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11화 (211/925)

42. 소원을 이룬 대가 (3)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황지호는 결계까지 친 걸까.

황지호가 방금 제 능력이 만능이 아니라고 운운했던 걸 고려해 급히 말을 끊었다.

“잠깐.”

“뭐지?”

“혹시 네 약점 같은 걸 밝힐 생각이야?”

“뭐……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

황지호가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승무원에게 차를 받으며 ‘진정 좋은 대홍포(大红袍)는 아홉 번을 우려내도 맛이 변하지 않는군. 과연 명나라의 황제에게 붉은 비단옷을 받을 자격이 있는 찻잎이야.’라고 떠들 때와 똑같은 어조였다.

다른 이가 엿듣지 못하게 결계를 친 거 보니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노친네가 노망이 온 건가.

‘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흑막 손에 떨어져서 황지호의 약점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게임 속 황지호의 행보를 고려하면 흑막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황지호를 잡는 방법을 알아낼 거야.’

게임 속 황지호는 많은 것을 잃은 상태로 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보다 더 철두철미하게 행동했을 황지호는 사라졌다.

흑막은 이미 황지호를 없앨 방법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게 안전할 거다.

‘잘 들어 두면 ‘황지호 죽이는 방법’을 떠올리는 단서가 되겠지.’

노친네의 입방정을 막는 대신 정보를 수집하기로 행동 방침을 정했다.

황지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 내가 이룬 소원을 체스로 비유해 볼까.”

“체스?”

황지호가 이능파를 마력으로 전환해 눈앞에 금빛의 체스보드를 만든 후, 텅 빈 체스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지호가 손짓을 한 번 하자, 체스보드 위에 금색의 킹이 하나 등장했다.

“천신의 은총이 닿는 한반도를 이 체스보드라고 하고, 나의 본신을 킹이라고 해 볼까. 그렇게 비유를 하면 체스 피스를 움직이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건 나의 정신, 혼이라고 할 수 있지.”

황지호가 체스보드 위에 서 있는 금색의 킹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

황지호의 마력으로 실체화된 체스보드와 체스 피스는 황금을 녹여 낸 진품 같았다.

“그리고 천신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준 덕에 체스보드 위에서라면 얼마든지 체스 피스, 분신을 늘릴 수 있게 된 거다.”

황지호가 손가락을 튀기자 체스보드 곳곳에서 체스 피스가 나타났다.

폰, 나이트, 비숍, 룩, 퀸…… 새로 나타난 체스 피스 사이에는 척 보기에는 규칙성이 없어 보였다.

퀸은 두 개, 룩은 네 개, 비숍은 세 개, 나이트는 여섯, 폰은 하나뿐으로 룰을 완전히 무시한 구성이었다.

“이 늘어난 체스피스들이 킹과 동일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내 분신도 마찬가지다. 본신과 같은 수준의 존재감도 없고, 광림도 사용할 수 없지.”

“그래도 스킬 사용이나 전투는 가능하지 않아?”

“물론이다. 내 정신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라면.”

광림을 쓰지 못하더라도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분신들은 충분히 강할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동시에 분신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해. 늘리고, 줄이는 것도.”

황지호가 손짓하자 체스 피스의 수가 늘어났다가 제각각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이트가 비숍으로 변하기도 하고, 룩이 퀸으로 변하기도 하고, 퀸이 폰으로 바뀌기도 했다.

사기캐인 황지호다운 황금의 체스 피스들은 규칙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랜덤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황지호가 본신으로 비유한 처음 실체화된 체스 피스, 킹.

킹은 처음 체스보드에 등장한 이후, 죽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킹을 가리키며 물었다.

“비유하자면 킹은 황지호 네 본신이고, 남은 체스 피스는 분신인 거야?”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는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으니까.”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의문을 표하자 황지호가 다시 체스보드를 향해 손가락을 튀겼다.

파앗!

빛나기 시작한 체스보드를 보다 경악했다.

