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변하지 않는 것 (3)
신문부의 단체 메시지방을 보니 신문부와 2학년 0반의 파란만장한 유라시아 여행기가 쓰여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을 향하는 이들의 앞에는 갖가지 사건 사고가 넘쳐 났다.
메시지방에는 문새론과 신문부 부장이 흥분해서 올린 사진과 기사 초고들이 가득했다.
‘이게 다 실화라고? 내가 귀국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 청소년 플레이어들과의 즉석 대결.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희귀 동물들과 거북의 대이동의 목격.
시베리아 횡단 열차 위, 승무원이 모두 사라졌던 의문의 사건과 정체불명의 진족과의 조우.
왕가의 보물이 묻혔다는 황금의 도시 탐험.
그 도시 지하를 가득 메운 에너미의 환영.
땅과 하늘, 바다를 삼킨 안개 속, 그 안에 등장한 세계 10대 지명수배자와 벌인 추격전.
사건 하나만 갖고도 대서사시를 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문부와 2학년 0반 일당들은 저걸 며칠 만에 다 경험했다.
‘제갈재걸의 귀국이 많이 늦어지겠구나.’
귀국 시기보다는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갈재걸은 은광고의 교무부장으로서 목우람이 신경 쓰이겠지만, 이번 건은 그냥 함근형 선생님께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신문부원들에게 앞으로도 여행기를 남겨 달라는 말을 남긴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음은 여행에서 낙오된 어느 불행한 제갈재걸 처돌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홍규빈] (링크)
홍규빈이 보낸 건 기사 링크였다.
기사에는 광일파출소에서 저지른 각종 비리에 관한 폭로가 쓰여 있었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패왕 독고미로의 광일파출소 습격이었다.
독고미로가 광일파출소를 떠난 후, 유일하게 화를 면한 신참 순경이 구급차를 부르고 광일파출소에 도착한 구급대원이 서울은광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은광경찰서에서 광일파출소 습격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다 실패했다.
플레이어 협회, 위성관리팀의 개입이 있던 탓이다.
‘홍규빈이 손을 쓰기 전에 바로 위성관리팀이 개입한 게 이상한데.’
중상을 입은 광일파출소장이 정식 플레이어였기도 했기에 플레이어 협회가 개입할 구실이 있긴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일련의 사건을 떠올려 보니 답이 나왔다.
‘그 자리에는 민그린이 있었어. 민그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송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고…… 그러면 위성관리팀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플레이어 협회 위성관리팀은 순찰차와 파출소 건물이 완파된 상태였으나 기록 기기에 사건 정황이 기록되지 않은 점을 수상히 여겼다고 한다.
광일파출소의 실시간 기록기기의 이상을 지적한 위성관리팀의 엘리트들은 광일파출소 인근을 관측한 위성 기록 자료와 광일파출소의 기록기기의 3년분 기록을 전부 복원했다.
그 결과 그간 기록기기를 끄고 온갖 농간을 부렸던 광일파출소의 행적이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간 저지른 인사 비리와 허위 보고, 뇌물 수수, 부정 청탁, 용역 업체와의 유착 등등.
협회 측에선 경찰서 측에서 대대적인 은폐를 시전하기 전에 언론에 먼저 복원 자료를 공개해 버렸다고 한다.
극히 최근의 기록만을 제외하고서.
‘아쉽게도 습격한 장면만은 복원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일부러 복원을 안 한 걸 거야.’
그리고 이 방대한 비리의 역사가 기록된 자료는 공개되기 무섭게 가독성이 우수한 표로 정리되었다.
그 표를 만든 게 바로 은광고 미술부였다.
그들은 뛰어난 두뇌와 미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갈아 넣어 예술에 가까운 정리 표를 단시간에 만들었다.
은광고 미술부는 주요 언론사보다 앞서 은광고 홈페이지와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정리 자료를 곳곳에 뿌렸다.
필요에 따라 고화질의 인물 사진과 마인드맵도 첨부한 표는 학생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 언론사도 이 표를 인용해 보도를 할 정도였다.
미술부를 위시한 은광고 현역 학생만 움직인 게 아니었다.
졸업생들도 이번 건을 규탄했다.
관련 기사 중에는 은광고 출신 유명인들의 이름이 여럿 보였다.
