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18화 (218/925)

42. 소원을 이룬 대가 (10)

은광고등학교의 본관, 은휘관.

“이사장님, 모셔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호랑이가 양각된 문이 열리자 황명호 이사장의 비서와 공청훤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공청훤이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가 ‘앉게.’라고 짧게 말하자 공청훤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공청훤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전혀 동요하지 않는군.’

은휘관은 호족의 수장 황호가 직접 디자인한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호랑이 굴이다.

그 은휘관에 황명 그룹의 황명재단 이사장이 앉아 있으면 베테랑 플레이어도 압도되고 위축되는 게 보통이었다.

‘조의신도 태연하게 앉아 있었지.’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는 평정을 가장해 차를 권했다.

황호의 시선을 받고도 공청훤은 마호가니 원목 소파에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우미(優美)하게 차를 한 입 마셨다.

“그 폐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도록 하지.”

공청훤은 옥이 부딪쳐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한이가 협박을 당해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그 자리에 갔다는 말에 황호가 공청훤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대화’로 해결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언령계 스킬에서 언령(言令)의 말씀 언(言)은 ‘글’과 ‘말’,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한 어원을 따라 언령은 글과 말, 두 개의 형태로 발현되었다.

현재 은광고에서 언령계 스킬을 구사하는 플레이어는 두 명이었다.

공청훤, 제갈재걸.

두 사람의 언령계 스킬의 주요 발현 형태는 궤를 달리했다.

남옥시인(藍玉詩人) 제갈재걸의 언령은 주로 ‘글’로.

정음(正音) 공청훤은 주로 ‘말’로 발휘되는 게 그 차이점이었다.

같은 격투기 종목의 선수라도 어떤 선수는 팔 기술이 특기고, 어떤 선수는 다리 기술이 특기인 것처럼.

‘두 사람 다 말과 글로 언령 스킬을 사용 가능해. 그러나 둘의 특기, 파생 스킬은 달랐지. 공청훤은 ‘말’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제갈재걸에게 이능이 발현되기 전부터 시를 쓰는 재능이 있던 것처럼 공청훤도 낭랑한 음색을 타고 난 듯했다.

공청훤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황호는 감탄과 묘한 그리움을 크게 느꼈다.

공청훤이 설명을 모두 마치자 황호가 입을 열었다.

“황명재단의 직원이 도착하기 전, 1학년 0반의 학생이 자네를 공격했다고 들었는데.”

“황지호 학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내가 대신해 무례를 사과하지.”

황지호가 황명호 이사장의 친척이라는 설정은 교사진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황호는 이를 이용해 사과해 두려 했지만, 공청훤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사과를 받지 않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사과받을 만할 일이 없어서요. 그 아이는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한이의 친구고…….”

공청훤이 처음으로 말을 흐렸다.

“이상하게 그 아이를 상대로는 화가 나지 않아요.”

*    *    *

황명호 대저택 응접실 안.

오늘의 차와 다과는 곶감 일색이었다.

배와 참외를 갈아 넣은 곶감냉차와 곶감 타르트, 곶감 쿠키, 곶감 타래과자…….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백호군은 머리가 어지러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서 곶감 다과를 먹어서 없애는 동안, 호랑이들과 그 후예가 공청훤의 프로필과 이력을 살피고 있었다.

“청호의 가호를 받은 인간이 은광고에 재직 중이라니…… 그렇다면 청호가 가까이에 있는 겁니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공청훤은 자신에게 가호를 내린 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어.”

“……그게 가능합니까? 가호는 상호 동의가 없으면 내리지 못할 텐데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적호와 황지호가 입을 다무니 다시 조용해졌다.

곶감 요리 준비를 마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김신록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청훤 선생님이 청호의 가호를 받았다니…… 그분과는 몇 번 마주쳤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청호 님께도 사사 받은 후예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발견했을 당시 공청훤은 스킬을 사용해 싸우는 중이었다. 전투 중에 발동하는 타입의 가호라면 네가 눈치채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아.”

이번엔 적호가 백호군에게 물었다.

적호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오토매틱 메이드가 나르는 곶감 요리 접시를 족족 백호군 앞에 놓고 있었다.

“신인과 청호가 인간이 되었다고 했죠. 이 정보는 ‘흉내꾼’에게서 얻은 거고…… 그 ‘흉내꾼’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확답은 할 수 없다.”