체스보드 위에 있는 모든 체스 피스가 점멸하다 킹으로 한 번씩 변하기 시작한 탓이다.

‘설마…….’

체스보드 위에서 킹은 언제나 하나뿐이었지만, 킹은 모든 체스 피스의 자리를 거쳐 갔다.

황지호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예상이 갔다.

“설마…… 한반도에 있는 분신이라면 언제든지 본신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래. 이 몸이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단순히 분신을 늘릴 수 있다는 뜻만이 아니야.”

내 예상이 맞은 것 같았다.

황지호는 그간 내가 상정했던 것보다 더 사기캐였다.

“충분히 만능인 것 같은데.”

“하하하! 아무리 체스 피스들이 체스보드 위에 있어도 킹만 한 권한을 대신할 수는 없지.”

황지호가 킹을 움켜쥐며 말했다.

“체스보드와 떨어진 상태에서는 킹으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분신에도 제약이 생겨. 한반도 밖에서 분신을 움직이는 건 꽤 까다로워. 비유하자면…… 이능파로 뇌와 손 모양을 구현하여 체스를 두는 감각이야.”

어떤 감각인지 모르겠지만, 황지호가 한반도에 남긴 분신들을 움직이는 데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사고 능력도, 스킬의 정밀성도, 집중력도 크게 떨어지지. 그래서 중요한 일은 전부 처리하고 이번 해외여행에 나선 거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황지호는 한반도에 있는 한 만능에 가깝다는 소리 아닌가.

게임 속에서 적호가 죽었는데 한반도 밖으로 나돌아 다니진 않았을 텐데.

흑막은 대체 무슨 수로 황지호를 잡은 거지?

“아, 이제 막 한반도로 진입했군. 그럼 본격적으로 분신을 움직여 볼까.”

역시 이놈은 사기캐였다.

황지호를 죽이는 방법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 갔다.

*    *    *

한국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자리를 이탈한 건 서돌이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으니까 먼저 갈게요. 아, 조의신이 가호를 받고 싶으면 남아 있을 수도 있…….”

“빨리 꺼져.”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한 서돌이 사라졌다.

목우람이 황명재단 로고가 박힌 앰뷸런스에 이송된 걸 본 홍규빈이 힘없이 말했다.

“그럼 나는 이대로 협회에 돌아갈게. 한국에서 할 서류 작업이 생겼고, 조사해 봐야 할 것도 늘었으니까.”

제갈재걸 옆에서 떠들 때와 달리, 홍규빈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홍규빈도 2학년 0반 선배놈들처럼 신문부 취재 여행에 난입해 깽판을 칠 예정이었지만, 이번 건으로 완전히 틀어진 탓인가 보다.

‘……휴가를 날려 버린 건 좀 그랬나?’

제갈재걸이 홍규빈을 달래도록 유도해 볼까?

아니, 홍규빈 못지않게 공사다망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제갈재걸이 귀찮아지거나 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홍규빈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다행히 금방 수가 떠올라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할 때였다.

“기다려라, 홍규빈.”

디바이스를 확인하던 황지호가 홍규빈을 붙잡았다.

이놈은 홍규빈에게도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걸까?

황지호는 17세의 얼굴로 한참 어른인 홍규빈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황지호를 잠시간 응시하던 홍규빈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당신은……!”

홍규빈은 황지호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다.

황지호가 홍규빈과 몇 번 대화해 본 적이 있다고 했으니,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남궁 그룹에서 부른 용역 업체가 은광고 학생을 위협했는데.”

사월세음이 말한 그 조직 폭력배들은 남궁 그룹에서 보낸 거였나?

설마 4대 그룹의 이름 중 하나가 여기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왜 홍규빈에게 이 얘기를 하는 거지?’

플레이어 협회에 관한 것도 아니니 황명 그룹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확인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하지 않을까.

그렇게 의문을 품는 사이,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홍규빈이 긴장한 얼굴로 황지호에게 답했다.

“남궁 그룹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홍규빈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목우람 건은 내가 맡는다. 그쪽을 우선하도록.”

