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27화 (227/925)

43. 변하지 않는 것 (8)

아침부터 장문의 메시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내 제자 염준열의 메시지였다.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염준열] 오늘 오전부터 한반도 전역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서 계속 비가 내릴 예정이에요. 태풍 주의보도 발령됐어요.

[염준열]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바람도 심해지고 있어서 저는 외출이 금지됐어요.

염준열은 그 밑으로 우울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홍룡 스탬프를 첨부했다.

처음 보는 디자인인 걸 보니 홍룡의 성장에 맞춰서 리뉴얼했다는 새 버전인 것 같았다.

[염준열] 이건 어젯밤에 공개된 플레이어 공개 오디션, ‘플레이리스트’의 티저 영상이에요!

[염준열] (링크)

[염준열] 꼭 봐 주세요!

영상 섬네일은 머리를 전부 넘기고 롤업 재킷을 입은 염준열이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보조 MC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비중이 큰 걸까.

3분가량의 티저 영상을 재생해 보니 생각보다 아는 이들이 많이 나왔다.

의미심장한 BGM을 바탕으로 이계 충돌과 플레이어와의 처절한 역사를 30초간 요약한 후, 이름과 목소리가 모자이크 처리된 여러 사람의 인터뷰가 세련되게 편집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꿈이요? 당연히 있었죠. ‘프로 플레이어’는 아니었어요.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제 친구, 제 가족이 다치잖아요…….

—지금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어둠의 시대’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인터뷰에 이어 수십 개의 생활기록부가 스치듯 지나갔다.

다양한 폰트로 인쇄된 생활기록부의 장래 희망란에는 가수, 아이돌, 예능인, 뮤지컬 배우 등이 적혀 있었다.

장래 희망란에 이어 비고란을 클로즈업했는데, 그곳에는 모두 볼드체로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플레이어’.

이들의 진로를 결정짓는 단어였다.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플레이어 대상 오디션.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을 담당하던 스타 플레이어, 메인 MC ‘양면 거울 최지나’가 화면에 잠깐 등장했다.

그 이후, 참가자들이 직접 촬영한 듯한 낮은 화질의 오디션 영상이 짧게 이어졌다.

야산에서 여유 있게 웃으며 랩을 하는 가사 차림의 스님.

낡은 연습실에서 격렬한 비트의 배경 음악을 깔고 춤을 추는 핑크 머리의 소녀.

노래방에서 구성진 가락의 트로트로 가창력을 뽐내는 중년의 남성.

거울 앞에서 불안하지만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외국인 등등.

영상이 빠르게 흘러간 후, 염준열이 등장했다.

—지금 당신의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하세요.

염준열이 사라지자 오디션 예선 일정과 모집 공고 링크가 떴다.

영상의 조회수는 그리 높진 않았지만, 조회수 대비 추천수와 댓글수는 상당히 높게 찍혀 있었다.

각종 시사, 예능 프로그램에서 플레이어 대표 논객으로 활동 중인 ‘양면 거울 최지나’가 메인 MC고 내 착한 제자 염준열이 처음으로 고정으로 등장하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리고 언뜻 지나치긴 했지만 아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 핑크 머리는 독고미로 같은데. 그리고…… 저 랩하는 스님은 아무리 봐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잖아!’

몇 년 전, 이 세계에 ‘내장산 국립 공원 내장사 사건’이 발생했다.

내장산에서 이계가 발생하고 공략을 시도한 프로 플레이어 팀이 전멸한 가운데, 홀로 내장사에서 결계를 펼쳐 등산객과 신도 수십 명을 구한 승려가 있었다.

당시 출가한 지 얼마 안 된 ‘사미’였던 그는 플레이어였고, 이후 ‘내장산의 성자’라는 이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랩을 하다니!’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스님들이 결성한 밴드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 밴드의 목적은 대중과의 소통, 포교, 봉사 활동이니까 이번 오디션과는 방향성이 달랐다.