‘성국언과 권제인의 인터뷰가 있네. 은광구를 지역구로 둔 성국언은 그렇다 쳐도 권제인은 이런 사건에 코멘트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모교가 있는 은광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한 은광고 졸업생들은 관련자들의 엄벌을 요구했다.
광일파출소는 탄탄한 인맥과 오래된 악습을 바탕으로 버텨 온 모양이지만, 더 큰 힘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니 대응할 길이 없었다.
홍규빈이 첨부한 파일 마지막 자락에는 정복 차림의 경찰청장이 고개를 숙이는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건으로 광일파출소는 물론이고 사건을 은폐하려던 서울은광경찰서에도 강도 높은 감사가 진행될 예정이며 두 자릿수가 넘는 이들이 파면당하게 생긴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용역 업체와 보육원에 압력을 가한 입주자대표회의는 법으로 처벌하는 대신 호족이 직접 처리하기로 한 건지 언급이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이름과 단체가 있었다.
‘한이와 보육원에 관련된 이야기도 빠져 있어. 이건 협회와 호족이 묻어 준 거겠지. 그런데…… 남궁 그룹의 이야기도 안 보이는데.’
추가로 기사를 찾아봤지만 남궁 그룹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큰 어그로는 광일파출소가 다 끌었다고 해도 용역 업체와 입주자대표회의도 간간이 언급되는 중인데, 어째서 남궁 그룹은 전혀 보이지 않는 걸까.
내가 의문을 품은 걸 알아챈 홍규빈이 답했다.
[홍규빈] 남궁 그룹 쪽에서는 이미 손발을 끊어 둔 모양이다.
[홍규빈] 광일파출소장은 남궁 회장 직속의 전략기획실장, ‘최 실장’이라는 인물과 접선했다고 밝혔어.
전략기획실의 실장이라면 보통 거물이 아니다.
남궁 그룹 회장 직속의 참모 조직인 전략기획실은 사실상 그룹의 계열사를 총괄하는 곳으로, 이곳의 실장은 부회장의 직급에 해당한다.
파출소장이면 경감급인데, 경감급을 직접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높은 인물이었다.
[홍규빈] 하지만 조사 결과 그가 최 실장이라고 생각한 인물은 남궁 그룹의 계열사도 아닌, 하청 업체의 임원이었어.
[홍규빈] 사건이 터지고 손발을 끊어 낸 게 아니야. 남궁 그룹은 처음부터 손발을 끊어 두고 움직인 거다.
[홍규빈] 이번 사건에서 서류상으로 남궁 그룹은 오히려 피해자가 되었어. 대기업의 임원을 사칭한 사기 사건이 워낙 많으니까…….
자세한 내막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홍규빈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깊게 캐기 어려운 상태인 것 같았다.
‘남궁 그룹은 상당히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있구나.’
4대 암투 시나리오 당시, 남궁 그룹의 전략기획실은 상당히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주도면밀한 행적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사건으로 무너뜨리기 어려울 것 같긴 했다.
[홍규빈] 이번 건은 나도 더 알아보고 움직일 생각이야.
[홍규빈] 조심하렴. 남궁 그룹에 대해 알아볼 때는 반드시 그…… 그날 있던 네 반 친구와 움직이고.
그 반 친구는 황지호를 말하는 건가?
홍규빈은 내가 사건에 연루될 때마다 내 안전을 염려하긴 했지만, 누구를 지목해 같이 움직이라는 건 처음이었다.
고생한 홍규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음 메시지는 이 세계의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주수혁] 의신아.
[주수혁] 저번에 주오 아일랜드에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나?
[주수혁] 시기만 맞으면 전세 낼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키모폴레이아 선상 파티 사건 때, 헤어지기 전 주수혁과 도시후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주오 아일랜드는 꼭 가자. 내가 초대할게.
—여름 방학 때 다 같이 가자! 이 멤버에 플러스알파로!
주수혁은 청소년 수련회 사건 때 안다인과 함께 이계 공략 최대 공헌자 자리를 차지하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번 여름 방학은 주수혁의 사정상 주오 아일랜드에 가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타이틀 히어로답게 바쁜 와중에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인가 보다.
주수혁에게 앞으로 내 일정에 대해 간략히 전했다.
[주수혁] 확인 고마워! 다른 애들 일정도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
[주수혁] 효돈이는 윤섭이랑 탁 할아버지랑 수련 중이었지? 계속 연락이 안 되면 마중 갈 생각이야.
