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국경의 밖 (6)
지혜와 예지의 사방신, 현무가 내민 것은 한 번도 등교한 적이 없는 같은 반 급우였다.
“이 아이는 귀중한 재능을 가졌지. 이 아이의 스승을 아꼈듯이, 이 아이를 아끼는 상위 존재들이 많아. 하지만 그동안 영 상위 존재들의 말을 듣질 않고 방황하는 바람에 몸이 조금 상했어.”
현무는 내 쪽으로 목우람을 내밀었지만, 황지호가 먼저 마력으로 잡아 받아 들었다.
현무가 덮어 둔 검은 비단이 스르륵 사라지자 무명옷을 걸친 마른 몸이 보였다.
황지호가 목우람을 관찰하며 말했다.
“몸이 조금 상한 정도가 아닌데. 입학 당시 신체검사 기록에 남은 것과 체중이 차이가 크게 나. 체내의 이능파도 고갈되어 있고 전투 흔적도 있어. 이게 치료를 마친 건가?”
“응. 염제의 힘을 빌려 치료했어. 쇠약해져 있으니 더 살펴보고 정양해야겠지만.”
“은광고 지급품인 디바이스도 안 보이는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기말고사는 치른 것으로 확인됐는데.”
현무는 고개를 돌려 목우람 쪽을 봤다.
눈을 가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미소 짓는 입꼬리가 온화해 보였다.
“이 아이의 스승에게는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지만, 이 아이에게는 없었어.”
세계에 하나뿐이던 이능 바이올린 장인이 권제인에게 얼마나 극진했는지는 유명했다.
‘목우람의 스승에게는 권제인이 뮤즈였겠지.’
스승과 달리 뮤즈를 얻지 못한 목우람은 이전에 문새론이 발견한 입학시험 면접 후기에서 선언한 대로 뮤즈라는 걸 찾아 헤매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기말고사는 치른 걸 보니, 그전에는 이렇게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을 거야. 기말고사 후에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닐까.’
원격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커닝 방지 주술이 수십 개가 걸린 이능 헤드기어를 착용해야 한다.
그러니 기말고사 즈음에는 담임인 함근형과 디바이스로 연락을 취했고, 시험을 치를 환경에 있었다는 뜻이다.
혹시 0반답게 방학이 되기 무섭게 정신 줄을 완전히 놓고 뮤즈 찾기에 박차를 가하다 이렇게 된 건가.
역대 0반 출신의 행적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목우람을 단순한 또라이 취급하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이 아이는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지만, 영감의 원천이 결여된 상태야. 이 아이의 스승은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마음속의 불안과 초조를 다스리는 지혜를 익혔지만, 이 아이는 아직 어리잖아? 상위 존재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무작정 영감의 원천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거야.”
“그 과정에서 이 꼴이 되었다는 건가.”
“반은 맞아.”
“반?”
“이 아이는 얼마 전에 자신의 뮤즈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 그러니까…….”
현무의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 바람에 목우람의 긴 무명옷 소매가 조금 말려 올라갔다.
목우람의 손등과 새끼손가락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 상처를 살피다 말했다.
“방어흔이군요.”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해 위협이 닥쳤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본인은 맨손이고, 상대는 날붙이를 들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날붙이에 다칠 걸 알면서도 공격을 당한 이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방어하고, 그 결과 손 주변에는 방어흔이 남게 된다.
이러한 방어흔은 보통 피습자가 상대의 공격을 인식해 대항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 방어흔이 목우람의 손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냥 실수로 베었다기엔 상처 모양이 이상해. 아무리 봐도 날붙이로 공격당한 걸 막은 모양새야. 은광고에 들어 올 정도의 플레이어가 맨손으로 날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니. 대체 뭐지?’
그렇다면 상해를 가한 건 누구일까.
에너미?
아니면 다른 플레이어?
현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사고를 중단시켰다.
“그래. 이건 무언가가 이 아이를 해하려 했던 흔적이야. 이 아이는 뮤즈를 만나기 위해 한반도로 향하는 중이었어. 그러던 중, 많은 일이 있었겠지.”
“무슨 일이 있었지?”
“그건 이 아이한테 직접 들어 봐. 나는 마침 내 영역에 도망쳐 온 이 아이를 보호했을 뿐이니까.”
현무는 간접적으로 자신은 이 이상 관여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황지호도 현무의 힘을 빌리거나 추궁할 생각이 없는지 더 묻지 않았다.
“보아하니 목우람이 직접 네게 도움을 청한 것 같진 않은데 나서서 보호하다니. 드문 일이군.”
목우람이 다친 원인까지는 캐지 않더라도 현무가 이 정도로 개입하는 게 드문 일이었나 보다.
현무는 한 번 입꼬리를 당겨 웃은 후, 물 흐르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염제가 가호를 내린 플레이어를 만나러 가 볼까.”
석실을 나와 현무를 뒤따라 걸을 때.
마력으로 목우람을 옮기던 황지호가 말했다.
“예전에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방문했을 때, 너는 권제인에게 이능 바이올린 장인에 관해 물었지. 그러다가 목우람의 이야기가 나왔고.”
“어.”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아이템, ‘무명의 운명’.
세계에 한 명뿐인 장인이 만든 ‘이능 바이올린’.
이 두 아이템의 설명문은 상당히 유사했다.
나는 게임 속에서 없었던 아이템 ‘무명의 운명’의 정보를 잡기 위해 권제인에게 목우람에 관해 물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힘’이 발동하였고, 너는 나조차 감지하지 못한 현무를 발견해 냈어. 현무는 네게 목우람을 맡겼고.”
30대 황지호의 목소리는 10대의 것에 비해 훨씬 낮았다.