‘환속이라도 한 걸까?’

방송국에 보낼 오디션 영상을 찍을 때는 회색 도포를 입긴 했지만.

게임 속에선 없던 전개라 당혹스러웠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오디션이 없었으니까 변하는 게 많겠지.’

정확히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응원하기로 했다.

티저 영상에 추천을 한 번 누르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음 메시지도 장문이었다.

[홍규빈] 의신아, 덕분에 제갈 선생님과 얘기 잘 했다! 정말 고맙구나.

그 이후로 ‘고맙다, 제갈 선생님은 최고다.’라는 말로 요약될 긴 글이 줄줄 이어졌다.

성의 없게 읽으며 스크롤을 대충 내리니 사진이 하나 보였다.

[홍규빈] (사진)

사진에는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는 금고가 보였다.

그 안에 신문부가 만든 제갈재걸 잡지 초판 1쇄와 초벌 버전이 놓여 있었다.

설마 저 금고 안에 있는 것들이 다 제갈재걸과 관련된 물품인가.

[홍규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를 불러. 알았지? 제갈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내가 안 되면 윤 대리나 정 사원한테라도!

홍규빈에 이어 홍규빈의 부하까지 부려 먹을 권한을 얻었다.

홍규빈이 띄운 디바이스 코드를 주소록에 입력한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번 메시지는 제일 길었다.

[장남욱] ……얘들아, 자니?

갑자기 장남욱이 왜 이러지.

발신 시간도 새벽이었다.

새벽 감성을 담아 글을 쓴 것 같았다.

저 뒤로 평소보다 훨씬 긴 메시지가 줄줄 쏟아졌다.

[장남욱] 아,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장남욱은 머쓱해했지만 다시 장문의 메시지를 투척했다.

[장남욱] 많이 이른 시각이지만 너희들 생각이 나서 메시지를 작성했어.

[장남욱]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겪었던 일들은 다시 떠올려도 참 무섭고 힘들어. 난 아무것도 못 했는데, 의신이는 에너미를 쓰러뜨리고, 상훈이는 몸을 날리고…… 내가 너무 한심하다.

[장남욱] 그날 너희들을 만나서 다행이야. 계속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 나도 너희들이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게.

[장남욱] 고맙다, 의신아, 상훈아!

장남욱의 갑작스러운 장문에 유상훈도 길게 답신했다.

[유상훈] ?;

평소 같았으면 ‘?’로 끝났을 텐데 ‘;’까지 찍힌 걸 보니 유상훈은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장남욱] 지금 일어났구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밥은 잘 먹고 있어? 오늘 태풍 온다니까 무리해서 연습하러 나가지 말고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위주로 몸을 단련하는 게 어떨까. 필요하면 영상 링크를 보낼게.

[유상훈] ㅇ

그 이후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남욱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마음에 걸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예전에 장남욱이 도시후 무단 외출 사건으로 징계실로 끌려갔을 때 만든 단체 메시지방 쪽에 새 메시지가 올라왔다.

[유상훈] 장남욱 뭐임?

도시후가 장남욱의 룸메이트니까 뭔가 아는 게 있나 해서 물어본 것 같다.

‘유상훈이 먼저 나서서 묻다니…….’

유상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나도 물어보기로 했다.

[조의신]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장남욱이 새벽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뭔가 이상해서.

답변은 곧 올라왔다.

[도시후] 어제 꿈이 안 좋았나 봐ㅎㅎㅎ.

[도시후] 악몽을 꿨대.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런 걸까.

더 추궁해 보고 싶었지만 장남욱이 어떤 악몽을 꿨는지는 도시후도 모르는 것 같아서 넘어갔다.

*    *    *

은광고 조경 구역 청랑호 주변.

태풍 탓에 에어보드를 탈 수 없어서 우비를 입고 뛰어서 여기까지 왔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멀리서 천둥소리도 들리는 가운데, 청랑호 주변은 오늘도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왔군.”