“……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홍규빈이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홍규빈에 관해 묻기 전에 황지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우리만 움직이는 게 아닌 것 같으니까.”

*    *    *

이 세계 어디에도 완벽한 시스템, 완벽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청렴하고 깨끗한 정부는 존재해도 절대적인 경우는 없었다.

은광한빛보육원이 있는 은광구 광일동의 광일파출소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지금 광일파출소 소속 경찰공무원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거나, 민원인이 대기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누워 자고 있었다.

개중에는 출근조차 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런 이들도 인사고과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간간이 무전이 오긴 했지만, 성의 있게 응대하는 이는 없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광일파출소는 소위 높은 분들과 친한 이들이 만들고 지키는 중인 일종의 신의 직장, 땡보직, 꿀보직들이 모인 꿀벌통이었다.

“네네, 아이고, 실장님 말씀대로 잘 처리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광일파출소장 김 경감이 수화기 너머로 고개를 처박을 기세로 말했다.

어제 이들은 112 종합상황실에서 대응코드 ‘코드 1’을 전달해 받았다.

코드 1은 코드 0 다음 우선순위의 대응 코드로, 범죄로부터의 인명, 신체, 재산 보호 등을 위해서 즉각적인 출동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내려진다.

그러나 코드 1 출동 무전을 받은 이들은 ‘출동하겠다.’라고 허위 보고를 하고 그대로 파출소에 머물렀다.

무전을 받고 4시간 뒤, 기록도 남길 겸 산책도 할 겸 순찰차로 그 주변을 지나친 게 이들이 한 후속 조치의 전부였다.

“소장님! 오늘 회식은 어디로 갑니까?”

“실장님이 룸 하나 내줬다.”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속된 지 얼마 안 된 신참 순경이 ‘룸’이 뭘 말하는 건지 몰라 어리버리한 얼굴을 하고 있자, 옆에 있던 고참이 귀엣말을 했다.

룸살롱을 말하는 걸 뒤늦게 깨닫고 신참 순경의 얼굴이 아연하게 변했다.

대화 내용이 점점 저속해지자 그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공연한 일을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어제 종합상황실에서 무전으로 지령이 오지 않았습니까.”

“괜히 제시간에 갔다가 그분들 심기 거스를 일 있어? 가긴 갔으니까 신경 끄고 있어.”

“그러다 신고한 학생들이 민원이라도 올리면…….”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고. 어차피 그것들 곧 정신이 빠져서 민원 올릴 생각도 못 해.”

“네? 정신이 빠지다니…….”

학생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라는 말이 신참 순경의 목구멍 앞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차마 입을 열 용기가 없는 신참 순경은 그저 몸을 뻣뻣하게 굳히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때.

쨍그랑! 와장창! 깡!

전면 유리창으로 된 광일파출소의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얼굴에 신문지를 덮고 정문 근처 소파에 누워 있던 경찰들이 유리 조각을 뒤집어썼다.

“으악!”

“뭐, 뭐야!”

유리를 깬 건 못이 박힌 야구 배트였다.

문 근처로 몰려든 이들이 야구 배트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신고해도 안 오던 새끼들이 짭새 둥지 무너지고 빽차 터지니까 기어 나오는 거 봐.”

빽차가 터졌다는 말에 순찰차가 정차된 주차장 쪽을 보니 폐차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으로 구겨진 순찰차가 보였다.

못이 박힌 야구 배트를 집어 든 소녀가 광일파출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 큰 체구가 아닌 데도, 얼굴을 꼼꼼하게 가린 소녀의 주변에 패기가 넘쳤다.

“어제 내 구역에서 삥 뜯은 새끼가 짭새 사이에 섞여 있는 거 같은데. 나라의 녹을 처먹어 놓고 그렇게 살면 안 되지. 5초 준다. 다섯 셀 때까지 나와. 다섯, 넷…….”

탁한 기계음으로 소녀가 카운트다운을 이어 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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