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소원을 이룬 대가 (11)
최근 며칠간 공청훤은 황명재단 측에 붙잡혀 있었다.
해방된 지금도 감시가 붙은 상태였다.
절묘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지만, 제자인 한이보다 더 높은 레벨의 ‘기척 감지’ 스킬을 가진 공청훤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공청훤은 선량한 표정 뒤로 가라앉은 감정을 숨기며 걷고 있었다.
‘정교사가 되고 나서 사고를 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올해 들어 은광고에는 유난히 사고가 많았다.
수많은 교사의 목이 날아가거나 체포되거나 지명수배되고, 남은 교사들은 철저한 감사를 받았다.
그런 중에 공청훤은 용역 업체와의 충돌을 ‘대화’로 해결하다 황명재단 측에 발각되었다.
공청훤은 권고사직을 각오했으나 이상하게 황명재단 측이 공손하게 나왔다.
며칠 동안 질문 세례에 시달렸지만, 사고를 친 교사로서 상사에게 조사를 받는다기보다는 학창 시절 밴드부 보컬을 담당하던 시절에 인터뷰를 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공청훤이 왜 자신이 이 정도로 극진하게 대우받는지 넌지시 물어보자,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웃는 황명호의 비서가 말했다.
—황명호 이사장님께서 선생님께 예의를 갖출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황명호 이사장은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가.
이 질문에는 비서가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선생님의 질문에는 뭐든지 답하라고 명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유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답변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서가 저렇게 죄송스러워하니 공청훤도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황명호 이사장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소문으로도 그렇고, 실제 만나 본 소감도 그러했다.
어째서 황명호 이사장이 자신이 황명재단 감사팀의 조사를 받는 내내 직속 비서를 자신의 옆에 붙여 둔 건지 짐작이 안 갔다.
덕분에 며칠에 걸친 신체, 이능, 정신 검사와 감정 과정에서 어떤 불편함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왜 나를 귀빈 취급한 걸까.’
황명호 이사장의 친척으로 알려진 고교생 황지호의 정체가 진족이었던 것도 그렇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며칠 동안 옆에 붙어 수발을 들던 이사장의 직속 비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하라며 명함을 남겼다.
비서는 명함 한 장이 아니라 명함집을 넘겼는데, 그 안에는 비서의 명함뿐만이 아니라 이사장의 명함도 있었다.
이사장의 명함 뒷면에는 ‘황지호’라는 이름과 디바이스 코드가 쓰여 있었다.
‘황지호 학생의 디바이스 코드인가? 대체 왜?’
가호에 대해서 다그치듯 묻던 황지호가 떠올랐다.
황명재단 측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에도 상부에서 지시를 내린 건지 이능파의 발현에 따라 작용하는 가호에 대해 철저하게 검사했었다.
‘내게 가호를 내린 누군가는 황명 그룹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군. 누구일까.’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
공청훤의 목적지는 은광구 광일동 은광한빛보육원.
이 근처에 사는 공청훤이 어렸을 때부터 봉사 활동을 하던 보육원이었다.
며칠 만에 보육원을 방문한 공청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은광한빛보육원은 최근 지역 주민들의 이권 다툼에 휘말려 자원봉사자가 뚝 끊긴 상태였다.
공청훤은 이를 알고도 대처하지 못했다.
공청훤이 강한 플레이어라고 하지만, 이번 건은 일반인끼리의 이권 싸움이었다.
플레이어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도, 플레이어 협회의 힘도 빌릴 수 없었다.
막 은광고 정교사가 된 햇병아리 교사에 불과한 공청훤은 그저 좀 더 자주 봉사 활동을 하러 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한이가 휘말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 무모하게 나서고 말았지만.
“아유, 이게 누구야! 은광고의 선생님이잖아! 바쁠 텐데 왜 자꾸 와.”
“청훤이 형이다!”
“청훤이 오빠다!”
가족이나 다름없이 가깝게 지내는 보육원 사람들이 공청훤을 맞이해 줬다.
보육원은 평소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고, 최신형 자동 청소 기기가 보육원 부지 곳곳을 돌며 청소하고 있었다.
수리가 필요했던 외벽 근처에는 ‘황명건설’ 로고가 붙은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공사를 진행하는 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큐리티 서비스 업체에서 보안 설비까지 설치하고 있었다.
“공청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저는 괜찮아요. 편한 대로 부르게 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죠?”
“황명재단 측에서 우리 사정을 알고 도와주겠다 하더구나. 저번에 기부금을 많이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단다.”
면목 없어 하는 표정을 한 보육원의 원장이 놀고 있는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원장의 얼굴을 보니 한이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한이 얘기를 들으셨군요.”
“……그래. 한이랑 그 아이들한테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한이도, 그날 함께 봉사 활동을 하러 온 학생들도 전원 은광고 소속이니 황명재단에서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조금 과해 보였긴 하지만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청훤은 화제를 돌릴 겸, 신경 쓰이는 것을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울기라도 한 건지 눈이 시뻘건 남녀 넷이 열심히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게 보였다.
이들은 공청훤이 태호권을 가르치는 아이들이 태호권을 선보이자 자세를 고쳐 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황명재단 분들이라는데 보육원 출신인 아이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라더구나. 선물도 어찌나 많이 챙겨 왔는지.”
