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17화 (217/925)

42. 소원을 이룬 대가 (9)

공청훤이 청호의 가호를 받았다고?

황지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곧바로 전용 메뉴를 열었다.

〈‘공청훤’의 인물 정보를 열람합니다.〉

[이름] 공청훤

[칭호] 은광고 정교사, 정음(正音)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

[가호]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

[광림] (비활성화중)

…….

…….

…….

인물 정보가 기록된 상태창을 열었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플레이어SAT-K가 공청훤에게 붙인 이명이 ‘바른 소리’를 의미하는 ‘정음(正音)’이라는 것.

공청훤이 플마고에서 악명 높은 ‘일부 로드에 실패하였습니다.’의 저주, ‘일로실’에 당했다는 것.

또, 광림을 쓰지 않고도 폐공장에 가득했던 용역 업체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였다.

“대답해라……!”

한편, 대답을 독촉하는 황지호는 동요하고 있었다.

단순히 동요한 것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힘도 해방하고 있었다.

황지호의 머리카락과 눈이 전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마력과 이능파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공청훤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바로 황지호가 진족이라고 알아챘을 거다.

‘……이상해.’

그러나 황지호에게 급소를 노려지고 있는 공청훤은 차분해 보였다.

선량함이라는 개념이 인간으로 화한 듯한 공청훤은 평소대로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이와 같은 반인 1학년 0반의 황지호 학생 맞죠? 안녕하세요. 한이네 반에 진족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공청훤은 황지호가 진족이라는 걸 알고도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했다.

그 말을 들은 황지호의 얼굴에서 일순 독기가 빠졌지만, 다시 이를 으득 무는 게 보였다.

“질문에 대답해.”

“제 가호에 관해 묻고 싶은 겁니까? 답해 드리기 어려울 것 같네요.”

“……답하지 않으면 네 목이 무사하지 못할 거다.”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허세로 보였다.

황금빛 마력으로 공청훤을 묶었다면 모를까, 잘 쓰지도 않던 봉술을 사용하는 것부터 마음에 걸렸다.

‘말만 저렇게 하지 진짜 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황지호가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공청훤은 그의 친우인 청호의 가호를 받은 몸이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찾아 헤매던 친우가 가호를 내린 공청훤을 험하게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곤란하네요.”

공청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폐공장 사이로 울렸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마치 시를 읊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가호는 상호 동의하에 주고받는 것이죠.”

“왜 당연한 사실을 떠드는 거냐. 어서 그 가호의 출처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모릅니다.”

공청훤의 대답에 황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은 황지호를 두고 공청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제 가호를 누가, 어떻게, 언제 준 건지 궁금해요.”

*    *    *

황지호가 부른 듯한 호족의 부하가 폐공장에 도착해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공청훤은 이사장의 호출이 와서 자리를 뜨게 됐는데, 황지호는 이사장 황명호로서 공청훤에 대해 더 캐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러날 타이밍을 놓친 나는 여전히 황지호와 동행 중이었다.

황지호는 ‘저택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툭 던진 이후로 황명호 대저택으로 이동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청훤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게 마음이 걸리나 보네.’

황지호는 공청훤과 그 이후로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대화를 마친 황지호는 처음 공청훤에게 소리쳤던 게 거짓말처럼 기가 죽었다.

황지호는 침울해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완전하지 않다고 하지만 청호와 신인을 찾을 강력한 단서를 잡았어.’

공청훤은 청호의 가호를 받았다.

공청훤은 기억이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무언가가 일어난 건지 몰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가호를 내린 건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공청훤의 존재가 청호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파앗!

현관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나와 황지호보다 앞서서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적호였다.

적호는 미로 정원 이동용 셔틀을 타지 않고 그냥 뛰어서 온 것 같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적호가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은 갔지만, 말리기에는 늦은 것 같았다.

“백호!”

퍽!

적호가 백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피하지 않고 적호의 주먹을 얼굴로 받은 백호군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서늘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주먹을 날린 적호 쪽이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호가 입을 열었다.

“…………, …………!”

방금 적호가 뭐라고 한 거지?

순간 적호가 뭐라고 하긴 했는데 정신이 아득해져 내 귀를 의심했다.

적호는 자신에 비해 한참 어린 은광고 학생들이나 적을 상대로도 신사적인 말투를 썼다.

게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지금 적호의 입에서 나온 건 그가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저급하고 상스러운 욕설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의 나열들이었지만 욕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는 한국어였다.

한국어의 숨은 가능성과 표현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적호가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정중한 말투를 사용했다.

“제 아들의 스승인 당신이 그런 짓을 하다니!”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까!”

변명도 안 하는 백호군의 모습에 울컥했는지 적호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호군이 손을 들어 올려 적호의 팔을 움켜쥐었다.

한 방은 맞아 줘도 두 방까지 맞아 줄 생각은 없었나 보다.

“……놓으십시오.”

“무기를 들거나 적뢰를 사용해. 네 손만 다친다.”

그렇게 말한 백호군이 손을 놔줬다.

백호군의 말대로 정작 맞은 백호군의 얼굴은 멀쩡한데 적호의 주먹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적호는 백호군보다 더 큰 저주를 받은 상태고, 순수히 무력으로만 따지면 백호군이 위인 탓일까.