복도 탓인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여기저기 울리는 것 같았다.
“이걸 우연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으니,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뻔뻔하게 우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답변하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구……!
현무가 기다리던 석벽이 열릴 때보다 더 큰 소리가 울렸다.
복도 가장 안쪽에 있던 벽이 열리자 횃불이 밝히고 있는 방이 보였다.
석실의 벽면에는 수십 종류의 약초가 걸려 있었고, 중앙에 놓인 긴 탁자 위에는 음식이 그득한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다렸습니다.”
인사를 올린 건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현무와 비슷한 디자인에 색만 다른 비단옷을 걸친 아이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호족의 수장님과 손님을 뵙습니다. 리웨이(李伟)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흔한 것으로 꼽으면 다섯 손가락에 들 법한 이름이었다.
리웨이를 살피던 나는 의문이 하나 생겼다.
‘예전부터 교류가 있던 게 아니었나? 왜 이렇게 어려 보이지?’
황지호는 리웨이의 인사를 받으며 답했다.
“그래, 기다리게 했군. 듣던 것과 나이가 다른데.”
“저는 올해 열여덟입니다. 염제 님의 은혜를 받은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이건 황지호도 몰랐던 사실이었던 것 같다.
황지호와 리웨이의 대화가 이어질 때, 현무가 탁자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현무가 권한 자리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교의(交椅)였는데, 가구라기보다는 예술품처럼 생긴 것과는 달리 놀랄 만큼 편했다.
황지호와 리웨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현무는 내 앞으로 음식 접시를 가져왔다.
“들렴. 저 둘의 대화는 길어질 것 같으니까.”
올라온 요리는 전부 쓰촨성이 자랑하는 사천요리였다.
한때에는 도원결의 때 장비가 형님으로 모시게 된 둘에게 대접했다는 가짜 전설이 돌던 장비우육, 마라가 듬뿍 들어간 쉐이주로우피엔, 한국에는 고추잡채라고 부르는 칭자오러우쓰.
현무가 직접 권하는 음식을 거절하기는 그렇지만, 이 밤에 전부 먹을 수 없어 조금씩 덜어 먹었다.
권하는 음식을 하나씩은 맛보자 현무는 만족한 듯 음식을 건네는 대신 차를 따라 주었다.
내가 간단한 요기를 끝냈을 때, 탐색전을 마친 황지호와 리웨이가 본론에 들어갔다.
“제 광림은 아직 아버지만큼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호족이 요청할 때 광림을 써 줄 것. 이 거래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을 것.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호족의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말해 봐라.”
어느새 제 몫의 그릇을 챙겨 식기를 움직이는 황지호가 말했다.
긴장한 건지 차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는 리웨이와 비교되었다.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리웨이가 호족의 수장을 상대로 막힘없이 말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것 같긴 하지만.
“한반도에는 12지 동맹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12지 동맹을 알고 있다니.
현무가 말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염제 신농이 알려 준 걸까?
염제 신농과 깊게 연관된 12지 소속의 짐승이 하나 있긴 했다.
염제는 소의 머리를 하고, 사람의 몸을 한 반인반수로 흔히 알려져 있었으니까.
“우족(牛族)의 수장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황지호가 식기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이나 힘이 아닌 다른 조건이라.”
황지호는 리웨이의 제안을 미심쩍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한반도의 12지 동맹 내에 배신자가 있고, 긴 꼬리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염제 신농은 우족(牛族)과 인연이 깊다. 신농이 마음먹으면 계시든 뭐든 내려서 만나게 해 줄 텐데.”
“그건…….”
리웨이가 말을 더듬었다.
“이유를 듣고 생각해 보겠다.”
이어지는 황지호의 말에 리웨이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현무는 개입할 생각이 없는 듯 차를 우려내며 말없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되면 연락하도록.”
끈질기게 기다리던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자, 리웨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리웨이와의 첫 접선은 그렇게 끝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 리웨이를 대신하여 현무가 마중 나왔다.
현무는 내게 디바이스 코드를 알려 주며 말했다.
“나는 네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든다.”
“네?”
“옳을 의(義)에 새벽 신(晨). 네가 가진 그 힘에 걸맞은 이름이 아니더냐.”
내 이름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안 건가.
현무는 예지의 힘이라도 사용한 걸까.
“이 아이의 재능이 새벽을 부를 네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현무는 검은 비단을 불러 허공에 떠 있는 목우람을 감싸 주며 덕담을 건넸다.
현무와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가인의 노래는 끝나 있었고, 그 대신 금 뜯는 소리를 배경으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와 황지호가 나설 길을 열어 준 무희들 사이를 걸어 누각 밖으로 나섰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우선 목우람을 귀국시킬 준비를 해야겠군.”
“디바이스도 신분증도 분실한 상태니까 절차가 좀 까다로울 것 같은데.”
“그래. 목우람을 한반도로 데리고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문제는 목우람이 입국 절차 없이 한반도에 들어간 게 발각되면 귀찮아진다는 점이지.”
처음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영사관을 떠올렸으나 생각을 바꿨다.
목우람은 플레이어 협회에 등록된 플레이어니까 협회의 중국 지부를 찾아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청두에도 지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상황을 더 빠르게 해결하는 법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협회의 고위직 직원이 나서서 신원을 보증하면 신분증이 빠르게 발급될 것 같은데.”
“부를 사람이 있는 것 같군.”
마침 온 힘을 다해 업무를 마치고 출국할 준비도 완벽하게 마쳤을 협회 직원의 이름이 하나 생각났다.
디바이스 주소록에서 그 이름을 선택해 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홍규빈 팀장님, 안녕하세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