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변하지 않는 것 (2)
‘……왜 황지호는 녹족의 수장과 나를 만나게 하려는 거지?’
게임 속 ‘녹족의 비밀 상점’ 시스템을 떠올리자 번뜩 답이 떠올랐다.
퀘스트를 해결하면 상점이 열리고, 상점 이용 횟수가 일정 수를 돌파하면 숨겨진 메뉴가 하나 추가되었다.
‘설마 ‘맞춤 영약’을 만들 생각인가!’
맞춤 영약.
직접 녹족이 복약할 이를 진맥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새롭게 조제한 영약이다.
비밀 상점을 이용한 캐릭터에 따라선 녹족이 등장해서 직접 복약 지도를 하기도 했다.
‘영약을 먹고 몸이 좀 좋아지긴 했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서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 세계에 와서 여러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그중에 가장 강렬하고 견딜 수 없던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녹족이 만든 영약의 맛’이 들어갈 거다.
맛없음의 새로운 지평을 연 녹족의 영약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맞춤 영약의 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에 황지호가 의뢰해 만들었다는 인간용 일반 영약과 그리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도망쳐야겠다.’
마침 해가 졌으니 오혜지의 광림, ‘월하의 위태천(韋駄天)’을 쓸 수 있다.
심야가 아니라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백호군이 붙잡지 않는다면 도망칠 수 있을 거다.
“잠깐 기숙사에 다녀올…….”
“조의신, 어디에 갈 생각이냐.”
은호의 후예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광림을 발동하려 했는데,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할 노친네가 산통을 깼다.
“기숙사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오거나 새로 구비하도록 하지.”
“아, 의신이 오빠! 손님 뵙고 나면 같이 웹 쇼핑해요!”
“새 게임 골라 주세요!”
“카메라를 사고 싶은데 어느 걸 골라야 할지 몰라서…….”
황지호에 이어 은호의 후예들이 악의가 전혀 없는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다른 변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또 입을 열었다.
“신수의 영약도 새로 맞출까. 마침 녹족의 수장도 신수를 직접 보고 싶다고 했지. 영약을 자주 먹는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혹서기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가자.”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다고 하니 우리 올무를 위한 영약이 있으면 좋을 거다.
황지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절로 답이 나왔다.
……왕? 왕왕!
올무는 충격받은 얼굴로 빳빳하게 굳었다.
굳어 있는 천사를 백호군이 들어 올렸다.
“네가 가지 않으면 조의신이 도망갈지도 모른다.”
끄응…….
내가 도망가려 했다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 같았다.
백호군이 달래니 올무는 귀를 접고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한 표정으로 굳었다.
“백호, 네 몫도 있다. ‘천신의 진노’를 짊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 몸으로 웅족 수장의 오른팔을 상대했으니 피로가 쌓였지 않겠느냐.”
백호군의 표정이 굳었다.
올무와 백호군이 동시에 굳으니, 저 근처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둘이 건강해지는 건 기쁜 일이지만, 대놓고 약 올리는 황지호의 태도는 거슬렸다.
“너도 먹지 그래.”
“내 몸을 염려해 주는 거냐? 기특하구나. 걱정하지 말도록. 이 몸은 그런 거 먹지 않아도 강하다.”
딱히 걱정해서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황지호는 재수 없는 말을 했지만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백호군도 그 천신의 진노 디버프만 없으면 이런 영약 먹을 필요 없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현관에서 은호의 후예들의 배웅을 받았다.
미로 정원 이동용 에어 셔틀에 올라 짧은 저공비행을 마친 후.
‘별채 쪽은 처음 오네.’
미로 정원 밖과 황금 담장 사이에는 통일되지 않은 양식의 건물이 띄엄띄엄 존재했다.
고풍스러운 한옥, 대담한 중국식 목가구조, 딱딱한 고딕 양식, 장대한 바로크 양식, 꽃이 피어나는 듯한 아르누보, 입체적인 양식의 큐비즘.
본채만큼 크진 않았지만 다양한 양식의 건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게 신기했다.
저 제각각인 양식의 건물들이 어우러지는 건 절묘한 정원 조경 덕일 거다.
은휘관이나 본채에서도 느꼈지만 망할 노친네의 인테리어 감각은 매우 훌륭했다.
“어서 와! 기다렸어!”
올해 10살이 된 막내 은재호만 한 아이가 한옥 현관에서 방방 뛰며 외쳤다.
설마 아이의 모습을 한 게 녹족의 수장인가.
