어서 고민 중이야.”

현무는 온화하게 말한 후, 나를 보았다.

“그 까마귀 가면을 계속 쓰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니?”

고개를 끄덕였다.

환몽 경매 회장에서 까마귀가 새겨진 순은의 동전을 본 순간, 까마귀 가면을 이용해야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래. 이미 까마귀는 너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렴.”

옆에서 나를 보고 있는 황지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모른 척했다.

“네게 소개해 줄 아이가 있단다.”

현무가 긴 옷깃을 휘두르자 허공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비단에 감긴 누군가는 비쩍 마른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데려가렴. 우연히 발견하여 보호했단다.”

이 아이를 데려가라고?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린가.

어떻게 반응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먼저 답했다.

“어째서 이 녀석이 여기에 있지?”

“아는 애야?”

“그래, 너도 아는 애다.”

초면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황지호가 간단하게 소개했다.

“이 녀석은 은광고 1학년 0반 소속, 목우람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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