보육원의 원장은 이들이 누구에게 신세를 졌는지는 밝히기 어려운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보육원의 특성상 사정이 복잡한 아이들도 많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부를 하는 사람도 있어 깊게 묻기 어려우니 원장의 태도는 당연했다.
그래도 공청훤은 저 넷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그들이 들고 왔다는 선물 목록을 보자 더욱 그러했다.
‘설마 한이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인가……? 아니, 나이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들이 가져왔다는 선물은 전부 혀가 아릴 정도로 단 과자와 음료였다.
* * *
머리가 아프다.
시야가 밝아지고 사고가 재개되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보니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천단수 앞에서 초상우주와 교신하다 한계에 달해 기절했었지.
‘……여긴 어디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잘 안 떠오른다.
몸에 피로가 남은 탓인지 지나치게 오래 누워 있던 탓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왕! 왕왕!
아, 천국에 온 거구나.
천사가 눈앞에서 폴짝하고 뛰면서 나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그 멍청한 얼굴을 보니 정신이 든 것 같군.”
황지호 말에 현실로 끌려왔다.
주변을 보니 황명호 대저택의 게스트 룸이었다.
방 구조는 본 기억이 있었지만, 벽지, 커튼, 장식품 등이 전에 왔을 때와 달라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손님 방도 계절 별로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어?”
“3일이 지났다.”
대답한 건 백호군이었다.
이 방에는 황지호 말고도 백호군도 있었나.
배려심 깊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나 보다.
‘처음 교신했을 때도 눈 떠 보니 3일이 지났었는데.’
운명력이 발동했을 때는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났는데.
정확히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은광고 입학 전에 교신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정도라고 추측했다.
그래도 그때와 달리 탈수 증상은 일으키지 않았다.
팔에 연결된 정맥 카테터 덕인 것 같았다.
“그냥 기숙사 방에 둬도 됐는데.”
청호와 신인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호족은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을 거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내가 한 문답을 들었다.
청호와 신인이 환생한 존재로 언급된 한이와 공청훤을 만나고 싶었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해 새로 조사할 것도 많았을 거다.
그럼에도 눈을 뜨자마자 천사와 호랑이들이 방 안에 있다는 건 꽤 많은 시간을 나한테 썼다는 뜻이다.
플레이어의 몸은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한 데다, 처음 교신을 할 때보다 이 몸의 종합 능력치는 크게 상승하였다.
그냥 둬도 죽거나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확인할 걸 그랬다.
“…….”
이 말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올무가 정신없이 흔들고 있던 꼬리를 뚝 멈췄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정정했다.
“미안, 치료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했는데…… 고마워.”
분위기가 싸했다.
이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사과하려 할 때,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너를 기숙사에 홀로 내버려 두라고?”
황지호의 말에 이어 올무가 ‘끄응…….’하고 우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조의신, 나는 은인의 부탁은 가능하면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도 있어.”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사과나 감사의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나는 네 부탁을 무시하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 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내 답변을 기대하지 않은 건지, 황지호가 말을 계속했다.
“그 정체불명의 힘을 사용하기 직전에 네가 한 말을 고려해 보면, 넌 그 힘을 사용한 후에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았던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우주와의 교신 스킬에 부작용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의 후예를 구하고, 친우와 신인을 찾아 준 은인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벌을 줄 수도 없지…… 곤란하게 됐군.”
말은 저렇게 해도 곤란하다기보단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지호가 화가 난 건 둘째치고, 그가 한 말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청호가 한이고, 신인이 공청훤 선생님이란 말을 믿는 거야?”
호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증거라곤 내 말밖에 없다.
의심할 여지는 충분히 있을 텐데.
“그날 천단수에 거대한 힘이 내려왔지. 그건 인간의 이능이나 진족이나 상위 존재의 힘도 아닌 무언가였어. 그런 힘을 끌어들여서 알아낸 정보라면 믿을 만해. 무엇보다 은인이 그리 말하는데 당연히 믿어야지.”
초상우주의 힘은 상위 존재의 힘과도 많이 다른가 보다.
짐작은 했지만, 호족의 수장이 저렇게 말하니 확실해졌다.
“그 힘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게 아니야. 잠깐, 이전에 네가 천단수 근처에서 발견된 적이 있었지. 조의신, 설마 너 그때도 그 힘을 사용하고 기절한 거냐.”
왕, 왕왕!
황지호의 말에 이어 올무가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짖었다.
올무 표정에 힘이 들어간 게 올무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천사가 묻는데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래. 천단수랑 내 스킬이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써 봤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는 거지. 그때 나와 백호가 가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나.”
“그 근처에 3학년 0반 선배님들이 계셨어. 산령도 있었고.”
왕왕왕!
그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이 더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날 내가 했던 사실이 저러했고, 변명도 저것밖에 없으니 저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황지호가 화제를 바꿨다.
“너는 그날 세 가지 질문을 했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청호와 신인에 관련된 거였는데…….”
황지호가 다음으로 할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카테터를 뽑고 도망쳐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지호와 백호군 그리고 올무의 포위를 뚫고 탈출할 자신이 없었다.
“세 번째 질문에서 너는 ‘성헌이는 잘 지내?’라고 물었다. ‘성헌이’는 누구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