“황호! 백호! 안녕, 안녕! 신수랑 인간도 안녕!”
대놓고 저 둘을 그렇게 부르는 거 보니 녹족의 수장이 맞는 것 같았다.
나름 신화계 호족은 대우해 준다고 묶어서 인사하지 않고 한 번씩 손을 흔들며 인사한 녹족의 수장은 어서 들어오라며 앞장섰다.
“불러 줘서 기뻐! 내가 직접 맞춤 영약을 만들 만한 기회는 없어서…….”
“네가 마음만 먹으면 손님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
그건 그렇다.
재료만 갖춰지면 희귀 스킬 획득까지 가능하게 하는 영약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게 분명하다.
사슴의 진족답게 큰 눈망울을 한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아무 존재한테나 만들어 줄 수는 없어. 가뜩이나 바쁜걸. 그건 안 돼!”
녹족의 수장은 새 손님을 받고 싶은 건지, 받기 싫은 건지 모르겠다.
짧은 팔다리를 열심히 놀려서 선두에 선 녹족의 수장은 사람 수에 맞춰서 비단 보료방석을 깔았다.
“자, 앉아!”
상석에는 황지호가 앉고 그다음 자리에는 녹족의 수장이 앉았다.
“소개하지. 나와 백호, 신수의 소개는 필요 없겠지. 조의신이다.”
“안녕하세요.”
황지호가 나를 가리키며 말해 녹족의 수장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녹족의 수장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이자는 녹족의 수장이다. 지금은 ‘향록’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반가워! 향록이라고 불러 줘.”
향록은 등에 지고 있던 백팩 안에서 보온병을 하나 꺼냈다.
보온병에는 전에 먹던 영약 파우치에 붙어 있던 사슴뿔 모양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약차를 타 왔어! 마실래? 아, 너희들이 차 마시는 사이에 먼저 신수부터 진맥을 보고 싶은데…….”
“알았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올무가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진맥을 받는 사이, 오토매틱 메이드가 다기와 찻잔을 가져와 약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 지옥의 영약을 만든 녹족의 약차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황지호가 보온병을 기울인 순간 향긋하고 상쾌한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냄새만 맡아도 사약인지 독약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영약과는 전혀 달랐다.
황지호가 먼저 마시는 걸 보고 나도 잔을 들었다.
‘……맛있어!’
찻물을 한 모금 삼키는 순간 몸 안에 훈풍이 부는 것 같았다.
혀도 몸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면서도 왜 영약은 그 모양인 거지?
“맛있네요. 영약도 이렇게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올무의 귓속을 들여다보던 향록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니까.”
“……일부러요?”
“응. 그렇게 만드느라 고생했어. 먹을 때마다 맛이 다 달랐지? 매번 새로운 맛없음이 느껴지도록 조정했는데.”
그게 일부러 의도한 맛이었나!
영약을 먹는 동안 고생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크르르……!
순간 연옥의 저편에서나 들릴 법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령이 주변에 있나?
아니면 이 세계에선 사슴도 짖는 건가.
사실 황지호도 의심하긴 했지만, 소리가 날 때 황지호는 차를 삼키고 있었으니 후보에서 제했다.
“음, 그렇게 무섭게 굴어도 맛은 타협할 수 없어. 저 정도로 맛이 없어야 미뢰 신경 섬유에 자극이 가서 이능파가 활성화되기 쉽고 영약의 흡수 효율이 올라가니까!”
그런 쓸데없는 설정이 붙어 있을 줄은 몰랐다.
“적어도 질리지 않게 다양한 맛이 나도록 배려는 해 줄게.”
그런 쓸데없는 배려는 안 해 줘도 된다.
향록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동안 또 어딘가에서 지옥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천사의 진맥이 끝나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되었다.
“호족의 정수를 사용한 영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다. 부작용이 없도록 주의해라.”
“응, 알았어!”
황지호의 말에 힘차게 답한 녹족의 수장이 진맥을 시작했다.
향록은 작은 팔을 놀려 손과 목의 맥을 짚고, 동공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능파를 두르고 있어. 스킬을 사용 중인 건가?’
희미하지만 향록의 손과 눈에서 이능파가 느껴졌다.
이능파를 이용해 나를 관찰하던 향록이 불쑥 질문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네.”
“……진짜? 음.”
향록은 무언가를 메모하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되풀이했다.
“왜 그러지? 조의신에게 문제가 있나?”
“아니, 그냥…… 아파 보였는데 진맥한 결과는 멀쩡해서. 조의신은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아주 튼튼해!”