“그럼 ‘흉내꾼’의 말을 신뢰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러나 백호군은 고개를 저었다.

“신인이 인간을 부러워했던 것을 기억하나?”

“……그랬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과 인간의 혼혈인 불완전한 형태의 자신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어.”

“신인이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서 현세에 머문다면 우리를 찾았을 거고, 상위 존재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계시를 내렸을 거다.”

백호군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상, 신인은 인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신인이 인간이 되었다면 청호도 신인을 따랐겠지.”

“신인은 그렇다 쳐도 청호가 어째서 인간이 되면서까지…… 아.”

적호가 말을 멈췄다.

어쩐지 시선이 내 쪽에 멈춘 것 같았다.

이 중에서 인간은 나 혼자뿐이라서 신경 쓰는 건가.

“처음에는 청호도 진족으로서 곁에 있었을 거다. 하지만 경애하는 신인이 생을 마감하고 홀로 남겨지는 걸 수십 번 반복했다면…… 청호가 혼자 견딜 수 있었을까.”

“청호의 성격이라면 한 번도 견디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

그 이후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착한 올무가 백호군의 곶감 과자 몇 개를 먹다가 애교를 부리며 돌아다녔지만, 나 외에는 반응하는 이들이 없었다.

‘청호를 찾아 주고 싶어.’

게임 속에서 청호라는 이름을 쓰는 캐릭터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청호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우리 호족의 신역이 이 은광고에 있고, 은광고는 멋진 소리로 넘쳐 나. 청호는 반드시 은광고로 올 거다.

문득, 황지호가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남겨진 호족도, 청호도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는데 인간이 되었다 한들 만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데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청호와 신인…….’

나는 그간 청호와 신인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하나씩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청호 님의 의지를 이었다. 싸우기 전부터 약한 소리 하지 마! ……질 게 뻔하지만.

—태호권의 원류, 창시자 청호 님의 수제자로서 최선을 다해 응전하겠습니다!

—태호권은 ‘그 녀석’이 ‘넌 나한테 평생 태호권으로 못 이길 거다.’라고 도발해서 대충 배운 거다.

—……그 녀석과의 재대련을 기다리면서 수련은 하고 있다.

단서 하나, 청호는 태호권의 원류이자 창시자였다.

—청호도 그렇고 저 제자 놈들도 ‘소리’에 아주 제대로 환장한 놈들이라서. 청호도 있었으면 저 권제인의 음악에 죽고 못 살았을 거다.

단서 둘, 청호는 ‘소리’를 사랑했다.

—청호는 감주를 좋아했죠. 입이 짧은 편이었지만, 단술을 가져가면 남기지 않고 비웠던 게 기억이 납니다.

단서 셋, 청호는 단 것을 좋아했다.

—청호(靑虎) 이르길, 항상 신인(신의 아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청호는 ‘신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무 예고 없이, 미련 없이 사라졌어.

단서 넷, 청호는 소원을 이룬 신인과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신인의 목소리라 먼저 신인을 낚는 게 빠르겠지만.

단서 다섯, 청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신인의 목소리였다.

소리를 사랑하는 청호가 제일로 꼽을 소리라면 보통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닐 것이다.

—그 가호를 어디서 받았지? 어디서 청호의 가호를 받은 거냐!

단서 여섯, 청호의 가호를 받은 공청훤의 존재.

—인간과 혼혈이었던 신인은 인간이 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청호는…… 대체 무슨 대가를 치른 거지? 인간과 진족은 근본부터 다른 것을.

마지막 단서는 청호는 인간이 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인보다 더 큰 대가를 치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둘이 청호와 신인이 아닐까?’

모든 단서를 정리했을 때, 내 머릿속에 두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도 등장했고 이 세계에서 몇 번이나 마주했던 그들은 인간으로 보였지만, 이 단서에 모두 들어맞는 건 그들뿐이었다.

“청호와 신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아.”

쾅!

내 말에 백호군을 제외한 호랑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해 봐라, 조의신!”

“말씀해 주십시오!”

“조의신 군……!”

다른 호랑이들은 몰라도 잘 생각해 보면 나와 비슷한 단서를 잡은 황지호도 짐작이 가능했을 텐데.

나와 달리 황지호는 ‘추리의 진위를 파악하는 방법’을 갖지 못하고, 청호와 감정적으로 크게 연관된 바람에 냉정한 추리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아직 100% 확실한 건 아니야. 그래도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확인하는 방법도 있어.”