결계로 비바람을 막고 있는 건지,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백호군이 서 있었다.

내가 벽사의 결계를 직접 해제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태풍 속에서 기다려 주다니!

역시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배려심은 남달랐다.

결계 사이로 들어서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오늘 대련에서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무명의 운명’을 써 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백호군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대련하지 않는다.”

그럼 오늘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내가 의문을 표하는 사이, 평소 대련을 하던 서방칠수가 있는 중앙 돔에 다다랐다.

그리고 문이 열려 안이 보였다.

‘이건…….’

이능으로 구현한 밤하늘 아래에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체스보드가 있었다.

“내가 건 조건을 기억하나?”

상보심금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백호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백호군이 조건을 하나 걸었다.

—나와 체스를 둬라.

그때 나는 곧바로 체스를 두겠다고 했으나 백호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너와 대국을 해도 의미가 없다.

그때 욱했던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두자.”

*    *    *

태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장남욱은 유상훈의 집을 방문했다.

오전 늦게 장남욱에게 직접 전화한 유상훈은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묘한 꿈을 꿔 마음이 불안했던 장남욱은 지금 시간이 된다고 답했다.

“안녕,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의신이도 왔어? 상희 누나는 계셔?”

“아니. 둘 다 없어. 유상희 씨는 언제 올지 모르는데, 조의신은 안 와.”

“어?”

유상훈은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농구공들을 툭툭 발로 쳐서 자리를 만들고 앉았다.

“너, 이상한 꿈 꿨다면서.”

“어…… 시후가 말했어? 그냥 개꿈이야.”

“나도 개꿈 꿨다.”

설마 저도 개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불러낸 건가?

장남욱이 그런 생각을 했지만, 유상훈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유상훈은 뭔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생각 없이 행동하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똑같은 내용의 개꿈을 두 번 꿨는데, 둘 다 네가 나왔어. 손민기 그 새끼도 나오고, 감독관도 나오고, 그 수배 에너미도 나오고.”

유상훈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냉방이 잘 된 방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혹시…….’

장남욱은 머뭇거리다 안경을 벗고 이능파를 눈에 모았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문 유상훈이 놀란 얼굴을 했다.

갑자기 이능파를 쓰는 것도 그랬지만, 장남욱의 눈이 별처럼 빛났던 탓이다.

백리안에서 파생된 아스트라이아의 ‘별 처녀의 눈’.

장남욱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유상훈을 응시했다.

“거의 잔해밖에 없지만, 너한테도 그게 있구나.”

“뭐가?”

“검은 안개 같은 거. 이능파의 잔해 같은데…….”

장남욱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몽을 꾸고 맨눈으로 거울을 봤을 때, 장남욱은 저를 둘러싼 검은 안개를 봤다.

그 검은 안개 자체가 무섭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장남욱은 제 악몽의 원인이 저 안개임을 짐작했다.

“내가 꾼 악몽은…….”

“잠깐.”

유상훈이 설명하려는 장남욱을 막고 디바이스를 켰다.

“메모장 켜서 네가 꿨던 꿈 내용 적어. 나한테 안 보이게.”

“어? 아, 그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몸을 틀어 잠시간 메모를 작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꿨던 꿈의 내용을 교환했다.

간결하게 몇 줄로 요약한 유상훈.

몇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묘사한 장남욱.

두 사람이 글을 작성한 형식이나 글의 길이는 달랐다.

그러나.

“…….”

“이럴 수가…….”

빈사 상태로 등장한 감독관.

장남욱과 유상훈을 에너미 쪽으로 밀치고 문으로 달린 손민기.

큰 소리를 낸 탓인지 손민기를 먼저 노린 에너미.

굳어서 도망도 못 가는 장남욱을 유상훈이 감쌌으나 두 사람 다 동시에 뿔에 꿰뚫려 사망.

그리고 조의신의 부재.

두 사람이 꾼 악몽의 내용은 일치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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