그럼 문제없는 것 아닌가.
아직 내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다.
진맥을 마친 향록이 디바이스 코드가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호흡할 때 위화감이 느껴지면 연락해 주라.”
예전에도 아케아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생각을 더 하기 전, 향록의 말에 의해 사고는 금방 중단되었다.
“영약은 여름이 끝나기 전에 완성해서 보낼게. 기대해!”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 * *
은호의 후예들과 인터넷 쇼핑을 하다 보니 잘 시간이 되었다.
쇼핑을 마친 후에는 기숙사에 갈 생각이었지만, 향록이 다녀간 이후 올무가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 곁에 있기로 했다.
‘이제야 밀린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겠네.’
내 품에서 잠든 올무를 안고 디바이스를 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사월세음이 보낸 메시지였다.
[사월세음] 역시 의신이가 오면 뭐든 잘 해결될 거라 믿었어요!
읽기만 해도 낯이 간지러워지는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스크롤 바를 거의 끝까지 내린 후에야 사월세음의 근황이 보였다.
[사월세음] 교직원 휴게실 수리비를 내려고 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려 했는데, 이사장님이 청구하지 않기로 했대요.
황지호가 이 셋에게 수리비를 받을 리가 없긴 했다.
옛 친우의 환생과 그 친우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걸 막으려는 반 친구들이 박살 낸 휴게실이니까.
받으려 했다면 내가 대신 내 줬을 거다.
[사월세음] 이사장님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여태까지 우리 반이 사고 친 게 없어서 다른 분들도 좋게 봐주고 넘어가기로 한 것 같아요.
그건 그렇다.
괜히 지나치게 엄하게 굴었다가 착하고 얌전한 1학년 0반 아이들이 비뚤어지면 고통받는 건 교사진이 될 거다.
[사월세음] 한이랑 레나랑 셋이서 써야 할 반성문은 많이 남긴 했지만요.
[사월세음] 반성문 작성이 끝나면 같이 놀러 갈 거예요! 의신이도 같이 가요!
아무리 교사진이 너그럽게 처분하려 해도 싸움을 하고 학교 시설을 파괴한 아이들에게 벌을 아예 주진 않을 수는 없어서 반성문 작성을 하게 했구나.
사월세음은 양호실 침대에 엎드려 누운 자세로 반성문을 쓰고 있는 한이와 권레나의 사진을 첨부했다.
다친 곳도 전부 치료한 저 셋이 왜 아직도 양호실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반성문을 쓰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메시지는 유상훈과 장남욱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유상훈] (링크)
유상훈은 아무 설명 없이 링크 하나만 올려놨다.
올린 링크를 확인해 보니 은광고와 사관학교 스포츠 교류전의 대표 선발 공문과 그 결과가 나와 있었다.
농구부 쪽을 보니 1학년 중에선 유상훈이 유일하게 대표로 선발되어 있었다.
[장남욱] 축하해!
[장남욱] 우리 학교에서도 1학년 중에서는 시후가 혼자 뽑혔어. 나도 시후랑 같이 나가긴 했는데 떨어졌어…….
저주를 받은 도시후의 근황도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학교 농구부 대표로 뽑힐 만큼 쌩쌩하게 지내고 있나 보다.
장남욱은 그 밑으로도 아주 길게 유상훈을 향한 축하 메시지와 도시후의 활약상에 대해 적어 놨다.
[장남욱] 나는 응원단으로 차출돼서 응원하게 될 것 같아. 우리 학교를 응원할 거지만, 상훈이 너도 응원할게. 선의의 경쟁을 하자!
[유상훈] ㄱㅅ
장남욱의 긴 메시지와 달리 유상훈은 ‘ㄱㅅ’ 자음 두 개만 보내 놨다.
나는 예의상 유상훈보다 더 길게 ‘ㅊㅋㅊㅋ’라고 자음 네 개를 보내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공청훤] 이번 건, 연락 줘서 고마워요.
[공청훤] 앞으로도 한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부탁드릴게요.
공청훤의 정중한 감사 인사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제자를 걱정하는 좋은 선생님이 보낼 만한 평범한 메시지였다.
‘아직 공청훤이 신인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네…….’
나도 평범한 학생다운 답인사를 한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다음 메시지도 은광고의 교사가 보낸 메시지였다.
[제갈재걸] 우람이는 괜찮니?
[제갈재걸] 귀국이 늦어질 것 같구나, 미안하다.
신문부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해외에서 또 사건에 휘말린 것 같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