응접실에 있는 이들의 눈이 타오르는 것처럼 빛났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 또 그 둘에게 청호와 신인으로서의 기억과 능력이 없는 건 분명해.”

“…….”

“그러니까 만약 내가 생각하는 두 사람이 청호와 신인이라는 게 확실해져도 둘에게 호족이나 신인으로서의 삶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가 대표로 말했다.

“맹세하겠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한, 그 둘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방해하지 않겠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각오를 다졌다.

“확인하러 가자.”

*    *    *

해가 진 천익산.

황지호가 미리 명령해 둔 덕에 산을 오르는 이들은 나와 호족들과 후예 그리고 천익산에 간다는 사실을 알자 따라온 산령뿐이었다.

저 멀리 호족의 신목(神木) 천단수(天壇樹)가 보이기 시작하자 산령이 들뜬 것처럼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평소엔 은호의 후예들과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이나 하고 있어서 알기 어렵지만, 저 산령도 동화 속 산신령 비슷한 무언가라는 게 실감이 났다.

“천단수에 오면 확인할 수 있다고 했지. 대체 무슨 방법으로 청호와 신인의 존재를 특정할 거지?”

청호와 신인의 후보는 머릿속에서 특정했다.

그리고 내게는 내 추리의 진위를 판단할 스킬이 있었다.

바로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차원, 시공간, 우주를 초월해 존재하는 초상우주와의 교신은 참과 거짓을 가를 수 있는 판독기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스킬을 사용한다 해도 초상우주가 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사용하면 몸과 정신에 상당한 부하가 오는 리스크가 있긴 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세계에서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호랑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질문 두 개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다.

중국에서 사건에 휘말리다 귀국하고 벽사의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 백호군의 광림도 사용했다.

심하지는 않지만 이능과 체력이 소모된 상태였다.

그래서 천단수 앞으로 온 거다.

‘이곳에서 교신 스킬의 레벨이 올랐어. 확증은 없지만, 이곳은 초상우주와 관계가 있을 거야. 어느 정도 교신 시간도, 얻을 수 있는 정보량도 상승하겠지. 설령 이곳이 초상우주와 관계가 없더라도 손해 보는 건 없고.’

심호흡을 하고 천단수의 기둥에 손을 올렸다.

전에 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묘하게 수피(樹皮)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운명력은 발생하지 않네. 알아서 해결하라는 건가.’

운명력도 발동하면 교신 시간이 좀 길어지는 것 같은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호랑이들에게 말했다.

“내가 기절하면 기숙사 방으로 옮겨 줘.”

“뭐? 조의신, 너 무슨 짓을…….”

〈스킬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합니다.〉

우웅—!

스킬 발동과 동시에 주변이 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과 몸도 빛이 점거해 텅 비어 가기 시작했다.

쾅!

정신과 뇌가 조각나는 감각이 신체를 뒤덮기 전에 이마를 천단수에 박았다.

머리가 얼얼해지며 정신이 들어 사고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신인과 청호는 인간이 됐어?”

긍정.

푸른 섬광이 뇌 안을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가능성이 없긴 했지만, ‘흉내꾼’의 수작질일 경우를 고려한 질문이었다.

나는 다음 질문을 했다.

“현재 신인은 공청훤, 청호는 한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맞지?”

긍정.

머릿속이 다시 새파랗게 물들었다.

교신 과정을 지켜보는 호랑이들이 뭐라고 외친 것 같지만, 시스템 메시지와 겹쳐져 잘 들리지 않았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스킬 레벨이 4에서 5로 상승합니다.〉

청호와 신인의 정체도 이 세계의 중요한 비밀 중 하나였는지, 레벨이 올랐다.

그러나 지금 전용 메뉴 레벨 상승의 효과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초상(超象)우주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과다한 의사소통은 적합체의 부하를 초래합니다.〉

평소보다 지쳐 있고 광림까지 사용한 데다 운명력의 서포트도 없는 탓일까.

교신 가능한 시간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몸에서 이능파가 들끓기 시작했지만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성헌이는 잘 지내?”

그러나 초상우주는 저번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었다.

시야가 점점 어둡게 변하고 목에서 쇠맛이 차올랐다.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그 전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경고,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접속을 제한합니다.〉

“조의신!”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그러나 답하지 못하고 천천히 정신이 어둠 속에 잠겨 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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