‘그냥 맞기 싫어서 잡은 게 아니라 적호의 몸을 염려한 거구나……!’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친우를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적호는 적뢰를 쓰고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백호군을 공격할 생각은 없는지 힘없이 손을 내렸다.

……왕, 왕왕!

그때,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나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하얀 솜뭉치가 두 호랑이 사이를 뛰어다니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둘 다 거기까지 해라. 할 얘기가 많다.”

황지호는 막 도착한 김신록을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김신록은 대치 상태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김신록, 오늘은 백호가 먹을 곶감 요리를 준비해라.”

그 말에 백호군이 서늘한 얼굴을 아주 조금 무너뜨렸다.

적뢰에 맞는 게 낫겠다는 표정이었다.

*    *    *

“그린아……!”

오랜만에 귀가한 송대석은 5분도 안 되어 민그린의 집으로 뛰쳐나갔다.

민그린을 본 송대석은 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침대 위, 이불에 파묻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민그린은 AR 글래스로 퉁퉁 부은 눈을 숨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송대석은 민그린보다 더 울상을 지었다.

민그린은 ‘나는 괜찮아.’, ‘내가 그때 못 움직이는 바람에 애들을 방해해서…….’라는 말을 잠긴 목소리로 드문드문할 뿐,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민그린의 부모가 그들이 아는 상황을 전해 주자 송대석의 멘탈이 터졌고, 얼떨결에 휘말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위성관리팀의 팀장 임지화의 멘탈도 함께 터졌다.

‘큰일 났다……!’

송대석을 바래다줄 겸, 송대석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눌 겸 동행한 임지화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송대석의 소꿉친구라는 민그린이라는 학생도, 송대석의 상태도 걱정스럽긴 했다.

그러나 위성관리팀의 팀장으로서 일적인 면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망했다!’

송대석은 최근 위성관리팀의 중심이었다.

그가 여태까지 만든 웹 애플리케이션이나 알고리즘도 굉장했지만, 송대석의 진가는 다른 곳에 있었다.

플레이어 위성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수많은 지표를 연관시키는 유연성, 신기(神技)에 가까운 통찰력은 협회가 진행 중인 위성 프로젝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한 능력은 송대석의 무서운 집중력과 위성 지식의 습득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척 봐도 송대석은 민그린 걱정으로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선 억지로 끌고 가 봤자 아무것도 안 돼!’

하루만 쉬고 송대석을 다시 협회의 연구실로 모시고 갈 생각이었고 송대석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물러나야 해.’

임지화는 감이 좋았다.

송대석이 위성을 좋아하긴 하지만 저 민그린이란 아이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자신이 잘못 처신했다간 송대석은 위성을 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이 송대석 뒤에 버티고 있으니 협회가 아무리 용을 써도 송대석을 되찾지 못할 거다.

그렇게 판단한 임지화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대석아, 일단 연구 걱정은 하지 말고 친구 옆에 있어.”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래,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시간 생각하지 말고 바로 연락해!”

송대석이 편할 때 복귀하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사실 지금 당장 복귀해 줬으면 했다.

임지화는 피눈물을 삼키며 등을 돌렸다.

‘그래. 이럴 때 권력을 써야지……! 대석이를 상대로 협회가 갑질을 못 한다면, 다른 곳에 하면 돼!’

플레이어카에 올라탄 임지화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난데, 대석이한테 좀 일이 생겼어.”

그 이후, 위성관리팀 연구소에 속해 있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곧 이들은 자진하여 팀을 결성하고 조사에 돌입했다.

그리고 움직인 건 협회뿐만이 아니었다.

막 사회로 발걸음을 디딘 하나 남은 제자가 겪은 일을 알게 된 홍경복 화백과 그녀를 존경하는 은광고의 미술부.

그 외에도 소식을 접한 이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서서울 공원, 영원의 호수 팀 빌딩.

우연을 가장해 권레나를 데리고 피크닉을 갈 생각에 한껏 들떠 있던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축 처져 있었다.

갑자기 오늘 오전에 온 연락 탓이었다.

“……레나가 오늘 레슨을 쉰다고 해.”

권제인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최근 청소년 수련회 사건을 수습하느라 계속 바빴다.

이제 겨우 시간이 나서 레슨 일정을 다시 잡았는데, 갑자기 권레나가 올 수 없게 되었다.

레슨 시간이 줄어 권레나를 만나는 빈도가 크게 떨어져 마음이 허전한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우울한 얼굴을 했다.

“레나가 갑자기 레슨을 쉬다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느낌이 안 좋아.”

“조사해 보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영원의 호수에서 가장 젊은 간부의 지휘로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재러드 리가 권제인을 달래기 위해 제안했다.

“제인아! 지난번에 레나 양이 만들어 준 블루베리 청이 아직 좀 남아 있는데…….”

“부탁할게.”

권제인의 표정이 풀린 걸 확인한 재러드 리가 복도로 나가 팀 셰프에게 연락을 넣으려 할 때였다.

발신자의 코드가 표시제한 처리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다.]

수화기 너머로 어색한 한국어가 들렸다.

재러드 리는 일순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번뜩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요.”

[서운하군.]

말투는 어눌한데 ‘서운하다’라는 표현을 쓰다니.

상대는 한국어가 능숙한 건지, 미숙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재러드 리가 답했다.

“세 기사의 맹세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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