[주수혁] 쌍검 사범님께 들었는데 탁 할아버지는 한번 수련을 시작하면 시간을 잊고 달리실 때가 많다고 하셔서…….
주수혁과 그의 쌍검 사범도 수련에 쏟는 시간이 만만치 않은데 저렇게 말할 정도면 탁거산은 어느 정도인 걸까.
계속 연락이 안 되면 맹효돈을 구하고 덤으로 내 빵셔틀도 지킬 겸 찾아가 봐야겠다.
[나] 맹효돈 찾으러 갈 때 같이 가자.
덧붙여 제안을 하나 더 했다.
주수혁은 섬과 리조트를 전부 빌릴 예정인 듯하니, 그날 약속한 넷이서만 놀기에는 지나치게 넓을 거다.
기왕 노는 거 사람을 더 부르면 즐겁지 않을까.
[나] 그날 주오 아일랜드를 전세 내는 거면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주수혁이 흔쾌히 내 제안을 승낙했다.
나는 주수혁이 기뻐할 만한 초대객 리스트를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정신이 끊기기 직전에 올무가 끙끙거리다 품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져 쓰다듬으며 달래 주다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초상우주와의 교신의 후유증이 깔끔히 사라졌다.
황명호 대저택에서 보기만 해도 건강한 음식과 차를 잘 챙겨 먹고 무엇보다 올무가 내내 곁에 있어 준 덕이다.
‘다 나았는데 또 아침 식사로 유동식이 나왔네.’
아침으로 나온 황기와 맥문동이 들어간 잣죽의 맛은 훌륭했지만, 나 때문에 다들 죽을 먹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랬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황지호에게 물었다.
“목우람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지내고 있어?”
“목우람은 오늘 퇴원할 예정이다. 머물 곳이 없으니 함근형과 김신록을 불러서 기숙사 입소 준비를 시킬 생각이었어. 본인이 원한다면 근로 장학 아르바이트를 주선해 줄 생각이다.”
목우람은 소지금이 0인 데다 디바이스도 없었지.
신분증 건은 홍규빈이 알아서 처리해 준 모양이지만, 목우람은 그 외에도 준비할 게 많을 거다.
“마침 반 아이들로부터 김유리를 보고 싶다고 요청받았다. 오늘 약속을 잡아 같이 방문해 볼까.”
여전히 김유리는 황지호의 결계 없이는 만나기 힘든 상태인가 보다.
황지호가 반 아이들에게 연락하자 대부분 곧바로 답신이 왔다.
정오가 되기 전, 답장을 준 아이들이 황명은광병원의 후문 앞에 모였다.
오늘 모인 1학년 0반 학생은 나, 황지호, 한이, 권레나, 사월세음 다섯이었다.
“자, 갈까.”
황지호는 저번처럼 아이들을 특수 병동으로 안내했다.
한이를 대할 때에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내가 기절한 며칠 사이 마음을 단단히 잡고 준비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 잡담을 나누던 중 MITRON에서 사 온 아이스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던 권레나가 제안했다.
“아, 저기…… 유리 병문안이 끝나면 그린이 만나러 가지 않을래?”
얘기를 들어 보니 민그린은 한이 사건 이후로 계속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한이한테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갈게. 그린이 잘못이 아니라고 직접 만나서 말해 주고 싶어.”
한이가 그렇게 말하자 황지호가 태연한 척 가장했던 표정을 무너뜨리고 조금 놀란 얼굴로 한이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청호가 비슷한 말을 이전에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청호가 저런 말을 했다면 대상은 대죄를 지었던 적호일 거다.
“저도 갈게요! 의신이도 가실 거죠?”
“그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민그린 집 방문 계획을 짜며 특수 병동의 복도를 걸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시선의 정체는 목우람이었다.
목우람은 입을 떡 벌리고 권레나를 바라봤다.
“……?”
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빠르게 깜빡거렸다.
환자복 차림의 낯선 사람이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갑자기 들이대면 막아야지.’
목우람이 얼마나 뮤즈에 집착하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방관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스킬을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털썩.
권레나와 3초 정도 눈을 마주친 목우람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어?”
“저, 저기요……!”
당황한 아이들이 목우람 쪽으로 다가갔다.
목우람은 인생의 여한이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의료진을 부른 황지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퇴원하기는 어렵겠군.”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